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윈폴리오"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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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트윈폴리오 활동으로 인해 학업에 소홀했던 윤형주는 계속해서 집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었고, 학업에 전념하기 위해서는 트윈폴리오 활동을 중단해야만 했다. 결국 윤형주는 트윈폴리오를 만든지 2년만인 1969년 12월 23일 서울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가진 트윈폴리오 공연에서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트윈폴리오 활동으로 인해 학업에 소홀했던 윤형주는 계속해서 집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었고, 학업에 전념하기 위해서는 트윈폴리오 활동을 중단해야만 했다. 결국 윤형주는 트윈폴리오를 만든지 2년만인 1969년 12월 23일 서울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가진 트윈폴리오 공연에서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송창식도 그 자리에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조금씩 재정젹 여유를 가지게 된 그에게 미리 말할 용기가 없었다고 한다.  
 
송창식도 그 자리에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조금씩 재정젹 여유를 가지게 된 그에게 미리 말할 용기가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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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봉에서 나와 여러 술집을 돌며 공연할 때 우리는 하루에 1000원을 벌었다. 그는 500원으로 밥을 먹어야 했고, 목욕을 해야 했고, 내의와 양말을 사야 했고, 이발도 해야 했다. 경제적으로 빡빡했다. 당연히 집을 새로 얻을 여유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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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부터 트윈 폴리오는 서울 명동 맥주집 오비스캐빈에서 공연하기 시작했다. 각자 한 달 20만원을 받았다. 당시 대기업 신입 사원의 초봉이 14만원이었다. 파격적인 대우였다. 그때 처음으로 송창식은 광화문 인근에 월세 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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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윈 폴리오로 활동하는 2년간 지칠 때면 우리는 인천 무의도에 갔다. 무의도는 송창식의 안식처였다. 배를 타고 섬에 도착하면 송창식이 제일 먼저 데려갔던 곳이 이장(里長) 집이었다. 이장은 늘 사발에 소주를 담아 건넸다. 당시 한 주간지가 '술 잘 먹는 연예인 5인' 안에 나를 꼽았을 정도로 당시엔 술을 잘 마셨다. 그 술을 받아 마시곤 해변으로 나갔다. 함께 기타를 치고 노래 부르며 밤을 지새웠다. 파도가 몰려올 때마다 바다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은파(銀波)였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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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윈 폴리오의 추억을 뒤로 한 채 우리는 40년 넘게 각자의 길을 걸었다. 그래도 언제나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어찌 보면 신기한 일이다. 누군가 그랬다. 송창식도 대단하지만 송창식과 40년 넘게 친구 하는 당신이 더 대단하다고. 사실 우리는 많이 달랐다. 예컨대 음악의 지향성이 달랐다. 송창식이 음악적으로 수준을 높이기 위해 새로운 화음을 쓰자고 권유하면, 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범주를 떠나지 말자고 반대하는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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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엣 자체도 의외의 조합이었다. 1969년 한국을 방문했던 일본의 유명한 음악 평론가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트윈 폴리오는 참 불가사의한 팀이다. 전혀 성격이 다른 두 목소리가 어떻게 이런 화음을 만들어내는가? 윤형주의 목소리는 부드럽다. 때로 소년 같거나 여성적이다. 가정적인 느낌이 있다. 반면 송창식의 목소리에선 물과 바람, 파도 소리가 들린다. 때로 흙냄새가 나고, 때론 바위를 때리는 것 같다." 그 평론가를 직접 만났을 때 나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당신들의 목소리는 참 드물고 귀한 목소리들이오. 부디 잘 보존하고 간직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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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트윈 폴리오는 해체했어도 송창식은 그 부탁에 충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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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7/21/201107210251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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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7/21/201107210251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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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7/21/201107210251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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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미디어'''==
 
=='''멀티미디어'''==

2019년 6월 15일 (토) 22:19 판


정의

1960년대 후반 활동한 2인조 남성 포크(통기타) 그룹

내용

결성

1967년 송창식이 세시봉에 등장한 이후, 세시봉 사장이 송창식에게 숙식을 해결해줄테니 마음에 드는 사람 두 명을 모아 트리오를 결성해보라고 제안했다.[1] 그때 송창식은 윤형주와 이익균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 윤형주는 송창식이 팝송을 전혀 알지 못해 하나씩 가르쳐야 한다는 것 때문에 망설였으나, "그를 놓치기엔 첫인상이 무척 강렬"해서 끝내 승낙했다. 이렇게 1967년 10월 초 트윈폴리오의 전신인 '세시봉 트리오'가 결성 되었으나,[2] 이익균의 갑작스러운 군입대로 인해 1968년 1월 말에 해체하게 된다. 당시 한밤의 멜로디' 연출을 맡았던 임성기 PD가 세시봉 트리오의 첫 출연후 노래가 좋다며 고정 출연을 제안했고 이익균의 군입대로 인해 해체하게 되어서 나갈 수 없다고 하는 이들에게 간단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래? 그럼 둘이 해. 이름 새로 만들어 가지고 나와."

