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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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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에 역사의 중심에서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꿈꾸던 성리학적 이상 세계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끝내는 정적의 칼에 단죄되어 조선 왕조의 끝자락에 가서야 겨우 신원 되는 극단적인 삶을 살았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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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삶 속에서 다져진 민본사상===  
[[경상도]] [[영주시|순안현]](지금의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주시]])출생인 그는 과거 급제 후 [[성균관]] 등에 있으면서 [[성리학]]을 장려하였고, [[외교]]적으로는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명나라]]와의 외교론을 주장하다 여러 번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였으며 [[1383년]] [[조선 태조|이성계]]를 만나 [[정사]]를 논하다가 [[역성혁명]]론자가 되었다. 이후 [[정몽주]], [[조선 태조|이성계]] 등과 함께 [[고려 우왕|우왕]]과 [[고려 창왕|창왕]]을 폐위시키고 [[고려 공양왕|공양왕]]을 추대했다가 [[1392년]] [[조선]] 건국을 주도하여 [[개국공신]] 1등관에 [[녹훈]]되었다. 관직은 [[판삼사사]]를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영의정부사]]에 추증되었으며, '봉화백'(奉化伯)에 봉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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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집안은 본래 봉화 지역의 향리였다. 고려 시대까지 향리는 우리가 아는 조선조의 향리와는 그 격이 달라, 지방의 토착세력을 말한다. 정도전 집안은 경상도 봉화지역의 토착세력인 셈이다. 부친 정운경의 뒤를 이어 과거에 급제한 정도전은 22살 때 충주 사록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또한 정도전은 공민왕의 유학 육성 사업에 참여해 성균관 교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몽주∙이숭인 등도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정도전에게 시련의 시작이었다.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이자 최고 권력자였던 그는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놓았으며, [[한성부|한양]] 시내의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제1차 요동 정벌]]([[1388년]] 음력 6월)과 [[제2차 요동 정벌]]([[1392년]])에 반대하였으나 [[요동]]정벌할 계획을 세워 [[명나라]]와 외교 마찰을 빚었고, [[공신]]과 왕자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사병]]을 혁파하려다가 갈등한다. 그 뒤 [[신덕왕후 강씨]] 소생 [[이방석|방석]] 등을 [[세자]]로 추대하였으며 [[요동 정벌]]을 계획하여 [[명나라]] [[명 태조|태조 주원장]]과 갈등하던 중, [[조선 태종|이방원]]이 [[정변]]을 일으킨 뒤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 때 [[조선 태종|이방원]]의 군사들에게 피살되었다. [[성리학]] 이념을 보급하였으며, 그는 [[안향]]-[[백이정]]-[[이제현]]의 학통을 계승한 [[목은 이색]]의 문하생이자 [[정몽주]], [[권근]]의 동문으로, 나중에 [[정몽주]], [[길재]]의 문하생들에 의해 폄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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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의 뒤를 이어 우왕이 즉위하였는데, 우왕이 재위하던 때는 정도전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이인임 등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하였고, 결국 원나라 사신의 마중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정도전은 오늘날의 전라도 나주에 속해 있는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정도전은 그곳에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목격하고는 위민의식(爲民意識)을 키웠다.
  
[[조선]]사회에 [[성리학]]을 정착, 국교화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신덕왕후 강씨]]와 함께 [[세자]] 책봉에 공을 들였던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조정에서 철저히 배격되었다. [[조선 태종|태종]]은 그를 역적으로 만든 뒤 [[정몽주]]를 추상하였으며, 이후 그는 [[포은 정몽주]]와 달리 역적으로 매도되어 오다가 [[대한제국 고종|고종]] 때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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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이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들녘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그 농부는 정도전을 보고 당시 관리들이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안락과 근심, 시정의 득실, 풍속의 좋고 나쁨’에 뜻을 두지 않으면서 헛되이 녹봉만 축내고 있다며 질책하였다. 촌로의 이러한 발언은 정도전에게 백성을 위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되기 충분하였을 것이다. 결국 그가 제시했던 민본사상은 허울 좋은 이름뿐이 아니었다. 실제 백성의 삶을 목격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진정성이 담보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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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료 생활과 정치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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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을 읽고 장자방을 자처하다===
====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초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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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 정치적 시련에 대장부의 거대한 야망이 꺾일 만도 하지만, 오히려 정도전은 더욱 강해졌다. 관직에 다시 등용된 정도전은 전의부령, 성균좨주 등의 관직을 지내다가, 이성계의 추천으로, 성균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성균대사성은 성균관의 책임자를 말하는데, 당시 학계를 주도하는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공민왕]] 때인 [[1360년]]([[공민왕]] 9년) [[고려의 과거 제도|성균시]](成均試)에 급제한 데 이어 2년 뒤[[1362년]] 문과 [[동진사]]로 급제하여 [[1363년]] [[관직]]에 나갔다. 그해 [[충주]][[사록]](忠州司錄)을 거쳐 [[전교시]][[주부]](典敎寺主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냈다. 그 뒤 성균관에서 정몽주와 함께 [[명륜당]]에서 [[유학]]을 강론하며 [[유생]]들을 길러냈고, [[성균관박사]], [[태상박사]]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출세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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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벼슬살이는 순탄하지 않았다. [[공민왕]]이 [[신돈]]을 기용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해서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아버지 [[정운경]]와 어머니 [[단양 우씨]]가 1월과 12월에 연이어 작고하여 [[영주]]에서 3년간 여묘살이를 하며 학문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당시 관료들과 지식인들은 백일탈상이 일반적인 관행이었으나, 그는 [[주자가례]]에 따라 3년상을 봉행 실천하였다. [[1369년]] 가을, 부모의 3년상을 마치고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왔고 이듬해 12월, 관직에 복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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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은 그보다 앞선 1384년(우왕 10년)에 이루어졌다.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정도전이 여진족 호발도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함경도에 있던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가면서부터였다. 이성계의 군대를 본 정도전은, 이성계가 자신의 포부를 실현해줄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리고는 군영 앞에 서 있던 노송에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겨 놓았다.
  
==== [[신돈]]의 죽음과 [[성균관]] 강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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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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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산 몇만 겹 속에 자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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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있다가 다른 해에 만나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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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굽어보며 묵은 자취를 남겼구나
  
[[1370년]] [[성균관]]을 중건하고 그해 스승 [[이색|목은 이색]]이 [[대사성]]이 되자, 그는 스승 [[이색]]과 [[벗]]들의 천거로 [[성균관박사]]가 되었다. [[성균관]]의 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포은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하였다. 다시 70년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禮曹正郞兼成均太常博士)가 되어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ref name="소비자" /> 또한 [[권문세족]]을 경계하고 새로운 인재를 찾으려던 [[시중]] [[신돈]]에 의해 신진 사류가 중용되면서 그 역시 요직에 앉았던 연유로 [[신돈]]의 일파로 몰리기도 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신돈]]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1371년]] [[태상박사]]에 임명되고, 다시 [[예의]]정랑이 되어 [[태상박사]]를 겸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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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대해 조선 초에 만들어진 [용비어천가]에서는 정도전이 이미 천명의 소재를 알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정도전은 평소 취중에 “한나라 고조가 장자방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이용하였다.”라고 말하고는 하였다. 한고조를 이성계에 대비한 것인데, 그렇다면 결국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했다는 말이 된다. 한 대장부의 거대한 야망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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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이 제거된 뒤에도 정도전은 기용됐으나 [[1374년]]([[공민왕]] 24) [[홍륜]] 등에 [[공민왕]]이 살해되면서 [[친명파]]에 속했던 정도전은 다시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그때 정국은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가 대결하고 있었다.<ref name="소비자" /> 이때 그는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강학하면서 한편으로는 [[정몽주]] 등과 함께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돈독히 할 것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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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를 설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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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면서 정도전의 야망은 급물살을 탔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때 고려 조정에는 한편에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세력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정도전, 조준과 같이 급진적 개혁세력이 있었다. 이성계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그는 이미 급진적 개혁세력의 맹주가 되어 있었다.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 의해 선지교(후일의 선죽교)에서 피살되면서 그를 추종하는 세력은 궤멸하였다. 이제는 그야말로 이성계 천하가 된 것이었다.
  
