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스 (G.H.Jones, 趙元時)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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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 Choi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6월 21일 (금) 12:1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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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이력

존스(George H. Jones). 한국이름은 조원시(趙元時)다. 미 감리교회에서 아펜젤라와 스크랜턴 다음으로 임명받고 내한한 선교사로 아펜젤러가 1902년 해상사고로 일찍 순직하고 스크랜턴 선교사도 1907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일본으로 갔으므로 존스가 그들의 뒤를 이어 한국감리교회를 책임지고 이끌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21세가 되던 1888년 최연소 선교사로 조선에 온 그는 아펜셀러와 함께 원주, 충주, 청주, 대구 , 부산 등지를 전도여행하면서 당시 조선의 상황을 파악하였다.

인천내리교회 사역

처음 5년간 서울 배재학당의 교사로 일하면서 문서출판사업을 하다가 1892년부터 제물포지역 책임자로 부임하여 아펜젤러가 조선에 도착하여 서울로 가기전 제물포에 체류할 때 세웠던 웨슬리교회를 내리교회라 명명하고(1892년) 1893년 결혼한 벵겔 여선교사와 함께 11년 동안 선교와 봉사사업을 하였다.

1883년 한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후 제물포에는 미국과 중국의 배들이 중국과 일본을 거쳐 드나들며 무역과 교역의 중심이 되어갔다. 새로운 서양식 건물이 들어섰고 1890년경에는 1000여명 이상의 외국인들이 여기 상주하였으며 외국군인들도 자국인 보호를 위하여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제물포는 조선의 국제항구로 개화사상과 서양문물이 만나는 곳이기도 했다. 자연히 제물포의 조선사람들은 서양사람들과 그들의 문화에 대해 일찍부터 알게되었고 자신들의 가난과 어려움 그리고 미개한 문화를 느끼게 되었다.

이런가운데 1889년 조선의 첫 해외 유학생 유길준이 서유견문을 출판하면서 개화사상과 교육 그리고 부국강병을 주장하자 제물포의 뜻있는 젊은이들 역시 나라의 장래와 국가의 부흥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때 존스 목사가 이끈 내리교회가 제물포 사회에 필요하고 소중한 존재로 성장하게 되었다.

학교설립

존스는 현대식 기독교 교육을 통해 서양문화를 가르치는 것이 개화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1892년 부임하자마자 영화학교를 세웠으며 후에 부인 벵겔선교사는 여자영화학교를 세웠는데 제물포지역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이다. 존스의 교육에 대한 관심은 기독교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는 젊은이들을 위해 지역별로 ‘신학회’라는 것을 만들어 지역선교사들이 교육하도록 하였으며 이 조직이 후에 감리교신학대학의 전신인 협성신학교로 발전 존스가 초대 학장을 맡았다.

하와이 이민 계획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많은 서양사람들이 제물포를 다녀갔고 적지 않은 조선사람들이 선원으로 일본과 중국을 드나들고 있었다. 존스는 이곳에서 조선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잘 알게 되었다. 1902년 조선노동자들의 하와이 노동이민을 추진하던 미국대리공사 호레스 알렌은 하와이에 들려 마침 신병치료차 미국에 체류중이던 존스 목사를 만나 이 문제를 의논하였다.

존스는 조선 교인들의 비참한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기 때문에 조선은 가뭄과 전쟁 그리고 관아들의 횡포로 편할 날이 없지만 하와이는 열심히 일하면 누구나 잘 살수있는 자유의 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에게는 마음껏 신앙생활을 할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조선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조선의 젊은이들이 미국에서 새로운 세계를 보아야 한다. 이민은 새로운 기회다’라며 교인들에게 노동이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내리교회의 젊은 일꾼들을 이민자 모집책으로 투입하였다. 교인 장경화를 하와이사탕수수조합이 이민자모집을 위해 파견한 테슬러 이사를 돕는 총무로 임명하고 1893년 시카고세계박람회에 다녀온 서용규와 박영규가 이민업무를 돕도록 하였다.

차차 교인들이 마음을 열기 시작하면서 50여명의 내리교인들이 이민을 신청하였다.[1] 이들을 주축으로해서 부두노동자 20명, 배꾼들과 상인, 30명 그리고 군인, 머슴, 학생 및 선비 등 120여명으로 구성된 제1차 이민단이 1902년 11월 이민선 갤릭(S.S.Gaelic)호를 타고 첫 이민길에 오를 수 있었다. 이들은 1903년 1월 13일 하와이에 도착 첫 조선인 미국이민자가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하와이 이민자는 1905년 이민이 중단될 때까지 64회에 걸쳐 총 7천 4백 15명에 이르렀다(이민사박물관). 물론 초기에는 기독교신자들이 많았지만 점차로 비신자들이 대세를 이루었다. 호레스 알렌이 이민의 문을 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면 존스는 이민을 성사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와이 사역 지원

존스 목사는 이민자들의 신앙지도와 생활여건의 향상에도 관심을 가져 교회젊은이들이 이민단에 합류하여 각지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도록하는 한편 홍승하 전도사안정수 권사를 이들을 위한 선교사팀으로 조직하여 역사적인 미국파송을 하였다. 이들은 하와이에 한인교회를 세우고 이를 주축으로 이민자들이 흩어져 있는 각지역을 심방하며 신앙지도를 하였는데 이 교회가 하와이그리스도의교회로 후에 이승만을 중심으로한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협성신학교

강화도를 위시하여 서해연안과 제물포지역 중심으로 교회개척과 서울에서의 각종 출판사업 그리고 이민지원 등으로 바쁜 일정을 보내던 존스 선교사는 1903년 신병요양차 미국에 가서 3년을 체류한다. 이동안 선교부 총무자리와 신학교 교수제안 등이 있었으나 1905년 조선의 <신학당>의 당장으로 선출되자 미국에서의 제안들을 거절 하고 1906년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한국의 신학발전을 위해 심혈을 쏟았다. <성경학원>을 설립하여 성경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며 그가 1892년 창간한 <신학월보>를 속간하고 신학당을 협성신학교로 개편, 초대 교장이 되는가하면 감리교회 한국연회조직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그런 가운데 1909년 한국선교 25주년 기념대회에 참석차 미국에 갔던 그는 그곳에서 미감리교해외선교국 총무로 피선되어 다시는 조선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1911년부터 1919년까지 해외선교국 총무로 한국선교를 위해 많은 지원을 하였으며 뉴욕에서 조선에 관한 기사들을 많이 발표하였다.

존스 목사는 1919년 51세로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각자료

출처

  1. 출처: 그들은 왜 하와이로 갔는가 [1]

참고사이트

  • <늘푸른나무/한국개신교 초기인물 열전/2013년 10월 1일> 함성택의 <한국 개신교 초기 인물열전-외국 선교사 편(10)> [2]
  • 인물로 보는 인천사 [3]
  • 인천·강화지역 어머니(母)교회 역사적 만남. 기독교타임즈. 2006.05.11 [4]
  • 우각리와 인천 감리교 선교 [5]
  • 초기 한국선교의 아볼로, 그는 누구인가. 크리스천투데이. 2005.07.19 [6]
  • 강화디아스포라 [7]
  • 해외이민. 서울신문. 2006.05.18 [8]

기여

일자 역할 이름 전공
2019.6. 편집 최원재 교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