"홍련봉 1보루 연화문 와당"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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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 정보
 
{{사물 정보
|대표명칭 = 아차산 4보루 등자<ref>아래 사진출처: [http://nambaone.tistory.com/148 tistory nambaONE]</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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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홍련봉 1보루 연화문 와당<ref>아래 사진출처: [http://news.donga.com/3/all/20160526/78323616/1 '아홉달 애태운 접시 반쪽 찾은 날 기쁨의 회식', 동아닷컴, 2016년 5월 26일 기사]</ref>
 
|시대 = [[삼국시대]]
 
|시대 = [[삼국시대]]
|발견지 = [[아차산 4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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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지 = [[홍련봉 1보루]]
|주소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산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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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사진 = 4보루등자.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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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연화문와당.jpg
 
}}
 
}}
 
=='''개관'''==
 
=='''개관'''==
등자는 기마병이 말에 탈 때, 말을 걸어서 오르기 편하게 한 고안이며, 안장과 함께 균형감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도구이다. 특히 삭을 사용하는 갑주무사의 경우 등자가 필수적이며, 따라서 철기병의 등장과 마구(馬具)의 등장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아차산 4보루 등자'''는 [[삼국시대]] 말기의 형태로 당나라와 [[통일신라]]시대에도 이런 형식이 기본적인 형태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 특징은 발이 닿는 부분이 [[삼국시대]] 중기의 것에 비하여 블록렌즈 모양으로 넓고 편평하다.<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9&cp_code=cp0229&index_id=cp02290640&content_id=cp022906400001&search_left_menu=3 아차산 4보루 등자, 문화콘텐츠닷컴]</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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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련봉 1보루 연화문 와당'''은 남한 지역에서 처음으로 출토된 고구려 연화문 와당으로, [[홍련봉 1보루]] 기와 건물지에 사용된 기와로 확인되었다. 중국 문헌인 『신당서(新唐書)』의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高句麗唯王室及府佛-瓦」라 하여 "고구려는 왕실과 관부 또는 불사(佛寺)에 기와를 사용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홍련봉 1보루]]에서 연화문 와당을 사용하는 기와 건물지가 확인되는 점은 [[아차산]]에 행정관청이 존재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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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4보루 등자]]와 [[아차산 4보루 재갈]], [[아차산 4보루 철제 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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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4보루]]에서는 말 재갈과 경판 및 등자 등의 마구가 출토되어 고구려뿐만 아니라 삼국 시대 마구의 편년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아차산 보루에도 기병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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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발견된 [[아차산 4보루 철제 투구]], [[아차산 4보루 등자]]와 [[아차산 4보루 재갈]], 그리고 그 발견지의 특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각 보루에 주둔하고 있는 고구려의 지휘관급들 정도는 말을 타고 산에 올랐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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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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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고구려 성곽에는 치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매우 효과적인 방어 시설이다. 일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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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서는 적과 1:1로 마주보고 전투를 치러야 하지만, 성벽에서 돌축된 치에서는 성벽을 공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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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최근 연천 무등리2보루에서도 남쪽 석축 성벽 기저부를 점토로 보강하였음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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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박물관, 2011『, 연천무등리2보루2차발굴조사약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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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해당 부분은 필자의 2010년도 기존 논고(양시은 2010a)를 바탕으로 아차산 보루군에 초점을 맞추어 수정 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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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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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 IP: 112.216.205.154 | Accessed 2016/05/19 16:06(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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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고구려 보루의 구조 및 성격 _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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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적의 측면도 공격할 수 있다. 아차산 보루군에서는 홍련봉 1보루를 제외한 모든 유적에서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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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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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는 보통의 체성벽에 비해 훨씬 견고하게 축조되는데, 이는 성곽 내에서 치가 차지하는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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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치는 전망이 좋아 적의 동태를 보다 용이하게 관찰할 수 있는 지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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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적의 접근로와 같이 방어상 취약한 곳에 설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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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건물지에서는 주변에 소결된 점토 덩어리가 확인되고 있는데, 돌로 건물의 경계 및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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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삼은 다음 그 위에 점토와 볏집 등을 섞어 만든 벽체를 이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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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련봉1보루에서는기와건물지도확인되었는데, 지하식벽체건물지에기와를올렸다.『 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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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書』에는 고구려 후기에는 기와가 왕궁이나 관청, 사찰 등에서만 사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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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홍련봉 1보루에도 관청이 존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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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아차산 보루군에서 확인되고 있는 건물지에는 대체로 1개 이상의 쪽구들이 설치되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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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쪽구들 주변에서는 접시나 완, 호, 옹 등 생활 용기로 사용된 토기가 주로 출토되고 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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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도 구의동 보루에서는 쪽구들의 아궁이에 놓였던 철솥이, 아차산 4보루에서는 배연구에 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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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던 연통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쪽구들이 있는 건물지는 군사들이 평상시 거주하는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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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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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홍련봉 1보루에서 연화문와당을 사용하는 기와 건물지가 확인되는 점은 아차산 보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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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행정관청이 존재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아차산 보루군이 군사적인 목적만을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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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었다면, 굳이 작은 보루에 기와 건물을 조성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홍련봉 1보루 보다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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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 크고, 많은 시설과 중요 유물들이 확인된 아차산 3보루나 4보루에서는 기와가 출토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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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는 점 또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홍련봉 1보루는 해발 125m에 위치하여, 아차산에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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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낮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가장 접근하기 쉽기 때문에 대민(對民) 기능을 담당하는 행정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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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들어서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렇다고 해서 홍련봉 1보루가 아차산 보루 전체를 지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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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것은 아니다. 현재까지의 조사 결과를 놓고 보더라도 아차산 보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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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관장하는 군사지휘소 역할은 규모가 가장 큰 아차산 3보루나 아차산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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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나 명문접시 등과 같은 주요 유물이 출토된 아차산 4보루에서 담당하였다고 해도 크게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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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것은 없다. 다만 아차산 보루군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가정 하에, 행정관청을 홍련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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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보루에 축조함으로써 한강 유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아차산의 첫 번째 봉우리에 축조된 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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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을 바라볼 수 있게 하고, 또 접근할 수 있도록 하여 대민 기능의 효율을 높였을 가능성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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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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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문와당이 출토된 홍련봉 1보루에는 대민 기능을 담당하는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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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청이 존재하였으며, 아차산에서 규모가 가장 큰 아차산 3보루나 중요 유물이 출토된 아차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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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루의 경우에도 군사 지휘소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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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련봉 1보루]] 보다 규모가 크고, 많은 시설과 중요 유물들이 확인된 [[아차산 3보루]]나 [[아차산 4보루]]에서는 기와가 출토되지 않았다는 점 또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규모가 가장 큰 [[아차산 3보루]]나 [[아차산]]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투구나 명문접시 등과 같은 주요 유물이 출토된 [[아차산 4보루]]에서는 [[아차산 보루군]]을 관장하는 군사지휘소 역할을 담당했고, [[홍련봉 1보루]]는 해발 125m에 위치하여, [[아차산]]에서 가장 낮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가장 접근하기 쉽기 때문에 대민(對民) 기능을 담당하는 행정관청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차산 보루군]]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가정 하에, 행정관청을 [[홍련봉 1보루]]에 축조함으로써 한강 유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아차산]]의 첫 번째 봉우리에 축조된 기와 건물을 바라볼 수 있게 하고, 또 접근할 수 있도록 하여 대민 기능의 효율을 높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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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4보루 등자]]|| A는 B에서 발견되었다||[[아차산 4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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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련봉 1보루 연화문 와당]]|| A는 B에서 발견되었다||[[홍련봉 1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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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4보루 등자]]|| A는 B시대에 만들어졌다||[[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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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련봉 1보루 연화문 와당]]|| A는 B시대에 만들어졌다||[[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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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4보루 등자]]|| A는 B와 관련된다||[[아차산 4보루 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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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4보루 등자]]|| A는 B와 관련된다||[[아차산 4보루 철제 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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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gallery>
 