이후 그는 [[공민왕]]의 부패와 타락을 옹호하거나 묵인하는 [[권문세족]]이 왕의 눈과 귀를 가린다며 비판을 가하였다. [[1374년]] 공민왕이 [[홍륜]] 등에 의해 암살당하자 그는 이 사실을 [[명나라]]에 고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이인임]] 등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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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가 피살된 후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세력의 움직임이 가속화되어 드디어 1392년, 5백 년 고려 왕조는 역사 속에서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조선 왕조가 들어섰다. 조선이 개국된 후 정도전의 활약은 눈부셨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과정을 비롯해 현재의 경복궁 및 도성 자리를 정하였고, 수도 건설 공사의 총책임자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수도 건설이 마무리되면서는 경복궁을 비롯한 성문의 이름과 한성부의 5부 52방 이름도 지었다. 서울을 구성하던 각종 상징물에 의미를 부여하였는데, 대부분 유교의 덕목이나 가치가 담긴 표현이었다. 서울이 수도로서의 의미만이 아닌 유교적 이상을 담은 곳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 관직 생활과 [[권문세족]]과의 갈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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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한 [조선경국전]을 지어 태조에게 올렸다. 이 책은 조선의 통치 규범을 제시한 것으로 후일 조선의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이 나오게 되는 출발이었다. 이 책에서 정도전은 자신이 꿈꾸던 요순시대를 건설하기 위한 거대한 정치 구상을 제시하였다. 요순시대처럼 임금과 신하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왕도정치를 전면적으로 표방한 것이었다.
===== [[친원파]], [[권문세족]]과의 갈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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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그는 부와 권력을 독점한 [[권문세족]]들로부터 전답 등의 농토는 실제로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부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권문세족]]들의 분노를 샀다. 또한 그는 [[사원경제]]의 팽창과 문란이 정치 경제 사회의 폐해가 극심함으로 [[불교]]의 배척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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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5년]](우왕 1년) [[성균관]]사예·[[지제교]]가 되었다. 동년 [[원나라]] 사신이 왔을 때 원나라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문제로 조정에서는 신흥사대부와 권신들 간에 대립이 일어났다. [[이인임]]과 [[지윤]] 등은 사신을 맞아들이자고 한 반면, 정도전을 비롯한 신흥사대부([[신진사대부]])들은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인임 등은 그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북원]] 사신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이인임은 정도전을 [[영접사]]로 임명해 보내려고 했다.<ref name="소비자" /> 그러나 정도전은 사신영접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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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 정벌 주장과 표전문 사건===
  
이런 와중에 북원 사신을 맞이할 [[영접사]]로 지목된 인물은 정도전이었다.<ref name="deoksa67">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8) 67</ref> 이에 정도전은 “사신의 머리를 베든지, 그렇지 않으면 묶어서 [[명나라]]로 보내버리겠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인임·[[경복흥]](慶復興) 등이 원나라와의 이중 통교를 주장하고 원나라 사신이 [[명나라]]를 치기 위한 합동작전을 고려 조정에 제의해 오자, 정도전은 이를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이인임]]·[[경부흥]] 등의 [[권신]]의 [[진노]]를 사 [[나주]]의 속현인 [[회진현]](會津縣)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그는 [[성리학]] 관련 서적을 연구하며 동리 청년자제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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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의 기반이 된 [조선경국전]은 정도전이 작성하였다.
  
귀양길에 곤장까지 맞을 뻔하였으나 때마침 일어난 [[석기의 난]] 때문에 경황이 없어 [[장형]]은 당하지 않았다.<ref name="deoksa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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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조선 개국 후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며 권력의 핵심에 있었으나,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가 주창한 요동정벌 문제는 조선과 명나라의 주요한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당시 명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표방하였다. 다만, 여진과 제휴한다든지, 요동에 진출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특히 요동 진출 문제와 관련해서 정도전은 명나라에서 보면 요주의 인물이었다. 정도전은 태조에게 외이(外夷 : 중화질서 속에서 중국 이외의 민족을 지칭하는 개념)로서 중원에 들어가 왕이 되었던 사례가 있음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는 중국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도 중원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표현이었다.
  
===== 유배와 학문 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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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1394년(태조 3년)에 이른바 ‘표전문사건’이 일어났다. 표전문이란 표문과 전문의 합칭으로, 조선이 중국의 황제와 황태자에게 보내는 공식 문서를 말한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조선에서 파견된 유구와 정신의가 가지고 간 표문을 문제 삼았다. 유구 등은 결국 명나라에 구속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문제가 된 표문의 작성자로 정도전이 지목되었다. 명나라에서는 당장 정도전의 소환을 요구하였다. 명나라의 요구를 둘러싸고 조선 조정에서 설왕설래하였다. 논의 결과 표문을 작성한 사람은 정총이고, 전문을 작성한 사람은 김약항이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사지로 정도전을 보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정총은 병을 이유로 가지 않고 김약항만이 명나라로 가게 되었다.
유배살이 중 그는 온갖 인신비방에 시달렸다. 그가 낙마하자 사방에서 그에 대한 비방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그런 비방은 소인배들의 짓이라며 씁슬하게 넘겼다. 그러나 그를 원망하는 아내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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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당신은 평소 부지런히 독서에만 몰두하여 아침에 밥이 끓든 죽이 끓든 간섭하지 않아 집안에는 한 섬의 쌀도 없었습니다. 방에 가득한 아이들은 끼니 때마다 배고프다고 울고 날이 찰 때는 춥다고 울부짖었습니다. 제가 살림을 맡아 그때그때 수단을 내어 꾸려가면서도 당신이 열심히 공부하시니 언젠가는 입신양명하여 집안의 영광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영광은커녕 국법에 저촉되어 이름을 더럽히고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 가서 가문이 망하였습니다. 이에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현인, 군자의 삶이란 진실로 이런 것입니까?<ref name="deoksa68">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8) 68</ref>|아내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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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의 요구가 거세었지만, 정도전이 가지 않은 것은 아마도 정치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 같다. 당시 정치를 주도하던 조정 관리들이 대부분 정도전 계열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후일의 태종 계열인 하륜만이 정도전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었다. 조정의 결정에 따라 김약항이 파견되었으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 명나라에서 다시 정도전을 압송하도록 요구하였다. 이때도 역시 정도전은 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국내에 있으면서 진법(陣法) 훈련을 강화하며 요동정벌을 위한 제반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병 혁파를 둘러싸고 왕자 및 공신들과 갈등을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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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당신의 말이 모두 맞소. 예전의 내 친구들은 형제들보다 정이 더 깊었는데 내가 이 지경이 되자 뜬구름처럼 흩어졌소. 이는 그들이 원래 세로써 맺어졌지 은으로 맺어지지 않은 까닭이기에 나는 원망하지도 않소. 하지만 부부는 한번 맺어지면 죽을 때까지 고칠 수 없는 것이니 당신이 나를 질책하는 것은 나를 사랑해서이지 미워해서는 아닐 것으로 나는 믿소. 또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으니 당신이 집을 근심하고 내가 나라를 걱정하는 것이 무엇이 다르겠소? 나는 오직 나의 뜻에 충실할 뿐이오. [[성패]]와 [[영욕]]과 [[득실]]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오. 내가 무엇을 근심하겠소?<ref>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8) 68~69</ref>|정도전의 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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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현실의 갈등, 정도전과 이방원===
  
정도전은 아내를 원망하지 않았다. 정도전은 아내에게 [[대의]]에 대해 말하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의 뜻대로 나아가면 하늘이 돌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버린 친구들에 대한 [[애증]]은 이미 정리된 감정이었다.<ref name="deoksa69">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8) 69</ref> 배소에 있는 그에게 꾸준히 안부를 묻고 편지서신을 보내며 위로하는 친구는 [[정몽주]] 등 소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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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개국 후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에 관여하였다. 태조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는 신의왕후 한씨이고, 둘째가 신덕왕후 강씨였다. 신의왕후 소생 아들로는 방우∙방과(정종)∙방의∙방간∙방원(태종)∙방연 등이 있었다. 이들은 신덕왕후 소생의 아들보다도 아버지 태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공도 많았다. 그런데 정도전이 이를 다 무시하고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하였던 것이었다.
  
