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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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우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4월 16일 (화) 16:1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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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이 페이지는 고려대 철학과 대학원 동양철학전공 원전 강독 세미나(의적단)의 일환으로 작성되었다.
『통서(通書)』는 송대 신유학자인 주돈이의 저서이다.[1] 글이 매우 짧고 단순하여 해석하기 어렵고 해석하더라도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려운데, 주자마저도 주석을 단순하게 달아 후학을 고통스럽게 하였다.

원문 및 朱注

각 장의 내용은 다음의 링크를 확인할 것.

誠上第一

誠下第二

誠幾德第三

聖第四

愼動第五

道第六

師第七

幸第八

思第九

志學第十

順化第十一

治第十二

禮樂第十三

務實第十四

愛敬第十五

動靜第十六

樂上第十七

樂中第十八

樂下第十九

聖學第二十

公明第二十一

理性命第二十二

顔子第二十三

師友上第二十四

師友下第二十五

過第二十六

勢第二十七

文辭第二十八

聖蘊第二十九

精蘊第三十

乾損益動第三十一

家人睽無妄第三十二

富貴第三十三

陋第三十四

擬議第三十五

刑第三十六

公第三十七

孔子上第三十八

孔子下第三十九

蒙艮第四十


통서해 서문


《通書解》序 - 宋 朱熹


通書者, 濂溪夫子之所作也.(夫子性周氏, 名敦頤, 字茂叔). 夫子自少卽以學行有聞於世, 而莫或知其師傳之所自. 獨以河南兩程夫子嘗受學焉, 而得孔孟不傳之正統, 則其淵源因可槪見. 然所以指夫仲尼, 顔子之樂, 而發其吟風弄月之趣者, 亦不可得而悉聞矣. 所著之書, 又多放失. 獨此一篇, 本號易通, 與太極圖說並出, 程氏以傳於世, 而其爲說, 實相表裏. 大抵推一理、二氣、五行之分合, 以紀綱道體之精微; 決道義、文辭、祿利之取舍, 以振起俗學之卑陋. 至論所以入德之方、經世之具, 又皆親切簡要, 不爲空言. 顧其宏綱大用, 旣非秦漢以來諸儒所及; 而其條理之密、意味之深, 又非今世學者所能驟而窺也. 是以程氏旣沒, 而傳者鮮焉∘其知之者, 不過以爲用意高遠而已. 熹自蚤歲旣幸得其遺編而伏讀之, 初蓋茫然不知其所謂, 而甚或不能以句∘壯歲獲遊延平先生之門, 然後始得聞其說之一二. 比年以來, 潛玩旣久, 乃若粗有得焉. 雖其宏綱大用所不敢知, 然於其章句文字之間, 則有以實見其條理之愈密、意味之愈深, 而不我欺也. 顧自始讀以至於今, 歲月幾何, 倏焉三紀. 慨前哲之益遠, 懼妙旨之無傳, 竊不自量, 輒爲注釋. 雖知凡近不足以發夫子之精蘊, 然創通大義, 以俟後之君子, 則萬一其庶幾焉. 淳熙丁未九月甲辰, 後學朱熹謹記.


『通書』 는 염계 선생이 지은 것이다. (선생의 성은 周씨이고, 이름은 敦頤이며, 자는 茂叔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학문과 행실로 세상에 소문이 났으나 아무도 그 사승관계의 연원을 알지 못했다. 다만 하남의 두 程子(明道와伊川)가 일찍이 선생에게 학문을 전수 받아서 공자와 맹자로부터 전해지지 않던 정통을 얻었기 때문에 곧 그 연원은 이로써 대략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공자와 안자의 즐거움을 가리켜주고 [1] 음풍농월의 흥취를 일으키게 했던 것 [2] 역시 들을 수 없는데다가 저술한 책도 흩어지고 잃어버린 것이 많다. 오직 이 한 편(『통서』)은 본래 ‘易通’으로 불렸는데 「太極圖說」과 함께 나와서 程氏가 이를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으니 그 학설은 실로 (「태극도설」과) 서로 표리를 이룬다. 대체로 (그 내용은) 一理와 二氣,五行의 나누어짐과 합해짐을 추론하여 道體의 정밀하고 미묘함을 紀綱으로 삼고, 道義와 文辭, 祿利 중에 (어느 것을) 취하고 버릴 것인지 결정해서 세속적 학문의 비루함 가운데서 떨쳐 일어났다. 德에 들어가는 방법과 세상을 경영하는 도구를 논하는 데 이르러서는 또한 모두 절근하고 간단하며, 빈말을 하지 않았다. 그 학설의 넓은 대강과 큰 쓰임을 돌아보건대, 이미 진나라와 한나라 이래의 여러 유자들이 미칠 바가 아닌데다가, 그 조리의 엄밀함과 의미의 심오함 또한 오늘날의 학자들이 갑작스럽게 엿볼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이 때문에 程氏가 세상을 떠나자 전한 사람이 거의 없다. (그 책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도 그 생각이 고원하다고 여길 뿐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미 다행히도 그 남겨진 책을 얻어 읽었으나, 처음에는 아득하여 그 말하는 바를 알지 못했고, 심하게는 간혹 구두도 뗄 수 없었다. 나이가 들어 延平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한 뒤에야 비로소 그 학설의 일부를 알 수 있었다. 최근 이래로 오랫동안 깊이 완미해보고 나서야 조잡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비록 넓은 대강과 큰 쓰임은 감히 알 수 있는 바가 아니지만, 그 책을 장을 나누고 구두를 찍는 것과 문자에 대해서는 진실로 그 조리가 더욱 치밀하고 의미는 더욱 깊어서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회고해 보건대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가? 어느새 홀연히 36년이 되었다. 앞선 철인들이 점점 더 멀어짐을 개탄했고, 그 미묘한 뜻이 전해지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여 삼가 나의 역량을 헤아리지도 않고 주해를 달았다. 비록 평범하고 천근하여 선생(학문)의 정밀한 뜻을 드러내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알지만, 처음 대강의 의미를 통하게 하여 뒷날의 군자를 기다리니 만의 하나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순희 정미년(1187년) 9월 갑진일, 후학 朱熹는 삼가 서문을 쓰다


주석

  1. 『論語』 《雍也》 子曰: "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飲,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 回也!"
  2. 『二程遺書』 卷三. “詩可以興. 某自再見茂叔後, 吟風弄月以歸, 有‘吾與點也’之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