파일:등자재갈.jpg|아차산 4보루에서 출토된 등자와 재갈<ref>사진출처: 최종택, 「아차산 고구려 보루 발굴 10년, 성과와 의의」, 한국사 시민강좌, 44, 209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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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석'''==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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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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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시은, 『아차산 고구려 보루의 구조 및 성격』고문화, (79), 2012년, 5-28쪽.
  
 
=='''기여'''==
 
=='''기여'''==

2016년 6월 26일 (일) 14:43 기준 최신판

개관

홍련봉 1보루 연화문 와당은 남한 지역에서 처음으로 출토된 고구려 연화문 와당으로, 홍련봉 1보루 기와 건물지에 사용된 기와로 확인되었다. 중국 문헌인 『신당서(新唐書)』의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高句麗唯王室及府佛-瓦」라 하여 "고구려는 왕실과 관부 또는 불사(佛寺)에 기와를 사용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홍련봉 1보루에서 연화문 와당을 사용하는 기와 건물지가 확인되는 점은 아차산에 행정관청이 존재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홍련봉 1보루 보다 규모가 크고, 많은 시설과 중요 유물들이 확인된 아차산 3보루아차산 4보루에서는 기와가 출토되지 않았다는 점 또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규모가 가장 큰 아차산 3보루아차산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투구나 명문접시 등과 같은 주요 유물이 출토된 아차산 4보루에서는 아차산 보루군을 관장하는 군사지휘소 역할을 담당했고, 홍련봉 1보루는 해발 125m에 위치하여, 아차산에서 가장 낮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가장 접근하기 쉽기 때문에 대민(對民) 기능을 담당하는 행정관청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차산 보루군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가정 하에, 행정관청을 홍련봉 1보루에 축조함으로써 한강 유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아차산의 첫 번째 봉우리에 축조된 기와 건물을 바라볼 수 있게 하고, 또 접근할 수 있도록 하여 대민 기능의 효율을 높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지도

클래스

  • 사물

관련 문서

이 문서 관계 관련 문서
홍련봉 1보루 연화문 와당 A는 B에서 발견되었다 아차산
홍련봉 1보루 연화문 와당 A는 B에서 발견되었다 홍련봉
홍련봉 1보루 연화문 와당 A는 B에서 발견되었다 홍련봉 1보루
홍련봉 1보루 연화문 와당 A는 B에서 조사되었다 한국고고환경연구소
홍련봉 1보루 연화문 와당 A는 B시대에 만들어졌다 고구려

주석

  1. 아래 사진출처: '아홉달 애태운 접시 반쪽 찾은 날 기쁨의 회식', 동아닷컴, 2016년 5월 26일 기사

참고

  • 양시은, 『아차산 고구려 보루의 구조 및 성격』고문화, (79), 2012년, 5-28쪽.

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