===== 역성 혁명 준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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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를 선지교에서 살해함으로써 조선 건국이 가속화되는 계기를 만들었던 이방원 등 첫째 부인 한씨 소생들의 불만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더구나 사병 혁파 문제로 서로 갈등을 보이던 중 1398년(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였고, 정도전은 이방원이 이끄는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도전은 조선조 내내 신원 되지 않다가 고종 때 관직이 회복되었다.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건국 초에 설계 등에 참여한 정도전의 공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 석방과 교육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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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왕자의 난 발생 원인은 개인적인 불만이 표출된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방원과 정도전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이상의 차이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국가체제를 어떻게 편제하고 운영할 것인가의 차이인 것이다. 정도전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꾀하는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표방하였다면, 이방원은 그와는 달리 강력한 왕권에 바탕을 둔왕조국가를 지향했기 때문이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에서 현실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사림들이 집권하게 되면서 정도전이 꿈꾸던 이상 세계가 구현되어 갔으니, 정도전의 꿈은 꿈에서 그친 것이 아니리라….
[[1377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4년간 선향 [[영주]]와 [[안동]], [[제천]], [[원주]] 등을 오가며 유랑하며 지냈다. 그 뒤 1381년 가을 거주가 완화되자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왔고 1382년 초려(草廬)를 지고 '[[삼봉재]]'(三峯齋)라 이름하고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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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권문세족]]들은 정도전을 위험 인물로 보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ref name="deoksa70">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8) 70</ref> 전국에서 많은 재생들이 운집하여 교육의 즐거움을 향유하였으나 그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이곳 출신 재상이 [[삼봉재]]를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생들을 이끌고 [[부평부사]] [[정의]]에 의탁하여 [[부평부]] 남촌(南村)으로 이사하여 후생 교육사업을 재기 하였으나 이곳 역시 재상 왕모(王某)가 별장을 짓는다고 [[학숙]]을 폐쇄하였다. 계속되는 멸시와 박해로 다시 [[경기도]] [[김포]]로 옮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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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와 [[유랑 살이]]를 통하여 향민(鄕民)과 사우(士友)에게 걸식하기도 하고 스스로 밭갈이도 했다. 이때 그는 가난과 기근으로 죽어가는 백성들과 그들을 수탈하는 [[권문세족]]의 횡포와 [[사원경제]]의 팽창으로 국가경영의 존폐위기 상황을 직면하고 일대의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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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태조|이성계]]와의 만남([[138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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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3년]] 가을, 정도전은 드디어 비장의 결심을 하고 [[함길도]] [[함흥]]에 있는 [[동북면도지휘사]](都指揮使) [[조선 태조|이성계]]를 찾아갔다. 한때 이성계와 함께 [[왜구]]와 [[여진족]]을 토벌하는데 함께 출정했던 [[정몽주]]로부터 그의 명성을 듣고, 외적의 침략을 물리쳐 고려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른 [[이성계]]를 만나기 위해 함흥으로 직접 찾아간 것이다. 그는 [[이성계]]와의 오랜 대화로 세상사를 논하다가 그와 인연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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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부패한 관료로 인한 피폐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직 혁명 밖에 대안이 없다고 결론 짓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성계]]의 군사력이 절실하였던 것이다. 당시 조우에서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정예 군대와 일사불란한 지휘통솔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이성계]] 또한 정도전의 심오한 학문과 원대한 국가경영에 대한 경술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동북면 군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군령을 엄하게 지킬 뿐 아니라 무기들 또한 잘 정비되어 있으며 훈련에도 열심히 임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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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이성계]]를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이 정도의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성공시키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넌지시 떠보았다.<ref>박기현, 《조선의 킹메이커》 역사의 아침, 2008, p.28</ref> 평생 전쟁터를 누벼 온 [[이성계]]가 정도전의 말뜻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으나, 무슨 뜻이냐며 모르겠다는 듯이 반문하였다. 이에 정도전은 동남방의 [[왜구]]를 소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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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 정치와 정변 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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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계]]와 [[역성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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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그날 밤 [[이성계]]와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정도전은 군영 앞에 서 있는 오래된 [[소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그 위에 이성계를 위해 시 한 수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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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poem>蒼茫歲月一株松 / 아득한 세월 속에 한 그루 소나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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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長靑山幾萬重 / 청산에서 자람은 어찌 만 배나 중하지 않으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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好在他年相見否 / 좋았던 시절에 서로 만나지 못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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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間俯仰便陳蹤 / 세상을 굽어보고 우러러보아도 묵은 흔적뿐이구나.</poem>|정도전|《제함영송수》(題咸營松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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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에서 정도전은 [[이성계]]를 늙은 소나무에 비유하고 있는데, 앞으로 때가 되면 [[이성계]]는 천명(天命)에 따라 세상을 구원하러 나서야 하며, 자신과 손잡고 큰일을 하여 위대한 역사적 과업을 남기게 될 것이라는 자신의 속마음을 은근히 드러내었다. 이성계는 개혁을 주장하는 정도전 등에게 협력하기로 하고 지원을 약속했다. 그의 인물됨됨이에 매료된 정도전은 그의 막료가 되었고 이후 역성혁명까지도 논의하게 되었으며 이 일을 계기로 정도전은 [[이성계]]의 참모로서 큰 야망을 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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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4년]] 가을 전교시부령(典校侍副令)으로 복직과 동시에 성절사(聖節使) [[정몽주|포은 정몽주]]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양국간 첨예한 외교적 갈등을 해소하고, 우왕의 승습(承襲)과 공민왕의 [[시호]]를 받아 귀국하였다. [[1385년]] 귀국 후 [[성균관]] [[제주]](祭酒)와 [[지제교]]를 거쳐 86년 외보를 요청 남양부사(南陽府使)로 도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부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그 뒤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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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화도 회군]]과 권력 장악([[1388년]] 음력 6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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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위화도 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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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년]] 음력 6월 [[제1차 요동 정벌]]에 출정한 이성계 등이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게 되자 [[밀직부사]]로 승진하여 [[조준]], [[남은]], 윤소종 등과 함께 [[이성계]]의 우익이 되어 전제(田制) 개혁에 착수, [[조세]] 제도와 [[토지 제도]]를 개혁하였다. 이는 개인이 함부로 토지를 사유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권문세족들이 보유한 토지를 몰수하고 새 정권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자금 확보는 물론,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그는 전국의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킨 뒤 인구수에 따라 토지를 분배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스승인 이색과 친구인 [[정몽주]] 등과 의견이 달라지면서 서서히 멀리하게 되었다. 이어 [[우왕]]의 장인인 [[최영]], [[이인임]], [[염흥방]], [[조민수]] 등 구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아 나갔다. 같은 해, [[우왕]]을 내쫓고, 이색의 주장으로 [[고려 창왕|창왕]]을 세웠고, 이때 [[우왕]]의 측근인 [[최영]] 일파를 제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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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변과 [[고려 공양왕|공양왕]] 추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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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윤이 이초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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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9년]] 음력 11월 [[여주]]로 유배된 폐주 우왕이 자신을 찾아온 [[김저]](金佇)와 [[정득후]](鄭得厚)에게 보검을 주며 [[곽충보]](郭忠輔)와 함께 [[이성계]]를 제거하라는 밀명을 내린 음모사실이 곽충보의 고변으로 발각되었다. 이에 이성계는 [[우왕]]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강화도]]로 유배시켜 버렸다. 정도전은 [[이성계]], [[조준]], [[남은]] 등과 함께 뜻을 같이해 [[창왕]]을 [[신돈]]의 자손이라는 구실로 폐위시키고, 폐가입진이라는 명분을 구실로 [[고려 공양왕|공양왕]]을 추대하고 공신이 되었으며 최영 등을 죽이고 실권을 잡았다. 이때 그는 [[우왕]]과 [[창왕]] 부자가 왕씨가 아니라는 주장을 했으나 이에 대해 조선의 양식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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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날짜=2007-11-11|신료들과 선비들은 이를 조선왕조의 조작으로 보았고 현대 학계에서도 조선왕조의 조작으로 보고 있다.}} [[이성계]], [[조준]] 등과 함께 [[공양왕]]을 추대한 공으로 그는 봉화현 충의군(忠義君)에 봉군된 뒤 수충논도좌명공신(輸忠論道佐命功臣)에 책록되고 공신전 100결과 노비 10명을 하사받았다. 이후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다. 1390년(공양왕 2년) 경연지사(經延知事)에 올랐다. 