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강화화문석자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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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해설'''==
 
 
==='''세종실록'''===
 
<세종실록> 12년(1430) 2월 정유를 보면 명나라에 대한 세공품목이 적혀 있다. 다음과 같다.
 
 
“석류로는 만화석, 만화방석, 염석, 황화석, 해화석이 있으며 해동역사 교빙31에는 중종 26년 (1531년)에 공물 중 석류로 황제에게 용문염석 20매, 황화석20매, 만화방석20매, 잡채화석 20매, 이며 황후에게 황화석10매, 만화방석10매, 잡채화석 10매라 하였다.” <ref>한국의유산 이소정 기자 http://iyoc.kr/portal/interview.asp?idx=144</ref>
 
 
세종실록 제29권 7년 8월 22일
 
각 도에서 장흥고로 납부하는 돗자리가 5,148장인데 현재 634장이 있다. 1년 동안 필요한 돗자리가 2,215에 불과하니 경기도에서 바치는 480장은 없애기를 청한다.
 
 
==='''임원경제지'''===
 
<임원> 십육31 섬용31 권3 가거31구에 용수석 항에서 또 <금화경득기>의 글을 인용하여 용수석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일본 에도시대에도 우리나라 통신사가 가지고 간 대화석이 있었음을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임원십육지』에서는 「금화경독기」를 인용하여 예안 사람들이 오채용문석(五彩龍文席)을 잘 만들어 공물로 바쳤다고 한다. 그 밖에 『규합총서』에서는 강화의 교동을 화문석의 산지로 꼽고 있다. 화문석은 원래 부드럽고 잘 꺾이지 않는 용수초로 경상도지역에서 많이 제작했다고 하지만 현재는 보성 용문석만이 그 명맥을 잇고 있으며, 화문석으로 유명한 강화에서는 재료를 왕골을 사용하고 있다.
 
<ref> 진도문화원 http://www.jindoculture.or.kr/sub.html?table_id=data_folklore&pid=20&target=&keyword=&formtype=view&page=1&code=174
 
 
 
 
=='''시각자료'''==
 
 
==='''사진'''===
 
<gallery mode=packed-hover heights=160px>
 
 
File:강화전쟁박물관외부1.jpg | 박물관과 갑곶돈대 입구
 
File:강화전쟁박물관외부2.jpg | 박물관 건물
 
File:갑곶돈대3.jpg | 박물관 전경
 
 
</gallery>
 
 
==='''영상'''===
 
* 채널A 오늘의 영상_스마트리포터 동영상, 왕골 돗자리, 게시일: 2013년 3월 4일.
 
<html>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cIEMPX3WQCM"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html>
 
 
==='''가상현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6%B4%EC%9E%AC%EC%97%B0&ridx=2&tot=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화 광성보' 사진]</ref>===
 
-추후 드론과 파노라마사진을 넣을 곳입니다.
 
 
=='''출처'''==
 
 
<references/>
 
 
=='''기여'''==
 
 
{|class="wikitable"
 
!일자 || 역할|| 이름 || 전공
 
|-
 
| 2019년 6월 || 정리 및 편집 || [[손형남]] || 인문정보학
 
|-
 
|}
 

2019년 6월 25일 (화) 14:15 기준 최신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