그들은 'Song Folio'란 팝송 악보에서 힌트를 얻어서'트윈 폴리오'란 이름을 지었고 '한밤의 멜로디'에 고정 출연하기 시작했다.[3]

활동

당시 그들이 출연하던 '한밤의 멜로디'는 밤 11시에 시작해서, 방송이 끝나면 밤 12시가 넘은 통행금지 시간이었다.
집에 갈 수 없었던 송창식윤형주는 자주 세시봉에서 자곤 했다. 매주 새로운 노래를 연습해야 했으나,
송창식의 천재성 덕분에 많은 노래의 음을 딸 수 있었고, 그 동안 윤형주는 가사를 한국어로 번안했다.[4]
그 때 부른 노래들이 클리프 리차드(Cliff Richard)의 '행복한 아침(Early in the morning)', 비지스(Bee Gees)의 '내 고향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의 '자메이카여 안녕(Jamaica Farewell)' 등의 팝송과 더불어 '퐁당퐁당', '따오기', '오빠생각', '등대지기' 등 동요도 불렀다. 정훈희의 '안개', 최희준의 '빛과 그림자', 패티 김의 '내 사랑아', 김상희의 '빨간 선인장', 김추자의 '나뭇잎이 떨어져서' 등 가요도 재해석해 불렀다.

트윈폴리오는 차츰 인기를 얻어갔다. 1968년 4월부터는 TBC 라디오 '브라보 선데이'에도 고정 출연하기 시작했다. [5] 이 '브라보 선데이'를 통해 트윈폴리오의 첫 히트곡이 탄생했다. PD가 그리스 가수 나나 무스쿠리의 노래를 들려주며 말했다. "트윈폴리오가 이 노래를 불러 봐." '하얀 손수건'이었다. 송창식이 가사를 번안했다. 같은 PD의 권유로 카니 프란시스의 곡을 윤형주가 번안해 '웨딩 케이크'를 발표했고 그해 여름 이 두 곡을 실은 앨범[6]을 발매했다.

1968년, 트윈폴리오 인기의 절정은 그해 겨울에 왔다. 12월 23일부터 이틀간 서울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리사이틀을 열었다. 가을에 조영남이 포크 가수로는 처음으로 대규모 공연을 열었던 곳이다. 트윈 폴리오 리사이틀은 매회 전 석이 매진됐고, 일이백 명이 더 몰려들었다. 이 공연으로 트윈 폴리오는 가요사 최초의 하이틴 스타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7]

해체

당시 트윈폴리오 활동으로 인해 학업에 소홀했던 윤형주는 계속해서 집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었고, 학업에 전념하기 위해서는 트윈폴리오 활동을 중단해야만 했다. 결국 윤형주는 트윈폴리오를 만든지 2년만인 1969년 12월 23일 서울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가진 트윈폴리오 공연에서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송창식도 그 자리에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조금씩 재정젹 여유를 가지게 된 그에게 미리 말할 용기가 없었다고 한다. [8]

멀티미디어

이미지

동영상

웨딩케이크

하얀손수건

타임라인

네트워크 그래프

참고문헌

이미지출처

아티스트 정보 사진

기여

주석

  1. 송창식에게 왜 이런 제안을 했는지 궁금하면 나무위키 송창식의 천재성 부분을 참고
  2. 윤형주 칼럼,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4 무협지 읽는 사나이
  3. 윤형주 칼럼,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5 트윈폴리오의 탄생
  4. 당시만 해도 방송에서 팝송을 온전히 부를 수 없었다. 적어도 노래의 절반을 한국말로 불러야 했던 시절이다.
  5. 패티 김, 이미자, 남진, 현미, 최희준, 김상희, 이금희, 유주용, 블루벨스 등 기라성 같은 가수들과 함께 출연하곤 했다. 그들에 비하면 트윈 폴리오는 햇병아리에 가까웠다.
  6. 트윈폴리오 1집, LP 한 장에 펄 시스터즈 데뷔 앨범을 함께 실은 반쪽짜리 앨범이었다고 한다.
  7. 윤형주 칼럼,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5 트윈폴리오의 탄생
  8.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