그 해 [[1390년]] [[이성계]]가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명나라]] [[주원장]]에게 밀고하는 [[윤이 이초 사건]]이 발생하자,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윤이]]·[[이초]]의 주장이 무고임을 밝히고 돌아왔다. 곧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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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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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위화도 회군|선죽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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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1년]]에 [[이성계]]는 [[삼군도총제부]]를 만들고 군대를 장악하였고, 정도전은 [[삼군도총제부]] [[우군도총제]]의 자리를 맡았다.<ref name="동양철학사">{{서적 인용|저자=강성률|제목=청소년을 위한 동양철학사|출판사=평단문화사|연도=2009-03-11|쪽=371}}</ref> 이어 [[불교]] 배척의 기치를 들고 척불(斥佛) 상소를 올려 권문세족들을 불교도로 몰아 제거한 뒤,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외세를 빌어 국내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윤이, 이초 사건의 배후인 [[이색]]과 [[우현보]](禹玄寶) 등을 신우(辛禑)·신창(辛昌<ref>우왕과 창왕</ref>) 옹립의 죄를 물어 처단할 것을 상소했다. 그러나 정도전과 신진사대부 역시 창왕 등의 옹립에 가담했었고, 이를 부담스럽게 여긴 공양왕은 처음에는 거절하였다. 정도전은 거듭 [[이색]], [[우현보]]를 처단할 것을 극력 피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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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9월 [[평양]]부윤에 임명되었으나 [[정몽주]] 등은 그를 제거할 목적으로 [[사간원]]과 [[사헌부]]의 간관들을 사주하여 그가 "가풍(家風)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명함에도 큰 벼슬을 받아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다"라고 탄핵케 하여 봉화로 유배당하였다. 정몽주가 정도전을 탄핵한 실제 목적은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ref name="park34">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34페이지</ref> 그러나 정몽주의 탄핵 내용을 접한 그는 정몽주에게 극심한 반감을 품게 된다. 이어 [[나주]]로 배소가 옮겨졌으며 두 아들은 삭탈관직당해 평민이 되었다. 이때 정몽주는 [[김진양]]을 사주하여 사죄로 다스릴 것을 상소하여 그를 처형하라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공양왕]]이 이를 듣지 않았다. 그가 유배되자 정몽주는 그를 처형해야 된다고 강력 상소하였지만 [[공양왕]]의 반대로 [[1392년]](공양왕 4년) 봄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 영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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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3월]] 초 [[이성계]]가 [[해주]]의 사냥터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자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려는 정몽주 등에 의해 "천지(賤地)에서 기신(起身)하여 당사(堂司)의 자리를 도둑질했고, 천근(賤根)을 감추기 위해 본주(本主)를 제거하려고 모함했다"라는 탄핵을 받고 보주(甫州)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해 4월10일, [[이방원]], [[조영규]] 등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격살함으로써, 고려 왕조를 지지하는 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와해되었다. 그 뒤 6월 10일 유배에서 풀려나 개경으로 소환되어 복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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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성혁명과 조선 건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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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건국([[139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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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정도전은 비로소 소환되어 정치 일선에 나서서 새왕조 창업을 위한 정지 작업을 단행하여 [[7월 17일]] [[공양왕]]의 선양을 이끌어 내어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새 왕조 조선을 건국하였다.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정도전은 왕명을 받아 새로운 왕조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17조의 〈편민사목〉(便民事目)을 지어 발표하였다. 또한 조선 건국을 반대한 정적 등 반대파를 일소하였다.<ref name="소비자"/> 조선을 건국하는 데 일등 공신이 된 정도전은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겸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등의 군국의 요직을 겸함으로써 권력을 손에 쥐어 조선의 핵심 실세가 되어 행정, 군사, 외교, 교육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전반적인 문물 제도와 정책의 대부분을 직접 정비해 나갔다. 조선의 첫번째 임금으로 [[태조]]로 즉위한 [[이성계]]는 나랏일을 모두 정도전에게 맡겼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2인자가 되었으며, 건국 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여 새 나라의 문물 제도와 국책의 대부분을 결정하였다. 즉 [[한양]] 천도 당시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都城)의 기지를 정하고, 각 궁전 및 궁문의 칭호, 도성의 [[4대문]]과 [[4소문]] 및 성안 52방(坊)의 이름 등을 제정하였다.<ref name="이성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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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 방안 수립과 병권 장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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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태조]]의 [[교지]](敎旨)를 지어 새 왕조의 국정방향을 제시했고, 개국공신 1등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문하시랑찬성사 겸 판의흥삼군부사로 동판도평의사사사·판호조사·겸판상서사사·[[보문각]][[대학사]]·지[[경연]][[예문관]][[춘추관]]사 겸의흥친군위절제사를 겸직하여 정권과 병권을 모두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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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일]] 도평의사사사 겸 상서사사(尙瑞司事)가 되었다. [[7월 28일]]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훈되고 문하시랑찬성사 의흥친군위 절제사(門下侍郞贊成事義興親軍衛節制使)에 임명된 뒤 봉화군(奉化君)에 봉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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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는 즉위 한 달 만에 수도를 옮길 결심을 했다.<ref name="chung160">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60페이지</ref> 처음에는 나라 이름도 고치지 않고 수도도 그대로 개경으로 할 생각이었으나 무슨 까닭에서인지 천도를 결심, 후보지를 고르기 시작했다.<ref name="chung160"/> 맨 먼저 후보지로 지목된 곳은 계룡산이었다. 이성계는 곧바로 궁궐터를 닦기 시작했다.<ref name="chung161">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61페이지</ref> 그런데 계룡산 천도에 반대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너무 협소하여 백성들이 들어가 살기 어렵고, 토지가 비옥하지 못하여 교통이 불편하고 [[금강]]이 멀어 백성들이 고생한다'는 이유였다.<ref name="chung161"/> 계룡산에 대한 반대 상소가 올라가자 정도전 등도 [[계룡산]]으로의 천도를 반대하여 [[태조]]는 새로운 길지를 선정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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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10월]]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 겸 계품사로 명나라에 가서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호소하고 승인받아왔다. 12월에는,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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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3년]](태조 2년) [[7월]] 다시 [[문하시랑]][[찬성사]]로 동북면도안무사가 되어 변방으로 나가 여진족을 토벌, 회유하고 되돌아왔으며, [[한성]]으로 되돌아온 뒤 〈문덕곡 文德曲〉·〈몽금척 夢金尺〉·〈수보록 受寶〉 등의 악사(樂詞) 3편을 지어 왕에게 창업의 쉽지 않음과 수성(守成)의 어려움을 반성하게 하는데 쓰이는 자료로 삼도록 권고하였다. [[1393년]] 9월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10월 관습도감판사(慣習都監判事)를 거쳐 [[1394년]](태조 3년) 1월 판의흥삼군부사로 병권을 장악하여 병제개혁에 대한 상소를 올리고, 3월 경상·전라·양광 삼도 도총제사가 되어 지방의 병권까지 장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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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제와 관제의 정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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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조선이 갖춰야 할 정부 형태와 조세 제도는 물론 법률 제도의 바탕을 만들었으며,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나라의 통치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또한 정도전은 수도 천도를 결정하고 수도 이전을 단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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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건국 직후부터 그는 《[[조선경국전]]》을 편찬해 새로운 법제도의 틀을 닦았으며, 도읍을 옮겨 새 왕조의 면모를 높일 것을 계획하였으며, [[경세문감]]을 저술하여 재상, 대간, 수령, 무관의 직책을 확립했다.<ref name="park34"/> 또한 [[명나라]]의 공물 요구가 거세지자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군량미 확보, 진법 훈련, 사병 혁파 등을 적극 주장, 추진해 병권 집중운동을 펼쳐나간다.<ref name="park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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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노비 해방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병제(兵制)를 대폭 개혁하여 진법(陳法)·진도(陳圖)를 지어 장병을 훈련하고, [[1397년]](태조 6)에 동북면 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가 되어 지금의 경원(慶源 : [[함경북도]]) 지방에 가서 성보(城堡)를 수리하고 주·군과 역참을 획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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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고려 말 배불론(排佛論)의 주동자로 [[불교]]를 대체할 사상으로 유교 성리학을 지목했다. 그는 유교로써 문교(文敎)를 통일하고자 하여 주자학으로 미신이라 여겨지는 [[불교]]와 [[노자교]](老子敎), [[무속]] 등을 압도하고자 유감없이 공격을 가하였다. [[불교]]의 자비는 친함과 안면이 있음에 따라 차별이 있고, 불교는 인류 자연의 성정에 위배하여 사회 조직을 파괴하는 것이며, 석가가 인세(人世)를 이탈하여 자립자영코자 아니하였음은 타력에 따라 기생코자 한 것이고 특히 [[선 (불교)|선종]]과 같은 것은 인심을 현혹하는 마종(魔宗)이라고까지 비판하였으나 아무도 이에 응대하는 불교인이 없었던 유학의 대가였다. 또한 그는 유교를 전파하고자 조선 왕조의 제도와 예악(禮樂)의 기본구조를 세운 《조선경국전》·부병제(府兵制)의 폐단을 논한 〈역대부병시위지제〉(歷代府兵侍衛之制)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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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 천도([[1394년]] [[1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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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8월부터 그는 새 도읍지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는데, 이는 고려의 구신과 세족이 도사리고 있는 개경은 신왕조의 정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1394년]] 8월부터 개경을 떠나 새로운 도읍 건설을 추진하여, 한양을 새 왕조의 도읍지로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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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을 조선의 새 수도로 결정한 것은 물론, 한양의 도시 설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경복궁]] 자리도 정도전이 잡은 것이라고 한다. [[무학대사]]는 지금의 [[인왕산]]을 주산으로 궁궐을 세워야 한다고 했으나 정도전은 반대하였다. 