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정수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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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이 페이지는 고려대 철학과 대학원 동양철학전공 원전 강독 세미나(의적단)의 일환으로 작성되었다.
주정수수설(周程授受說)이란 주돈이와 이정 사이의 관계를 잠깐 동안의 사승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서로 성리학의 道를 주고받았다고 보는 학설을 말한다. 주자는 도학의 계보를 정리하며 우선 주돈이를 종주로 삼고 이정이 주돈이에게서 도를 전수받았다고 주장했다. 주자 사후 얼마 되지 않아 주자는 송대 도학의 집대성자로 존숭받았으며, 그에 따라 주자가 확립한 도통 계보는 『송사』 「도학전」에 그대로 반영되었고, 이러한 관점은 조선의 유학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현대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런데 (이정이 10대 때 주돈이를 스승으로 섬겼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태극도설》이나 『통서』에서 보이는 주돈이의 주장이 이정의 것과는 결이 사뭇 달라 이정의 후학들부터 일찌감치 '이정이 정말로 주돈이를 사사한 게 맞는가?'하는 의문을 품어왔고, 현대의 학자들도 이에 대한 입장이 각각 다르다.
'이정이 주돈이에게 도를 전수 받았는가?'라는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 분명한 것 같지만, 사실 자세히 뜯어보면 매우 모호한 주장이다.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도의 전수'를 판단할 것인가? '실제 사제관계'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누구도 주정수수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고, '모든 측면에서의 학문 스타일'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미 말 자체부터 실현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부분적 차이의 존재만으로도 주정수수설을 긍정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이정이 짧게나마(杨柱才의 분석에 따르면 길어야 2년) 주돈이를 사사한 것은 사실이고, 이정과 주돈이의 학문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을 기존 연구를 통해 충분히 접했다면, 각 학자는 자신의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주정수수설을 긍정할 수도 있고 부정할 수도 있다. 이는 현대 학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이정 후학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따라서 이정 이후의 유학자 가운데 왕응신·육구연·전조망·주이존 등의 학자들이 주정수수설을 부인하는 것도 나름 타당하다고 할 수 있으며, 주자를 위시한 수많은 성리학자들이 주정수수설을 신봉한 것도 나름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주자 이후의 주정수수설 반대론자들은 보통 주자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접근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이는 객관적인 태도라 하기 어렵다.) 결국 주정수수설에 대한 오늘날의 바람직한 접근 방법은 '어떤 학자가 주정수수설을 긍정 혹은 부인할 때, 그의 근거는 무엇이고 그것이 얼마나 타당하며 그런 입장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것이지, '이 학자는 누구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옳다 혹은 틀렸다'는 아닐 것이다. 이 페이지에서는 주정수수설과 관련된 1차자료들을 정리하는 것을 우선 목표로 삼는다.

  • 참고문헌
1) 쓰치다 겐지로(土田健次郎), 『북송도학사』(성현창 역, 예문서원, 2006) 제2장 제2절 "주정수수설 재고"(164~199쪽)
2) 양주차이(杨柱才), 『道学宗主』(人民出版社, 2004) 附录一 「二程师事周敦颐考论」 (354~384쪽)

