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고부향교"의 두 판 사이의 차이

DH 교육용 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46번째 줄: 46번째 줄:
  
 
<includeonly>
 
<includeonly>
 +
<iframe width="800" height="400" src="http://digerati.aks.ac.kr/VR/xsl6/navermap.htm?lati=35.621955&longi=126.770854" frameborder="0" ></iframe>
 +
</includeonly>
 +
 
<googlemap width="800" height="400" lat="35.621955" lon="126.770854" zoom="13" icon="http://maps.google.com/mapfiles/marker.png">
 
<googlemap width="800" height="400" lat="35.621955" lon="126.770854" zoom="13" icon="http://maps.google.com/mapfiles/marker.png">
 
35.621955, 126.770854, [[고부향교]]
 
35.621955, 126.770854, [[고부향교]]

2018년 4월 5일 (목) 09:31 판

Project Home


개관

향교는 공자(孔子)와 여러 성현(聖賢)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고부향교는 처음 지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선조 30년(1597)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라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로는 대성전(大成殿), 명륜당(明倫堂), 동무(東廡)·서무(西廡), 직사(直舍),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홍살문(紅門) 등이며,전해오는 유물로는 제기(祭器), 제복(祭服), 서적들이 있다.

대성전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교육 공간인 명륜당보다 위쪽에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1]

동학농민운동의 최초의 전적지 고부향교

고부향교 대성전

1892년 전봉준이 접주로 있던 고부군에 조병갑이란 이가 군수로 영전하여 왔다.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물론 무고한 사람의 재물을 빼앗아 갈취하고 이에 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차없이 형별을 가하였다.[10]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은 농민들을 괴롭혔다. 전라도 고부는 본디 비옥한 땅으로 저수지가 하나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러나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억지로 저수지를 짓게 한 다음 물값을 받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는 음란한 죄, 화목하지 못한 죄 등 여러 죄명을 씌어 벌금을 받아 냈고, 부친의 비석을 만든다는 핑계로 돈을 걷기도 하였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 고부군수 조병갑은 아버지의 선정비 또는 신도비를 세우는데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임지인 고부군 군민들에게 세금액수를 인상하여 거둬들였다. 조병갑은 자신의 아버지 비각을 세우기 위해 농민들로부터 천 냥의 돈을 거둬들이기도 했고, 또 주민들에게 갖가지 죄를 뒤집어 씌워 2만 냥이라는 엄청난 돈을 벌금으로 긁어냈다. 게다가 대동미를 대신하여 돈을 거두고,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만든답시고 쌀 700석을 착복하기도 했다.[10] 한편 조병갑은 중앙 조정에도 뇌물을 바쳤다. 중앙 조정에 바치는 뇌물은 의례적인 것으로 뇌물을 바치지 못하는 군수나 현감, 부사, 관찰사는 얼마 못가 파직되거나, 정부에 막대한 돈을 헌납하는 자를 군수나 현감, 부사, 감사로 임명하면 자리를 내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세금이 인상되자 주민들의 불만은 가속화되었다. 여기에 조병갑의 학정이 심해지자 고부 주민들을 대신하여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관청에 면세를 신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고, 이로 인해 심하게 매를 맞고는 귀가한지 한 달 만에 장독으로 죽게 된다.

학정에 시달리다 못한 고부 주민들은 1893년 11월과 12월 두 번에 걸쳐 군수에게 감세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조병갑은 진정서를 제출하려고 온 농민 대표를 붙잡아 하옥시키고 고문을 가하는 것으로 탄원서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10] 이어 전라북도관찰사에게도 탄원서를 보냈지만 응답이 없었다. 탄원과 진정으로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 농민들은 결국 힘으로 군수를 내쫓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10] 이어 일부 농민과 동학도들은 무기와 화약을 준비한다.

이에 분격한 농민은 한문교사 전봉준을 선두로 1893년(고종 30) 음력 12월과 이듬해 음력 1월, 2회에 걸쳐 군수에게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체포 또는 축출되었다. 이후 농민의 일부가 동학도들과 함께 한성으로 입경하여 탐관오리 처벌과 부패 정치인 파직, 민생 구휼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1893년 12월부터 1894년 1월에 올린 동학도 및 농민군의 상소 중 최시형의 탄핵 상소에 의해 경상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 영장(營將) 윤영기(尹泳璣) 등이 파직되긴 했으나 이후 고관들은 농민들의 상소문을 검열하였고, 사태는 나아지진 않았다. 도리어 조병갑은 전봉준과 그의 일가를 잡아들이고, 전봉준의 부친에게 형문을 가해 죽게 한다. [2]

1894년 3월 21일(음력 2월 15일) 전봉준은 거병을 선언하고 전봉준은 선두로 나서 수백 명의 동학교도를 이끌고 만석보를 파괴하고 고부 관아를 공격하게 되며, 이를 고부 봉기, 제1차 봉기라 한다. 관군과 농민군은 고부관아, 향교 일대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며 예봉에 놀란 군수 조병갑은 줄행랑을 놓았고, 전봉준은 관아의 무기를 탈취하고 세금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며, 부패한 관리들을 붙잡았다. 수탈에 앞장섰던 아전들을 처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탈취하여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편 감정이 격해 죄없는 관리들도 관리라는 이유로 처벌하려는 동학농민군을 만류하여 진정시키기도 했다. 이 보고를 받은 조선 정부에서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후임 군수로 박원명을 내려보냈다. 그러나 농민들은 사후의 계획을 세워놓지 않아 곧 신임 군수 박원명의 온건한 무마책에 해산하였다. [3]

위치


사진

관련 사이트

참고문헌

출처

  1.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 https://ko.wikipedia.org/wiki/%EB%8F%99%ED%95%99_%EB%86%8D%EB%AF%BC_%EC%9A%B4%EB%8F%99 동학 농민 운동
  3. https://ko.wikipedia.org/wiki/%EC%A0%84%EB%B4%89%EC%A4%80 전봉준

답사 후기

  • 답사 중/후에 느낀 것. 보완되어야 할 부분이 있으면 적어주세요!

기여

역할 이름 전공
정리 전인혁 인문정보학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