그는 [[무학대사]]가 추천한 위치는 동향이며 터가 너무 좁아 왕도로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도전의 뜻대로 [[경복궁]]이 현재의 자리에 세워지게 되었다. [[한성부]]의 각 [[궁궐]]과 [[전각]], 문의 이름을 짓고 도로 수도의 행정분할도 결정했다. [[1394년]] 한양 천도의 지도와 감독을 병행하면서 새 사회에 걸맞은 사상으로 유교 성리학을 정식 국교로 채택할 것을 주청하였으며, 그해에 〈심기리편〉(心氣理篇)을 지어 불교·도교를 비판하고 유교가 실천 덕목을 중심으로 하는 인본주의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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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의 허락 아래 [[종묘]]와 [[사직 (역사)|사직]], 궁궐의 터 등이 들어설 자리를 정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궁궐 및 각 전각의 이름은 모두 정도전이 손수 지었다.<ref name="이성무">{{뉴스 인용|저자=이성무|제목=피플[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8> 한양정도와 정도전|url=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0911/h2009110922335684800.htm|출판사=한국일보|날짜=2009/11/09|확인이랒=2009. 12. 12}}</ref> 그는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지을 때 유교적 덕목이 나타나도록 근정(勤政), 인정(仁政) 등의 단어를 사용했다. 또한 [[한성부|한성]]의 4대문과 4소문의 첫 이름과 현판을 짓기도 했다. 그 밖에도 종묘의 제례법과 음악도 정도전이 제정한 것이었다. 특히 〈몽금척〉(夢金尺), 〈수보록〉(受寶籙), 〈문덕곡〉(文德曲) 등 수많은 악장을 지어 태조의 공덕을 찬양하였는데, 이 악장은 조선조 5백 년간 궁중에서 연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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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건국([[1392년]]) 이후 정권 투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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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자 책봉 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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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를 누구로 임명하느냐는 문제에 관해서 당초의 의론은 "시절이 태평하면 적장자를 세우고, 난세에는 공이 많은 왕자를 세워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신덕왕후 강씨]]는 자신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고, 태조 이성계 역시 방석을 총애하여서 [[배극렴]]을 비롯한 대소신료들은 태조의 의중에 따라 여덟째 아들 [[의안대군 (이방석)|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태조의 전처 한씨 소생 아들 중 다섯째 인 [[이방원]]은 정치적 야심이 가장 컸던 탓에 이 일로 격분하였다.<ref>[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090331003766&subctg1=&subctg2= [조선 태조의 무덤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 ]</ref> 또한 다른 전처 한씨 소생의 왕자들도 자신들을 배제하고, 후처인 강씨의 아들 막내 방석이 왕세자가 된 것에 대해 모두 분개하였다. 이것이 훗날 [[제1차 왕자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태조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정도전은 바로 [[세자시강원]]이사(世子侍講院貳師)의 한사람이 되어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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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력 강화와 [[명나라]]와의 갈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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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5년]] [[1월]] [[정총]](鄭摠) 등과 함께 《[[고려국사]]》(高麗國史)를 편찬하였다. [[조선]] 창업에 성공한 정도전은 세자책봉에 이은 새나라 문물과 제도정비에 착수했다. [[6월]]에는 국가의 통치규범인《조선경국전》,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제왕들의 치적을 담은 《[[경제문감]]》,《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 등의 편찬을 주도하여 새로운 치국의 대요와 관제 등 모든 제도와 문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경제문감》과 《경제문감별집》에는 정치제도·재상·대관(臺官)·간관(諫官)·부병제도·감사(監司) 등의 업무와 인사 행정 및 실무를 논하였다. 이어 국방력 강화와 [[고구려]] 고토수복을 위한 공병제도를 도입 군의 통수권을 국가에 귀속 시키기 위한 사병을 혁파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일방적인 정도전의 정책에 대해 [[조선 태조|태조]]는 그의 상소를 수용하는 것을 머뭇거렸고, 점차 반발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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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5년]] [[3월]]에는 다시 판삼사사로 복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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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5년]] 일부 반발 세력에 의한 국가기밀 누설로 인하여 갈길 바쁜 [[조선]]은 [[명나라]]와 외교적 분쟁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신흥국 [[조선]]의 일신을 경계하였던 [[명나라]]의 황제 [[주원장]]은 [[조선]]의 정조표전(正朝表箋) 문구에 [[명나라]]를 모독하는 글귀가 있다는 걸 문제삼아 [[조선 태조|태조]]에게 정도전을 자신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 태조|태조]]는 정도전은 병에 걸렸다거나 나이가 많다거나 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명나라]]의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계속해서 그의 소환을 요구하였고, 이를 무마하기 위한 조처로 문하시랑찬성사를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동북면도선무찰리사로 체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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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부]]의 도시 정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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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가 확정, 단행될 무렵 그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1394년부터 2년간 그는 [[한성부]]의 도시 정리를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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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5년]](태조 4년)에는 도성축조도감이라는 관청을 설치, 성을 쌓기 위한 기초측량을 하게 했으며,<ref name="chung162">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62페이지</ref> 총책임자는 정도전이 되었다. [[1396년]]부터 성곽을 쌓기 시작 1년여 만에 완성했다.<ref name="chung162"/> 백악산 꼭대기를 기점으로 하여 동쪽으로 한성부 시내를 돌아 백악에 이르는 성곽은 총길이 5만 9천 5백 자, 그 중 토성이 4만 3백여 자, 석성이 1만 9천 2백 자, 높이 40자 2치로 정도전은 이 수치를 정확히 계산, 파악했으며, 공사기간은 여름과 겨울로 농번기를 피해 2기로 나누어 공사를 벌였다. 공사는 2년만에 완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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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후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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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태종|이방원]]과의 갈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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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자타가 공인하는 해동의 장량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과 [[이성계]]의 관계를 [[한 고조]] [[유방]]과 그의 참모 [[장량]]에 비유하였는데,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게 아니라 거꾸로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했다는 말을 꼭 덧붙였다. 이 말은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해 [[한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제국을 건설했다는 뜻으로, 자신 또한 [[태조]]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왕조를 건설한 것이며, [[조선]] 건국의 실질적인 기획자가 곧 자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주장은 [[정몽주|포은 정몽주]] 등을 제거한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의 반발을 초래하게 되었다.<ref>이방원은 그의 발언이 불경하다며 공격하였으나 태조 이성계는 그를 두둔한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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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임금은 세습되는 직책이라 어리석고 멍청한 임금이 나올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정도전은 어린 [[세자]] 방석을 교육시켜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 정치]]([[재상 정치]])의 실현을 꿈꾸었지만, 왕권과 자신의 입지가 약화되는 것을 두려워한 [[이방원]]은 후일 사병을 이끌고 내습하여 그를 살해하고 더불어 세자 방석도 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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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동 정벌 계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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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Zhu Yuanzhang.gif|thumb|left|200px|[[명나라]]의 초대 황제 홍무제(주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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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요동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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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건국 직후부터 그는 [[요동 정벌]](1392)을 계획한다. 1396년 요동 정벌의 방안으로 그는 그때까지 각 지역의 왕실측근과 [[개국공신]]들이 사적으로 보유하던 [[사병]]을 모두 혁파하여 국가의 정규군으로 개편하자는 [[사병 혁파]]를 단행하였다. 그러자 [[사병]]을 중심으로 정변을 세우려고 계획한 [[이방원]]은 [[고려유신 그룹]]을 규합하여 노골적으로 반감을 품고 역습의 기회를 품게 되었다. 동시에 [[이방원]]은 정도전을 제거하기 위하여 [[명나라]]로 가는 사신 [[하륜]], [[설장수]] 등을 비롯한, 반감을 품은 인사들을 사주하여 은밀히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획책하려 한다고 밀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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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6년]](태조 5년) [[3월]] 과거 고시관(科擧考試官)에 임명되어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해 [[5월]] 조유인(曹由仁), 이치 등 33인을 선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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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6년]] [[7월 27일]] 봉화백에 봉작되었다. [[1397년]](태조 6년) 3월 상서사 판사(尙瑞司判事)로 공동 상서사판사인 [[조준]]과 함께 내관과 궁녀의 작호와 품계를 정하여 올렸다. [[1397년]] [[명나라]]의 사은사가 가지고 온 자문(咨文)에서 [[명나라]]는 그를 '조선의 화(禍)의 근원'이라고 지적했다. 동시에 조선 조정에 정도전을 해임하고 [[요동 정벌]]을 중단하라고 경고했다. 요동 정벌을 목적으로 왕족들과 여러 호족으로부터 몰수한 사병들을 새로 신설한 의흥삼군부에 병합한 뒤 그가 지은 진도(陳圖)에 따라 대대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정도전의 개혁과 요동 정벌 준비는 같은 개국공신인 [[조준]] 등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끝내 그와 결별하게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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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동 정벌 계획 실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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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4월 요동공벌 계획을 명나라에 누설한 [[설장수]]와 [[권근]]의 문책을 요구하였으나, 불문율로 부치고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6월 정도전은 확보한 병력으로남은과 함께 양주목장에서 대대적인 진도(陣圖) 훈련을 하면서 [[이성계]]에게 출병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조준의 강력한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그해 12월, 다시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주군(州郡)의 구획을 확정하고 성보(城堡)를 수리했으며, 비밀리에 사람을 파견하여 [[평안도]], [[함경도]] 일대의 인구 수와 군관(軍官) 수를 점검하고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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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0월 [[가례 도감]](嘉禮都監) 제조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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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8년]]초 그는 왕에게 상무정신을 함양할 것을 건의하고 병법과 진법 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정벌의 준비를 마무리한다. 