이정의 관련 언급

이정이 어렸을 때 주돈이에게 배운 것은 분명하지만, 사제관계가 성립한다고 해서 이정보다 앞선 도학의 종주로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단 『주돈이집』과 『이정집』에서의 주돈이에 대한 평가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昔受學於周茂叔, 每令尋顏子・仲尼樂處, 所樂何事.
  • 전에 주무숙에게 배울 때, 주무숙은 매번 안자와 공자께서 즐기신 경지와 즐기신 바가 어떤 일인지 찾아보게 하였다. [혹은 '주무숙은 매번 안자와 공자께서 즐기신 바가 어떤 것인지 찾게 하셨다. 즐기신 바는 어떤 일인가?']
2. 詩可以興. 某自再見茂叔後, 吟風弄月以歸, 有吾與點也之意.
  • 시는 사람을 흥기시킬 수 있다. 내가 주무숙을 두 번 본 뒤에 음풍농월하며 돌아가면서 공자께서 '나는 증점을 허여하노라'라고 말씀하셨던 뜻을 갖게 되었다.
3. 周茂叔窗前草不除去. 問之, 云: "與自家意思一般."
  • 주무숙은 창 앞의 풀을 뽑지 못하게 하였다.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였다: "내 마음과 똑같기 때문이네."
4. 周茂叔窮禪客.
  • 주무숙은 허접한(?) 선객이었다. [혹은 '주무숙은 선객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5. 獵, 自謂今無此好. 周茂叔曰: "何言之易也? 但此心潛隱未發. 一日萌動, 復如前矣." 後十二年, 因見, 果知未.
  • 내가 전에 사냥에 대해서 '요즘엔 이런 취미가 없습니다.'하고 스스로 말했는데, 주무숙이 말하길: "어찌 말을 쉽게 하는가? 그저 이 마음이 가라앉아 숨어 드러나지 않을 뿐이네. 어느 날 이 마음이 싹터 움직이게 되면 다시 전과 같아질걸세."라고 하였다. 12년 뒤에 이 말에 입각해 살펴보니, 과연 내 말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6. 先生爲學, 自十五六時, 聞汝南周茂叔論道, 遂厭科舉之業, 慨然有求道之志. 未知其要, 泛濫於諸家, 出入於老釋者幾十年, 返求諸六經而後得之.
  • 선생의 학문의 경우, 15-6세에 여남의 주무숙이 도를 논한다는 소문을 듣고 마침내 과거 공부에 염증내고 개연히 도를 추구하려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핵심을 알지 못해 제자백가를 떠돌고 도불에 출입하기를 십여 년간 하시고서, 돌아와 육경에서 도를 구한 이후에야 터득하셨다.
7. 異時, 伊川同朱公掞訪先君. 先君留之飮酒, 因以論道. 伊川指面前食卓曰: "此卓安在地上? 不知天地安在甚處?" 先君爲之極論天地萬物之理、以及六合之外. 伊川歎曰: "平生唯見周茂叔論至此. 然不及先生之有條理也."
  • 어느날 이천 선생께서 주공섬과 함께 先君을 방문하셨다. 先君께서 함께 자리하시고 술을 드셨는데, 인하여 도에 대해 논하였다. 이천 선생께서 앞의 식탁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이 식탁은 어떻게 땅 위에 서있는 것인가? 잘 모르겠지만, 천지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것인가?" 先君께서 답하기 위해 천지만물의 이치와 六合 바깥에 대해 지극히 논하셨다. 이천 선생께서 찬탄하시며 말씀하셨다: "평생 오직 주무숙의 논의만이 이정도의 수준에 이른 것을 보았네. 그러나 그대의 논의는 선생의 설에 조리가 있는 것만 못하네."


주돈이에 대한 이정의 언급은 크게 두 가지 기준으로 분석할 수 있다. 하나는 이정의 주돈이에 대한 태도 문제(제자의 스승에 대한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사상적 연속성 문제이다.
전자에 해당하는 것은 위의 인용문 전체에서 이정이 주돈이를 字로 부른다는 점으로, 제자가 스승을 어떻게 字로 호칭할 수 있냐는 것이다. 또한 4에서 이천이 주돈이를 '허접한 선객'으로 지칭한 것은 이천의 불교에 대한 강경 반대 입장에 비춰보았을 때 절대 스승으로 여긴 것이 아님을 추측할 수 있다.
후자에 해당하는 것 중에 주정수수를 긍정하는 입장에서는 1의 孔顔樂處, 2의 '吟風弄月'·'有吾與點也'의 기상, 3의 만물일체 사상, 5의 私欲설, 6의 道學에 대한 입장, 7의 존재론(우주론) 등을 근거로 삼고,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2·3의 도가적 처세관, 4의 선불교 비판 등을 근거로 삼는다.

주희의 옹호

주희는 “선생의 학문은 그 오묘함이 『태극도설』 한 권에 구비되어 있으며, 통서는 모두 이 태극도설에 온축되어 있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통서』의 서문에서는 “유독 하남의 정부자(程夫子)께서 일찍이 수학해서 공자와 맹자이래로 전해지지 않던 정통을 얻었으니 이로써 그 연원을 대략 알 수 있다.”고 하여 태극도설과 통서가 모두 주돈이의 저작이라고 간주하였으며, 주돈이와 이정의 사승관계를 인정하였다.

