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도성의 교회

DH 교육용 위키
Kuhh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4월 29일 (금) 00:29 판

(비교) ← 이전 판 | 최신판 (비교) | 다음 판 → (비교)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 후기 선교 활동

그리스도의 복음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인 18세기부터이다. 그러나 당시에 있은 복음의 전래는 초대 교회의 복음전승이나 일반적인 선교, 즉 선교사의 파견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을 왕래하던 조선 사신들에 의하여 전래된 천주교 서적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라는 한문 천주교서에 담겨 있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일부 조선의 학자들이 수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특이한 복음전파를 가리켜 문서선교(文書宣敎)라 한다.다만, 그 당시에 이미 중국천주교회의 선교사들과 조선인들 사이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매개로 한 접촉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비록 나라 밖에서의 일이기는 하지만 조선에 대한 선교활동이 싹트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이와 같은 선교가 그 뒤에도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계속 행하여졌다. 여기에서 마침내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인 이승훈(李承薰)이 탄생하게 되었다. 1784년 이승훈의 영세 귀국으로 조선천주교회는 창설을 보게 된다. 그 결과 이승훈과 그의 동료들은 그리스도 복음의 전달자가 되었다.그렇지만 그들의 활동은 공식적으로 파견된 사도로서의 선교는 아니었다. 한국 땅에서 정식으로 선교활동이 이루어진 것은 그로부터 훨씬 뒤의 일이었다.1794년 조선 신자들의 청원을 받아들인 중국천주교회에서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조선에 파견한다. 바로 이 주문모 신부의 조선입국이 한국선교의 효시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는 이미 천주교회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고 있었으며, 따라서 주문모 신부의 선교활동은 처음부터 비밀리에 행하여질 수밖에 없었다.그럼에도 주문모 신부와 초기 교회의 신자들이 행한 선교의 결과는 훌륭하여 1800년 무렵 신자 수는 약 1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그러는 동안 주문모 신부의 선교활동이 조선당국에까지 알려지고, 이에 따라 1801년 신유박해 때 그는 스스로 체포되어 새남터[沙南基]에서 참수당하였다. 이로부터 30여 년 동안 조선에는 선교사들의 입국이 허용되지 않았다.선교사들이 조선에서 활동하게 된 것은 1836년 말부터였다. 이 무렵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프랑스의 파리외방전교회(Societe des Missions Etrangeres de Paris) 소속 신부인 모방(Maubant, 羅伯多祿)·샤스탕(Chastan, 鄭牙各伯)과 주교 앵베르(Imbert, 范世亨) 등 이었다.바로 이들이 조선에 첫발을 들여놓은 서양인 선교사들이었다. 이에 앞서 로마교황청에서는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천주교회를 맡아 주도록 요청하였다. 그리고 1831년에는 조선 포교지를 중국천주교회로부터 독립시켜 조선대목구(朝鮮代牧區)를 설정함과 동시에 이 지역에 대한 선교를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하였다.파리외방전교회는 그 뒤 1908년까지 조선에서의 선교활동을 단독으로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 단체의 활동은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되기까지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흔히 박해라 일컬어지는 이 수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선 각지에 비밀교회(Crypto―Church)로서의 공소(公所)나 본당(本堂)들을 설립하였다.그 결과 1850년에는 약 1만 1000명, 1865년에는 약 2만 3000명에 달하는 신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은 기해박해(1839) 때 3명, 병인박해(1866) 때 9명 등 모두 12명이 참수형이나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프랑스 선교사들의 활동 가운데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한국인 성직자 양성이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설립 당시부터 새 선교지역 신자를 선택하여 성직자로 양성한다는 점을 선교지침의 하나로 정해 놓고 있었다.이에 따라 한국에서도 성직자 양성을 추진하여 1845년에 김대건(金大建) 신부를, 1849년에 최양업(崔良業) 신부를 탄생시켰다. 뿐만 아니라 조선 땅 안에서의 성직자 양성을 목적으로 1855년에는 충청도 제천의 배론[舟論]에 신학당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66년 박해로 이 신학당은 곧 폐쇄되었고, 조선교회는 다시 선교사가 없는 시기를 맞이해야만 하였다.박해당시 중국으로 피신한 세 명의 선교사들 중 리델(Ridel, 李福明) 신부가 1866년 9월 병인양요 당시 조선에 상륙한 적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선교사들이 재입국하여 활동한 것은 1876년부터였다.이 때 조선의 선교사로 다시 숨어들어온 사람들은 우선 폐허가 된 천주교회를 부흥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조선의 개항에 편승하여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1886년에 체결된 한불조약 안에 이에 관한 조항을 삽입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선교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한양에 세워진 교회

3d모델 교회명 건축년 종교단 선교사 기타
1 정동제일교회 1885 기독교 대한감리회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
2 약현성당 1892 파리외방전교회 두세(Camille-Eugene Doucet)
3 서울주교좌성당 1922 영국 대한성공회 마크 네피어 트롤로프
4 명동성당 1898 천주교 서울대교구 코스트(Coste)
5 프란치스코 영도원 1987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아뽈리나리스 형제
6 한성교회 1920 경성YMCA 처다오신(車道心)
7 _ 상동교회 1944 기독교 대한감리회 윌리엄 벤턴 스크랜턴
8 _ 새문안교회 1887 북장로회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
9 _ 연동교회 1894 대한예수교장로회 사무엘 무어
10 _ 낙동성당 1891 영국 대한성공회 찰스 존 코르프
11 _ 장림성당 1892 영국 대한성공회 찰스 존 코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