바로 그는 [[태조]]에게 절제사를 혁파하여 관군(官軍)으로 합치고, 사병을 모두 압수하며, 왕자와 공신들이 나누어 맡고 있던 군사지휘권을 박탈하게 하고, 개인이 거느린 사병 집단을 국가에 귀속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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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변과 최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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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제1차 왕자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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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8년]](태조 7) [[음력 8월]] 그는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자신의 아들들을 변방으로 보낸 것을 인용하여 이방원은 [[전라도]]로, 이방번은 [[동북면]]으로 보내야 된다고 건의하여 태조의 승인을 얻었다. 그러나 이방원은 파견을 거부하고 [[민무구]], [[민무휼]] 등과 함께 정도전 암살을 기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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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6일]]([[음력 8월 26일]]) 정도전은 송현에 있던 [[남은]]의 첩의 집에서 [[남은]], [[심효생]], [[이직]] 등을 만나 술을 마셨다. 그가 [[남은]]의 집에서 술을 마신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방원]]은 즉시 소수의 결사대를 이끌고 [[남은]]의 첩의 집으로 향한다.<ref>[[#태조실록 1413|태조실록 (1413)]]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708026_001  14권, 태조 7년 8월 26일 기사 1번째기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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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이방석을 세자로 세운 일로 인해, [[이방원]]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이방원은 그가 한씨 소생의 모든 왕자들을 궁으로 불러 들인 후에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죽일 계략을 세웠다고 누명을 뒤집어 씌워 살해하였다.<ref name="동양철학사"/> 그러나 이방석의 세자 책봉은 정도전이 아니라 태조 이성계가 한 일이고, 정도전이 왕자들을 암살하려 한 계략의 실체는 사실무근 이다.<ref name="이성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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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최후에 이르러 정도전은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승자에 입장에서 이방원이 비열한 인물로 폄하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뒤에 그와 아주 다른 내용을 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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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아들: "아버님 지금 나가시면 죽을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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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됐다. 나도 살만큼 살았고 내가 죽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ref name="Solchan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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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삼봉집]]》에는 그가 이방원의 칼에 맞기 직전 자신의 삶의 최후를 정리하는 '자조(自嘲)’라는 시를 남겨 영웅호걸다운 면모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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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poem>操存省察兩加功 / 조존과 성찰 두 곳에 온통 공을 들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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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負聖賢黃卷中 / 책 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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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年來勤苦業 /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 놓은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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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亭一醉竟成空 / 송현방 정자 술 한 잔에 그만 허사가 되었구나.</poem>|정도전|《자조》(自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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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두 아들 [[정영]]과 정유(鄭游)는 아버지를 구하러 달려가다가 살해되고, 얼마 뒤 조카 정담(鄭澹)은 큰아버지와 사촌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집에서 자살했다. 맏아들 [[정진 (조선)|정진]]은 당시 태조의 안변군 석왕사 삼성재(三聖齋)발원을 위한 밀접 수행 중이었으므로 해를 당하지 않고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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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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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묘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봉화정씨]] 을류보에 [[경기도]] [[광주]](廣州) 사리현(士里峴)에 있다는 기록이 있고, [[유형원]](1622-1673)의 ‘동국여지지(東國輿之地)’ 과천현조에는 현동북 18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에 그의 가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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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발했던 조준은 그가 죽자 정몽주가 정도전의 음해로 죽었다며 복권을 상소하였다. 조준의 상소는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태종 때 가서 받아들여져 정몽주는 충절의 상징으로 추상되어 [[영의정]]부사에 [[추증]]되었다. 정도전 사후 동생 [[정도복]]과 매제 [[황유정]]은 연좌되지 않고 계속 관직생활을 할 수 있었고, 아들 [[정진]]은 [[1411년]] [[조영무]], [[안경공]] 등의 건의로 복직하여 판 [[나주목사]]로 기용되었고 [[조선 세종|세종]] 때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또한 정도전의 증손인 [[정문형]]은 [[조선 세조|세조]] 때 [[좌익공신|좌익]][[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고 관직은 [[우의정]]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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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은 그를 폄하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몽주]]를 현창하였는데, 이는 [[태종]]의 아들 [[세종]]이 [[정몽주]]의 제자 [[권우 (1363년)|권우]]의 문인이었고, 세조 때 [[사림파]]가 관직에 진출하면서 충절의 상징으로 성역화되었다. 동시에 정몽주의 라이벌인 그는 불이익, 폄하의 대상이 되었다. 후대에 이르러 그는 오히려 두 왕조를 섬긴 변절자로 또는 단지 처세에 능한 모사가로 인식되었다.<ref name="park35">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35페이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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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는 그가 죽은 것은 운수소관이지만 건국공로에 있어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다고 평하였다. 그는 [[조선]]의 개국공신이었고, [[한성부]]의 각 전각과 궁궐의 이름을 지은 인물이다. 그러나 [[사림]]에 의해 비판을 받았는데, 이는 그대로 수용되었다. 그에 대한 비판이나 부정적 견해가 일반화된 데에는 그가 죽은 후 정적들의 대거 복귀로[[이색]], [[정몽주]]의 정치적 승계자인 고려 유신그룹과 사림파와 정몽주를 충신의 표본으로 현창함으로써 정도전을 격하하려는 [[이방원]]의 의도가 있기는 했지만 반드시 그런 의도만으로 정도전이 부정적 평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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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성정이 과격하고 온후함이 없어, 빼어난 재주에 비해 덕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남인]] 실학자 [[이익 (1681년)|성호 이익]]은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정도전을 일컬어 '죽을 만한 일을 한 위인'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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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선조]] 때 [[정여립의 난]]의 가담자 중 도피자의 이름을 알수 없자, 관청에서는 도피자의 이름을 일부러 [[삼봉]]이라 지어 그를 조롱하였다. [[조선 광해군|광해군]] 당시 [[허균]]이 그의 시문을 애호하였다는 이유로 [[허균]]은 역모로 몰려 사형당한다. 그는 [[조선 정조|정조]] 때 가서야 정조가 그의 저서인 《[[삼봉집]]》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서서히 복권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조]]는 빠진 글들을 수집하고 편차를 재구성하여 수정 《[[삼봉집]]》을 간행하였다.<ref>박기현, p.5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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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 성리학자로 정도전과 마찬가지로 군신공치의 이상을 견지했던 [[송시열]]마저 정도전을 언급할 때는 반드시 그 이름 앞에 '간신'이라는 말을 붙였다.<ref>이한우,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조선 역사의 56가지 진실 혹은 거짓》 (21세기북스 2009) 202페이지</ref> [[조선]]시대를 통틀어 정도전에게 가장 적대감을 표시한 인물은 송시열이었다.<ref>조유식, 정도전을 위한 변명 (푸른역사, 1997)33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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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고종 2년) [[9월]] [[신정왕후 (조선)|대비 조씨]]의 건의로 다시 공신 칭호를 돌려받았다. [[1865년]] [[고종]]은 [[경복궁]]을 중건하고 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을 인정해 그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으며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뒤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후손들이 사는 [[경기도|경기]] 양성현(안성군 공도면, [[평택시]] [[진위면]])에 사당을 건립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http://www.kiib.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7500# ::: 경인일보 :::<!-- 봇이 붙인 제목 -->]</ref> 고종은 정도전의 조선 건국과 제도와 법령 마련, 체제 정비 등의 치적을 기려 유종공종(儒宗功宗) 현판을 특필하여 하사하였다. 사당은 [[1986년]] [[4월]] [[경기도유형문화재]] 132호로 지정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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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천지위]](不遷之位)에 추대되었고, 그의 묘소가 실전되어 [[1872년]](고종 8년) 왕명에 의해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ref>승정원일기 고종 9년 임신(1872년) 3월 23일자 기사</ref> [[1872년]] 개국공신으로 공식 복권되고 이듬해 관직과 작위가 회복되었다. [[1873년]](고종 10) [[남인]] 인사들에 의해 [[이현일]], [[윤휴]], [[한효순]], [[목내선]], [[정인홍]], 정도전 등을 복권해야 된다는 신원 상소가 올려졌다. 