제기된 의문

역사적으로 주정수수를 의심한 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남송 왕응신(汪應辰) 『文定集』 권15 「與朱元晦」 9, 10.
  • 伊川于濓溪, 若止云少年嘗從學, 則無害矣. (이천 선생이 염계 선생에 대해 그저 '소년기에 일찍이 따라 배웠다'고만 말했다면 문제는 없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 濓溪先生髙明純正. 然謂二程受學, 恐未能盡. 范文正公一見横渠竒之, 授以『中庸』, 謂横渠學文正, 則不可也. (염계 선생께서는 髙明하고 純正하셨지만, 만약 '이정이 염계 선생께 수학했다'고 한다면 아마 실정을 온전히 표현한 것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범문정공[범중엄]이 횡거 선생을 한 번 보고 기특하게 여겨 『중용』을 주긴 했지만, '횡거 선생이 범문정공에게 배웠다'고 하면 안 됩니다.)


2. 남송 육구연(陸九淵) 『象山集』 권12 「與朱元晦」 1.
  • 梭山兄謂: "『太極圖説』與『通書』不類, 疑非周子所為. 不然則或是其學未成時所作; 不然則或傳他人之文, 後人不辨也. 葢『通書』「理性命」章言: "中焉止矣", "二氣五行, 化生萬物, 五殊二實, 二本則一." 曰一曰中, 即太極也, 未甞於其上加無極字; 「動静」章言: "五行隂陽, 隂陽太極", 亦無無極之文. 假令『太極圖説』是其所傳, 或其少時所作, 則作『通書』時不言無極, 葢已知其説之非矣." 此言殆未可忽也. (梭山형[육구소]이 말씀하시길: "『태극도설』 과 『통서』가 비슷하지 않으니, 아마 周子가 지은 게 아닌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혹 그의 학문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을 때 지은 것이거나, 아니면 혹 다른 사람의 글을 옮긴 건데 후인이 변별하지 못한 것일 것이다. 대개 『통서』의 「리성명」장에서 '中焉止矣', '二氣五行, 化生萬物, 五殊二實, 二本則一.'라고 하는데, 一·中이라고 한 것은 곧 태극이니 그 위에 '무극'을 덧붙인 적이 없고, 「動静」장에서는 '五行隂陽, 隂陽太極'이라고 하는데 역시 '무극'이라는 말이 없다. 가령 『태극도설』이 남의 말을 옮긴 것이거나 혹 그가 어렸을 때 지은 것이라면, 『通書』를 쓸 때 '무극'을 말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태극도설』이 틀렸음을 이미 알고서 그렇게 한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이 말을 결코 소홀히해서는 안 됩니다.)
  • 無極二字, 出於『老子』 「知此雄」章, 吾聖人之書所無有也. 『老子』首章言: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而卒同之, 此老氏之宗㫖也, "無極而太極"即是此㫖. 老氏學之不正, 見理不明, 所蔽在此. 兄於此學用力之深, 為日之乆, 曽此之不能辨, 何也? 『通書』"中焉止矣"之言, 與此之昭然不類, 而兄曾不之察, 何也? 『太極圖説』以無極二字冠首, 而『通書』終篇未甞一及無極字. 二程言論文字至多, 亦未甞一及無極字. 假令其初實有是圖, 觀其後來未甞一及無極字, 可見其道之進而不自以為是也. ('무극' 두 글자는 『노자』 「知其雄」 장에서 나오지 우리 유가 성인의 책에 있는 말이 아닙니다. 『노자』 수장에서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라 하고 끝내 같게 여기는데, 이것이 노자의 종지이고 "무극이태극"이 곧 이 뜻입니다. 노자는 배운 것이 바르지 않고 이치를 보는 것이 분명하지 않으니, 그의 병폐가 여기에 있는데, 존형께서는 이 학문[유학]에 대해 깊이 힘쓰시고 오래 시간을 보내셨으면서 일찍이 이를 변별해내지 못하신 것은 어째서입니까? 『통서』 「리성명」장의 "中焉止矣"라는 말은 이것이 분명한 것과 같지 않은데, 존형께서 일찍이 이를 살피지 못하신 것은 어째서입니까? 『태극도설』은 '무극' 두 글자를 첫머리에 두고 있지만 『통서』는 마지막 편까지 한 번도 '무극'을 언급하지 않고, 이정이 논의한 글이 지극히 많은데도 '무극'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가령 주돈이가 처음에 실제로 『태극도설』을 썼다 하더라도, 그가 나중에 한 번도 '무극'을 언급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의 학문이 발전하여 스스로 이를 옳게 여기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남송 장식(張栻) 『朱子全書』 권13 「太極圖說解」 《後記》
