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적(李弘迪)"의 두 판 사이의 차이

DH 교육용 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새 문서: {{인물 정보 |사진 = The_Epitaph_of_ YiHongJeok_01.JPG |이름 = 이홍적(李弘迪) |출생 = 1636년(인조 14) |사망 = 1697년(숙종 23) |성별 = 남성 |국적 = 조선...)
 
잔글
57번째 줄: 57번째 줄:
  
 
명(銘)으로 이른다.
 
명(銘)으로 이른다.
 +
 
於惟李公 早以文鳴 아아 이 공이여, 일찍부터 문명(文鳴)을 떨쳐
 
於惟李公 早以文鳴 아아 이 공이여, 일찍부터 문명(文鳴)을 떨쳐
 +
 
始雖迍邅 晩乃騫騰 처음 비록 험난해도 나중에는 날아올라
 
始雖迍邅 晩乃騫騰 처음 비록 험난해도 나중에는 날아올라
 +
 
內而臺閣 與夫喉舌 안으로는 대각(臺閣)으로 후설(喉舌)을 담당했고
 
內而臺閣 與夫喉舌 안으로는 대각(臺閣)으로 후설(喉舌)을 담당했고
 +
 
外則州縣 以曁方嶽 밖에서는 주현(州縣)으로 방악(方嶽)에 이르렀네
 
外則州縣 以曁方嶽 밖에서는 주현(州縣)으로 방악(方嶽)에 이르렀네
 +
 
靡施不宜 所在盡職 부당한 일 벌이지 않아 직분을 다하였고
 
靡施不宜 所在盡職 부당한 일 벌이지 않아 직분을 다하였고
 +
 
士論爭推 輿望亦屬 사론이 서로 추앙해 한몸에 기대 받아
 
士論爭推 輿望亦屬 사론이 서로 추앙해 한몸에 기대 받아
 +
 
人皆謂公 朝暮卿月 남들이 모두 공을 아침저녁 달로 봤네  
 
人皆謂公 朝暮卿月 남들이 모두 공을 아침저녁 달로 봤네  
 +
 
天閼其齡 識者之惜 하늘이 내린 수명 식자들의 한이로다
 
天閼其齡 識者之惜 하늘이 내린 수명 식자들의 한이로다
 +
 
粤彼德水 衣履所托 아아 저 덕수(德水)에 옷과 신을 의탁하니 <ref>덕수는 풍덕의 다른 이름으로, 이홍적의 장지가 풍덕에 있음을 가리킨다.</ref>
 
粤彼德水 衣履所托 아아 저 덕수(德水)에 옷과 신을 의탁하니 <ref>덕수는 풍덕의 다른 이름으로, 이홍적의 장지가 풍덕에 있음을 가리킨다.</ref>
 +
 
我銘不誣 百世無怍 내 글이 거짓 아니라 백세토록 부끄럼 없네
 
我銘不誣 百世無怍 내 글이 거짓 아니라 백세토록 부끄럼 없네
  

2019년 11월 13일 (수) 22:44 판


묘지명 전문 번역

공의 휘는 홍적(弘迪)이며, 자는 원백(遠伯)이다. 이씨(李氏)로서 가계는 한산(韓山)에서 나왔으니, 목은선생 휘 색(穡)의 12세손이다. 증조부는 휘 엄(淹)으로 무과에 급제하고 관직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조부는 휘 영배(英培)로 참봉을 지내다가 원로직으로 첨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좌승지로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 직(稷)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니 모두 공으로서 귀해진 것이요, 또한 보사원종공신[1]에 들어갔다. 모친은 정부인에 추증된 영일 정씨(鄭氏)로서, 그 부친은 참찬에 추증된 용(涌)이시다.

공은 숭정 갑술년(1634) 10월 초3일에 태어났다. 갓 4살에 병자호란을 만나 부모를 따라 강화도에 들어갔는데, 성이 함락되자 정부인은 공을 안고 배에 올랐다. 풍덕(豊德)으로 달아나려는데 겨우 해안을 떠나자 오랑캐의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정부인이 구리그릇을 가져다 공의 머리에 씌워서 화살을 피하자, 공이 도로 정부인께 씌워드리니 보는 사람이 놀랍게 여겼다.