이에 면암 [[최익현]]과 중암 [[김평묵]]은 강하게 반발하였고 복권을 막기 위해 노력하했으나, 고종은 정도전 복권을 강행하였는데, 이는 정도전이 조선왕조건국에 끼친 공로를 추앙하여 복권을 한 것으로, 기존의 조선왕조에서 복권이 된 사람들인 [[김종서]], [[황보인]], [[사육신([[문인]] [[이개]], [[성삼문]] 등]], [[남이의 옥사]]에 희생된 [[남이]], [[기묘사화]] 때 희생된 [[기묘명헌]]의 사람 중 한 사람인 [[조광조|정암 조광조]] 등의 경우와 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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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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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박정희 정부]]에서는 [[정몽주]]를 충절의 상징으로 추상함으로써 다시 그에 대한 폄하가 시도되었으나 [[1970년]]대 이후 재평가 여론이 나타났다. [[2003년]] 삼봉 정도전 기념사업회가 출범하였다. [[2003년]] [[11월]], [[2007년]] [[12월]] 정도전 재평가와 그의 학문 연구를 위한 삼봉학 학술회의가 열렸다.<ref>[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254080.html ‘삼봉학’ 국내 넘어 국제무대로 : 학술 : 문화 : 뉴스 : 한겨레<!-- 봇이 붙인 제목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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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신권 정치 (조선)|신권정치]](臣權政治, 재상중심의 정치)가 독일식 총리제, 영국식 수상제, 스위스식 집정부제와 같은 정권들을 통하여 경제개혁, [[토지개혁]]으로 이어졌듯이 토지공동체와 같은 정책으로 땅의 제 역할이 회복될 수 있는 정도전의 [[정전제]]는 [[조봉암]]의 [[농지개혁]]의 바탕이 되었으며, 한국판 토지 뉴딜(New Deal)정책이었다는 평가다.<ref>「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이성계와의 만남, 신동준 저, 살림(2007년, 34~41p)</ref><ref>「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역성혁명의 기획자 정도전, 최용범 저, 페이퍼로드(2007년, 214~230p)</ref><ref>[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06649 애물단지 부동산, 이대로 가다간…] 프레시안(  2012.07.13) 기사참조</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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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묘가 [[경기도]] [[과천현]] 10리 동쪽에 있다는 전설과 소문을 근거로 과천 일대의 야산을 탐사한 결과 목이 잘린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과 함께 많은 양의 고급 조선[[백자]]가 함께 발견되었다. 정도전 사당에는 그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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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과 신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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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의 나라”를 꿈꾸었던 정도전은 훌륭한 재상을 선택하여 그 재상에게 정치의 실권을 부여하여 위로는 임금을 받들어 올바르게 인도하고, 아래로는 신하들을 통괄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중책을 부여하자고 주장하였다. 즉, 정도전은 임금은 단지 상징적인 존재로만 머물고 나라의 모든 일은 신하들이 회의를 거쳐 결정하는 나라를 이상적인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다. 태조 때의 정치는 태조와 그의 신임을 받은 정도전 등 소수의 재상이 이루었다. 한편 조선은 각 지역에 관리를 파견하여 “중앙집권 관료국가”가 되었다. 이것은 이전까지 지방 세력을 인정하는 봉건국가와는 비교되는 정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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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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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경세론(經世論)은 《[[조선경국전]]》(1394)·《경제문감》(1395)·《경제문감별집》 등에 제시되어 있다. 조선왕조의 통치규범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조선경국전]]》은 각국과 각 시대의 법령과 규정을 참고한 것이 주목된다. 《주례 周禮》에서 재상 중심의 권력체계와 과거제도, 병농일치적인 군사제도의 정신을 빌려오고, 한당(漢唐)의 제도에서 부병제(府兵制)·군현제(郡縣制, 守令制)·부세제(賦稅制)·서리제(胥吏制)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있다.<ref name="nate01">[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3622 정도전:네이트]</ref> 외국의 사례로는 [[명나라]]로부터는 《대명률 大明律》을 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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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말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토지균분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그 해결책으로서 민구수(民口數)에 따른 토지재분배와 공전제(公田制) 및 10분의 1세의 확립, 공(工)·상(商)·염(鹽)·광(鑛)·산장(山場)·수량(水梁)의 국가경영을 실현시키려고 하였다.<ref name="nate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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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경세론은 자작농의 광범한 창출과 산업의 공영을 통해서 부국강병을 달성하고, 능력에 토대를 둔 사 위주의 관료정치를 구현하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의 개혁안은 상당부분이 법제로서 제도화되었지만 그 모두가 실현되지는 못하였다.<ref name="nate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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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론과 인재 채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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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의정부서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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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문감》은 재상·감사·대간·수령·무관의 직책을 차례로 논하고, 《경제문감별집》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ref name="nate01"/>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긍정하였으며, 실제로 혁명이론에 입각하여 왕조교체를 수행하였다.<ref name="nate01"/> 그는 [[성리학]]적 왕도 정치와 패도 정치의 사례를 제시한 후, 패도 정치를 하는 군주는 역성혁명이나 기타 수단에 의해 폐위될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또한 군자와 소인의 존재를 역설하여 군왕은 군자들을 등용하여 올바른 정치를 수행해나가야 된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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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제도는 재상을 최고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지배체제이며, 그 통치권이 백성을 위하여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사상을 강조하였다.<ref name="nate01"/> 이는 일종의 내각에 의한 정국운영론으로, 그의 재상 중심, 신권 중심의 정치이론은 후일 [[이방원]] 집권 후 폐지되었다가, 다시 [[세종]]과 [[문종]]의 연이은 죽음 이후 [[김종서]], [[황보인]] 등에 의해 부활된다. 이를 [[의정부 서사제]]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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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농공상의 직업분화를 긍정하고, 사를 지배층으로 생각하였으나, 사의 직업은 도덕가·철학자·기술학자·교육자·무인 등의 역할을 겸비해야 하고 사에서 능력위주로 관리가 충원되어야 한다고 믿었다.<ref name="nate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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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 배척과 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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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불씨잡변]]을 지어 숭유억불정책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ref name="park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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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등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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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상 중에는 적서(嫡庶)나 양천(良賤)과 같이 혈통에 의한 신분차별을 주장하지 않은 것이 주목된다. 그는 유배생활을 전전하며 목격한 노비와 하층민의 참상에 분노했고 이것이 곧 역성혁명의 계기가 되었다.<ref name="nate01"/> 그러나 사농공상에 따른 신분 차별을 당연하게 여겼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한계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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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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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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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정도전 출생의 진실과 허구 2013. 교보문고, 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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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한국문화사연구논고 2013. 교보문고, 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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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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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인용 |ref="태조실록 1413"| reference ={{서적 인용 |저자=춘추관 관원들 |연도=1413 |제목=[[태조실록]] |ref={{sfnRef|태조실록 14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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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정씨 을류보》 (봉화정씨족보간행소, 1765)
+
* 《조선시대 7인의 정치사상》 (부남철, 사계절, 1996)
+
* 《조선왕조사》 (이성무, 동방미디어, 1998)
+
* 《증보삼봉집》 (정병철, 한국학술정보(주), 200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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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전 출생의 진실과 허구》 (정병철, 교보문고 퍼플, 2013)
+
* 《한국문화사연구논고》 (이상백 지음, 정병철 옮김, 교보문고 퍼플, 2013)
+
* 《[[불씨잡변]]》 (이기훈 역주, 계명대학교 출판부, 2006)
+
* 《정도전의 법사상 》 (최종고), 일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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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가 정도전의 재조명》 (최상용 이익주외, 경세원)
+
* 《정치가 정도전》 (최상용, 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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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말선초 대명관계사연구》 (박원호, 을류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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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의 연구》 (변태섭, 일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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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고백한다》 (이재운, 예담)
+
* 《정도전의 건국철학》 (김용옥, 통나무)
+
* 《정도전》전5권 (임종일, 한림원)
+
* 《성리학자 정도전의 국제적 위상》 (윤사순 김종진외, 경세원)
+
* 《조선의 건국》 (이이화, 한길사)
+
* 《정도전의 일대기》 (이성진, 한솜미디어)
+
* 《한국고전 시가의 연구》 (명희복, 에이포미디어)
+
* 《꿈너머 꿈을 꾸다: 정도전의 조선창업 프로젝트》 (박남일, 서해문집, 2008)
+
*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 조선 역사의 56가지 진실 혹은 거짓》 (이한우, 21세기북스, 2009)
+
* 《조선을 만든 사람들》 (이성무, 청아출판)
+
* 《조선의 킹메이커》 (박기현, 역사의 아침)
+
* 《[[정도전을 위한 변명]]》 (조유식)
+
* {{글로벌세계대백과}} <!-- 〈조선 양반사회의 성립〉 -->
+
 