  • 某既爲此說, 嘗錄以寄廣漢張敬夫. 敬夫以書來曰: “二先生所與門人講論問答之言, 見於書者詳矣. 其於《西銘》, 蓋屢言之; 至此圖則未嘗一言及也. 謂其必有微意, 是則固然. 然所謂微意者, 果何謂耶?” (내[주희]가 이 해설을 쓰고서 일찍이 이를 적어 광한 장경부에게 보냈는데, 경부가 편지를 보내왔다: “[명도·이천] 두 선생께서 문인들과 강론하고 문답을 주고받으신 말씀들은 책에 보이는 것이 상세합니다. 두 선생께서 《서명》에 대해서는 누차 말씀하셨는데, 이 《태극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대는] ‘거기에 필시 숨겨진 의도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진실로 그렇겠지만, 이른바 ‘숨겨진 의도’라는 게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4. 청 주이존(朱彝尊) 『曝書亭集』 권58 「太極圖授受考」
  • 自漢以來, 諸儒言『易』, 莫有及《太極圖》者. 惟道家者流有上方大洞真元妙經, 著太極三五之說. (한나라 이후로 여러 유자가 『주역』에 대해 말했는데 《태극도》를 언급한 경우는 없다. 오직 도가에 『上方大洞真元妙經』이 太極·三五의 설을 말한 것이 전해 온다.)
  • 山陽度正作元公年表, 書: “慶厯六年, 知䖍州興國縣程公珦假倅南安, 因與先生為友, 令二子師之. 時明道年十五, 伊川年十四爾. 其後先生作《太極圖》, 獨手授之, 他莫得而聞焉". 攷是年, 元公以轉運使王逵薦移知郴縣, 自是而後二程子未聞與元公覿面. 然則從何地手授乎? (산양 도정이 원공[주돈이]의 연표를 지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력6년 知䖍州興國縣 정향이 남안 부지사도 겸임하고 있었는데, 인하여 선생과 벗이 되어 두 아들로 하여금 스승으로 모시게 하였다. 당시 명도 선생은 15살이었고 이천 선생은 14살이었다. 그 후에 선생이 《太極圖》를 지어 유독 직접 전해주셨는데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해를 헤아려보면, 원공은 전운사 왕규의 추천으로 침현으로 이직하셨으니, 이 이후에는 이정 선생이 원공을 면대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직접 전수하했겠는가?)
  • 伊川撰《明道行状》云: “先生為學自十五六時, 聞汝南周茂叔論道, 遂厭科舉之業, 慨然有求道之志. 未知其要, 泛濫于諸家, 出入于老釋者幾十年. 反求諸六經而後得之.” 繹其文, 若似乎未受業于元公者. 不然, 何以求道未知其要, 復出入于老釋也邪? (이천 선생이 《명도행장》을 지어 말씀하셨다: "선생의 학문의 경우, 15살 때 여남 주무숙이 도를 논함을 듣고 마침내 과거 공부에 염증내고 개연히 도를 추구할 뜻을 갖게 되셨다. 그러나 그 핵심을 알지 못하여 제자백가를 떠돌고 도불에 출입하기를 거의 십여 년 하시고서, 돌아와 육경에서 도를 찾은 이후에야 터득하셨다." 이 글을 풀어보면, 원공에게 학업을 전수받지 않은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도를 추구함에 그 핵심을 알지 못해 다시 도불에 출입하셨겠는가?)
  • 潘興嗣志元公墓亦不及二程子從游事. (반흥사가 원공의 묘에 쓴 묘지명에도 이정 선생이 종유한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 明道之卒, 其弟子朋友, 若范淳夫、朱公掞、邢和叔、游定夫, 叙其行事, 皆不言其以元公為師. 惟劉斯立為: “從周茂叔問學, 斯猶孔子問禮于老子, 問樂于萇弘, 問官于郯子云然.” 盖與受業有間矣. (명도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그의 제자와 벗, 예를 들면 범순부·주공섬·형화숙·유정부가 명도 선생의 행적을 서술할 때 모두 원공이 스승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직 유사립만이 "명도 선생께서 주무숙을 종유하여 학문을 물으신 것은 공자께서 노자에게 예를 물으시고, 장홍에게 음악을 물으시며, 담자에게 관제를 물은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대개 학업을 전수받은 것과는 차이가 있다.)
  • 呂與叔『東見錄』, 則有昔受學于周茂叔之語. 然弟子稱師, 無直呼其字者, 而『遺書』凡司馬君實、張子厚、邵堯夫, 皆目之曰先生, 惟元公直呼其字. 至以窮禪客目元公, 尤非弟子義所當出. (여여숙의 『동견록』에 '전에 주무숙에게 수학했다'라는 말이 있긴 하다. 그런데 제자가 스승을 일컬을 때 직접 그의 자를 부르지 않는데, 『유서』에서 사마광· 장재· 소옹에 대해서는 모두 '선생'이라고 부르면서 오직 원공만은 그의 자를 직접 부른다. '허접한 선객'으로 원공을 지목한 것은 더욱 제자가 의리상 꺼낼 말이 아니다.)
  • 且元公初名惇實, 後避英宗藩邸嫌名, 改惇頤. 夫既以學傳伊川矣, 不應下同其名, 而伊川亦不引避. 昔朱子表程正思墓稱: "其名下字同周程, 亟請其父而更焉." 孰謂二程子而智反出正思下哉? 此皆事之可疑者也. (또 원공의 첫 이름은 '돈실'이었는데 나중에 영종이 藩邸 생활할 때의 비슷한 이름[宗實]을 피휘하여 '돈이'로 고쳤다. 이미 이천 선생에게 학문을 전수했을 때에는 스승의 이름과 같게 하면 안 될 텐데, 이천은 그래도 피휘하지 않았다. 전에 주자가 정정사의 묘에 표창하며 "[정정사는] 그의 이름의 끝 글자가 周程과 같아 자주 부친에게 고쳐줄 것을 청하였다."고 하였다. 누가 '이정 선생의 앎이 정정사보다 못하다'고 하겠는가? 이것들이 모두 의심할 만한 일들이다.)