7살에 글을 엮을 수 있었고, 점차 자라서 독서를 좋아하니 학업이 날로 진보하였다. 일찍이 청성(淸城) 김석주(金錫胄)와 함께 성균관에 나아갔는데, 김 공이 평소에 글짓기에 능하여 남들이 반드시 첫머리로 꼽았다. 그러나 김 공은 스스로 말하길 "이 아무개가 대단하다[李某可畏]"고 하였다. 방출(榜出)에 이르러 공은 과연 수석을 차지하였고, 김 공은 다음이었으니 그 문망(文望)을 알 만하다.

갑오년(1654)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임자년(1672) 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2] 계축년(1673)에 권지 승문원 부정자였고, 갑인년(1674)에 현종께서 승하하사 공이 감조관(監造官)이 되었다. 을묘년(1675)에 승정원 주서로 제수되었다. 도감에서의 공로로 사과(司果)에 오르고, 문겸선전관(文兼宣傳官)으로 임명되었다가 예조ㆍ병조좌랑으로 옮겼다. 이때 집정하던 자가 공을 안주에 통판(通判)시키고, 병조는 그대로 벼슬하길 계청하였다. 상께서 일찍이 글의 주제를 내리셨는데, 홍문관ㆍ승정원의 관리들과 병조의 낭관들이 창졸간에 지어 올리니 공이 다시 으뜸이 되어 특별히 마구를 하사받았다.

병진년(1676)에 정랑을 거쳐 외직으로 송도경력이 되니, 송도의 백성들이 실화하여 천여 집이 소실되고 백성들이 모두 울부짖었다. 공이 힘을 다해 재물을 내어 예전처럼 회복시키고, 지친(至親)이 스스로 공사를 감독하여 고된 일을 꺼리지 않으니 보는 이들이 감탄하였다. 가을에 사임하여 체직되고 겨울에 호남의 시험을 관장하고, 돌아가서 무장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정사년(1677)에 경상도사에 임명되었다. 무오년(1678)에 성균관 직강으로 제수되었고, 이내 외직으로 순천군수가 되었다. 해마다 호랑이를 잡아 가죽을 공납하다가 사람이 많이 죽고 다쳤는데, 공에 이르러 힘써 관찰사에게 청하여 포(布)로 대납하니 그 폐해가 영구히 사라져서 한 군이 혜택을 입었다. 기미년(1679)에 교체되어 배천군수로 다시 임명되었다. 선비 수십 명을 선발하여 향교와 서원에 나누어 배치하고 학업을 진흥시키는 데 힘쓰니, 사풍(士風)이 점차 떨치게 되었다. 경신년(1680)에 환국이 일어나자 들어와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고, 다시 사간원 정언으로 옮겼다가, 이윽고 장령으로 승진하였다.

이에 앞서 오시수(吳始壽)가 오랑캐 사신에 기대 상을 무고하는 말을 하였다. 조정에서 국청을 세워서 엄히 심문하는데, 국청은 오시수가 일찍이 대신을 지냈기에 참작하여 처단하길 청하였으나, 상께서 사사를 명하시었다. 공이 아뢰어 오시수가 실로 선대왕의 죄인이니 마땅히 정형(正刑)에 따라야 하되, 가벼이 앞질러 사사함은 안옥(按獄)의 체모가 손상됨을 말하고, 여러 역관들을 아울러 국문하여 왕법으로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봉상시ㆍ장악원 정을 지내고 다시 장령에 임명되었다. 보사공신을 추록하는 데 잘못된 점을 논의하며 원훈을 탄핵하는 데 이르자 말이 몹시 절실하고 곧았으니, 상께서 거듭 엄하게 교지를 내리셨다. 신유년(1681)에 암행어사의 명을 받고 다음날 떠나려는데, 상께서 공이 연로한 조부모와 부모가 있으므로 특별히 명을 내려 보내지 말게 하셨으니 남다른 은전이었다. 사간원 헌납ㆍ사간, 사복시ㆍ예빈시 정에 임명되고 다시 영남의 시험을 관장하였다. 들어와 성균관 사성ㆍ봉상시 정이 되었다.