+
== 바깥 고리 ==
+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2798&path=|183|193|&leafId=223 네이버 캐스트 : 오늘의 인물 - 정도전]
+
*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a_A1342_1_0011959&isEQ=true&kristalSearchArea=B 한국역대인물]
+
*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70000000718/3/70070000000718/20071204/8518818/1 '삼봉(三峰) 정도전 선생 기념사업회' 外] 동아일보 2007년 12월 4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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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20일 (금) 21:05 판

정도전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에 역사의 중심에서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꿈꾸던 성리학적 이상 세계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끝내는 정적의 칼에 단죄되어 조선 왕조의 끝자락에 가서야 겨우 신원 되는 극단적인 삶을 살았다.

백성의 삶 속에서 다져진 민본사상

정도전의 집안은 본래 봉화 지역의 향리였다. 고려 시대까지 향리는 우리가 아는 조선조의 향리와는 그 격이 달라, 지방의 토착세력을 말한다. 정도전 집안은 경상도 봉화지역의 토착세력인 셈이다. 부친 정운경의 뒤를 이어 과거에 급제한 정도전은 22살 때 충주 사록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또한 정도전은 공민왕의 유학 육성 사업에 참여해 성균관 교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몽주∙이숭인 등도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정도전에게 시련의 시작이었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우왕이 즉위하였는데, 우왕이 재위하던 때는 정도전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이인임 등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하였고, 결국 원나라 사신의 마중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정도전은 오늘날의 전라도 나주에 속해 있는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정도전은 그곳에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목격하고는 위민의식(爲民意識)을 키웠다.

정도전이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들녘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그 농부는 정도전을 보고 당시 관리들이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안락과 근심, 시정의 득실, 풍속의 좋고 나쁨’에 뜻을 두지 않으면서 헛되이 녹봉만 축내고 있다며 질책하였다. 촌로의 이러한 발언은 정도전에게 백성을 위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되기 충분하였을 것이다. 결국 그가 제시했던 민본사상은 허울 좋은 이름뿐이 아니었다. 실제 백성의 삶을 목격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진정성이 담보된 것이었다.


천명을 읽고 장자방을 자처하다

계속된 정치적 시련에 대장부의 거대한 야망이 꺾일 만도 하지만, 오히려 정도전은 더욱 강해졌다. 관직에 다시 등용된 정도전은 전의부령, 성균좨주 등의 관직을 지내다가, 이성계의 추천으로, 성균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성균대사성은 성균관의 책임자를 말하는데, 당시 학계를 주도하는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사실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은 그보다 앞선 1384년(우왕 10년)에 이루어졌다.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정도전이 여진족 호발도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함경도에 있던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가면서부터였다. 이성계의 군대를 본 정도전은, 이성계가 자신의 포부를 실현해줄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리고는 군영 앞에 서 있던 노송에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겨 놓았다.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푸른 산 몇만 겹 속에 자랐구나 잘 있다가 다른 해에 만나볼 수 있을까 인간을 굽어보며 묵은 자취를 남겼구나

이 시에 대해 조선 초에 만들어진 [용비어천가]에서는 정도전이 이미 천명의 소재를 알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정도전은 평소 취중에 “한나라 고조가 장자방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이용하였다.”라고 말하고는 하였다. 한고조를 이성계에 대비한 것인데, 그렇다면 결국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했다는 말이 된다. 한 대장부의 거대한 야망을 느끼게 한다.


조선 왕조를 설계하다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면서 정도전의 야망은 급물살을 탔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때 고려 조정에는 한편에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세력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정도전, 조준과 같이 급진적 개혁세력이 있었다. 이성계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그는 이미 급진적 개혁세력의 맹주가 되어 있었다.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 의해 선지교(후일의 선죽교)에서 피살되면서 그를 추종하는 세력은 궤멸하였다. 이제는 그야말로 이성계 천하가 된 것이었다.

정몽주가 피살된 후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세력의 움직임이 가속화되어 드디어 1392년, 5백 년 고려 왕조는 역사 속에서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조선 왕조가 들어섰다. 조선이 개국된 후 정도전의 활약은 눈부셨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과정을 비롯해 현재의 경복궁 및 도성 자리를 정하였고, 수도 건설 공사의 총책임자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수도 건설이 마무리되면서는 경복궁을 비롯한 성문의 이름과 한성부의 5부 52방 이름도 지었다. 서울을 구성하던 각종 상징물에 의미를 부여하였는데, 대부분 유교의 덕목이나 가치가 담긴 표현이었다. 서울이 수도로서의 의미만이 아닌 유교적 이상을 담은 곳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조선경국전]을 지어 태조에게 올렸다. 이 책은 조선의 통치 규범을 제시한 것으로 후일 조선의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이 나오게 되는 출발이었다. 이 책에서 정도전은 자신이 꿈꾸던 요순시대를 건설하기 위한 거대한 정치 구상을 제시하였다. 요순시대처럼 임금과 신하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왕도정치를 전면적으로 표방한 것이었다.


요동 정벌 주장과 표전문 사건

[경국대전]의 기반이 된 [조선경국전]은 정도전이 작성하였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 후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며 권력의 핵심에 있었으나,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가 주창한 요동정벌 문제는 조선과 명나라의 주요한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당시 명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표방하였다. 다만, 여진과 제휴한다든지, 요동에 진출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특히 요동 진출 문제와 관련해서 정도전은 명나라에서 보면 요주의 인물이었다. 정도전은 태조에게 외이(外夷 : 중화질서 속에서 중국 이외의 민족을 지칭하는 개념)로서 중원에 들어가 왕이 되었던 사례가 있음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는 중국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도 중원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표현이었다.

급기야 1394년(태조 3년)에 이른바 ‘표전문사건’이 일어났다. 표전문이란 표문과 전문의 합칭으로, 조선이 중국의 황제와 황태자에게 보내는 공식 문서를 말한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조선에서 파견된 유구와 정신의가 가지고 간 표문을 문제 삼았다. 유구 등은 결국 명나라에 구속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문제가 된 표문의 작성자로 정도전이 지목되었다. 명나라에서는 당장 정도전의 소환을 요구하였다. 명나라의 요구를 둘러싸고 조선 조정에서 설왕설래하였다. 논의 결과 표문을 작성한 사람은 정총이고, 전문을 작성한 사람은 김약항이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사지로 정도전을 보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정총은 병을 이유로 가지 않고 김약항만이 명나라로 가게 되었다.

명나라의 요구가 거세었지만, 정도전이 가지 않은 것은 아마도 정치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 같다. 당시 정치를 주도하던 조정 관리들이 대부분 정도전 계열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후일의 태종 계열인 하륜만이 정도전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었다. 조정의 결정에 따라 김약항이 파견되었으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 명나라에서 다시 정도전을 압송하도록 요구하였다. 이때도 역시 정도전은 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국내에 있으면서 진법(陣法) 훈련을 강화하며 요동정벌을 위한 제반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병 혁파를 둘러싸고 왕자 및 공신들과 갈등을 초래하였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 정도전과 이방원

정도전은 개국 후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에 관여하였다. 태조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는 신의왕후 한씨이고, 둘째가 신덕왕후 강씨였다. 신의왕후 소생 아들로는 방우∙방과(정종)∙방의∙방간∙방원(태종)∙방연 등이 있었다. 이들은 신덕왕후 소생의 아들보다도 아버지 태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공도 많았다. 그런데 정도전이 이를 다 무시하고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하였던 것이었다.

정몽주를 선지교에서 살해함으로써 조선 건국이 가속화되는 계기를 만들었던 이방원 등 첫째 부인 한씨 소생들의 불만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더구나 사병 혁파 문제로 서로 갈등을 보이던 중 1398년(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였고, 정도전은 이방원이 이끄는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도전은 조선조 내내 신원 되지 않다가 고종 때 관직이 회복되었다.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건국 초에 설계 등에 참여한 정도전의 공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제1차 왕자의 난 발생 원인은 개인적인 불만이 표출된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방원과 정도전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이상의 차이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국가체제를 어떻게 편제하고 운영할 것인가의 차이인 것이다. 정도전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꾀하는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표방하였다면, 이방원은 그와는 달리 강력한 왕권에 바탕을 둔왕조국가를 지향했기 때문이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에서 현실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사림들이 집권하게 되면서 정도전이 꿈꾸던 이상 세계가 구현되어 갔으니, 정도전의 꿈은 꿈에서 그친 것이 아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