그 외 명나라의 풍방(豊坊)이나 청나라의 전조망(全祖望), 대진(戴震)은 역시 주정수수설을 부정하였다. 주정수수설을 부정하거나 『태극도설』과 『통서』을 별개의 텍스트로 간주하는 주장은 서로 연관을 맺고 있다. 왜냐하면 주정수수설을 부정하는 학자들이 대체로 『태극도설』과 『통서』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다는 점을 근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학자 견해

杨柱才의 분석에 따르면, 이정수수설을 긍정하는 사람으로는 송대의 주자·장식, 현대의 풍우란·주백곤·진래·성중영 등이 있고, 부정하는 사람은 송대의 여희철·여본중·왕응신 , 청대의 전조망 그리고 현대의 등광명이 있다고 한다.
등광명(邓广铭)이 「關於周敦頤的師承和傳授」라는 논문에서 “이정은 결코 理學을 주돈이로부터 배우지 않았다. 특히 그의 『태극도설』과 『통서』를 이정은 모두 접촉한 적도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에 반하여 주정수수의 가능성을 다른 방식으로 찾아보려는 학자도 있다. 예를 들어 정종모는 「정명도의 주역해석과 그 경학사적 의의」에서 “그(정명도)의 경학의 출발점은 『통서』에 드러난 주렴계의 관점과 유사하며,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주정수수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고 하였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