10월에 참판공이 졸하시고, 승지공은 앞서 4월에 몰하셨다. 계해년(1683) 7월에 왕모(王母)의 상을 당하니, 공은 큰 슬픔을 당하고 다시 잇달아 승중제(承重制)를 입으니 쇠약해져 생명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을축년(1685) 9월에 상복을 벗고 제용감 정에 임명되었다가, 이내 사간으로 옮겼다. 하루는 정사를 보는데 상께서 중비(中批)로 몇 사람에게 특별히 관직을 제수하시니 혹 올리기도 하고 혹 옮기기도 하니 척신(戚臣)의 무리였다. 공이 글을 올려서 쟁집(爭執)하니 이에 재앙을 만나 경계하고 두려워할 것을 논하고 언로의 도리를 널리 펼쳤다.

병인년(1686)에 거듭 양사의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오랑캐 가운데 책망하는 말이 있어서 옥체를 욕보였다. 공이 분개를 이기지 못하고 상소하여 말하길 '병자년부터 50여 년 사이에 원한을 품고 아픔을 참지 않은 날이 없이 선대왕의 치욕을 보았고, 오늘에 이르러 극에 달하니 이것은 진실로 신이 죽을 순간이라 기회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의 책무는 자강(自彊)보다 앞선 게 없고, 자강의 도리는 전하께서 먼저 그 큰 뜻을 세우는 데 있습니다. 마땅히 기강을 떨치고 인민의 빈궁을 구제하여 인재를 얻고 군정을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라 하니, 상께서 가납하셨다.

정묘년(1687)에 나량좌(羅良佐) 등이 스승을 위한다며 송변(訟辨)하여 한 상소를 올렸는데, 우암(尤齋) 송(宋) 선생을 무고하는 것이 몹시 참담하여 상께서 특별히 멀리 유배보내길 명하셨다. 이에 그 당파로 양사에 있던 자들이 변호하는 말을 쏟아내며 힘써 거둬들이길 청하여서 정도를 걷던 사람들이 모두 탄핵을 당했다. 공은 집의가 되어 정언 김우항(金宇杭) 공과 더불어 나란히 그 상소를 중지시키고, 또한 글을 올려서 나양좌 등이 원로를 욕보인 죄를 극론하였다. 이에 고금의 붕당이 끼친 폐해에 이르자 말이 많이 절실하여 사론이 칭찬하였다.

가을에 승차하여 수원부사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체직되어 돌아왔다. 기사년(1689)에 시사가 크게 바뀌어, 공은 자취를 감추고 집에 있으며 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경오년(1690)에 외직으로 청주목사에 보임되자, 거듭 사양하여 나아가지 않다가 마지못해 임지에 나아갔다. 몇 달만에 사소한 일로 파직되었다.

신미년(1691)에 정부인께서 돌아가셨다. 갑술년(1694) 정월에 상을 마치고, 4월에 경화(更化)되어 장례원 판결사로 제수되고, 다시 외직으로 충청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가을에 동지부사로 차임되고 들어와 공ㆍ호조참의가 되었으며, 겨울에 연경에 갔다가 돌아와서 거듭 승지가 되었다. 병자년에 형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정축년(1697) 5월 25일에 병으로 졸하니 나이 64세셨다. 부고를 듣고 관례대로 부제(賻祭)하고, 풍덕 백마산 임좌(壬坐) 병향(丙向) 들에 장사지냈다.

공은 천성이 순실(淳實)하고 기운이 화평(和平)하여 밖으로는 딱히 꾸밈이 없는 듯해도, 안으로는 실로 절제하는 데 힘쓰는 것이 몹시 도타웠다. 부모ㆍ조부모를 섬기며 한결같이 봉양하는 뜻에 힘쓰고,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거스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만년에는 정부인을 받들어 더욱 삼가서 매번 곁에서 즐겁게 해드리며 잠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정부인께서 일찍이 질병으로 거의 위태하자 공이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어 약에 타 올리니 마침내 점차 차도를 얻었고, 사람들은 모두 그 효성에 감복하였다.

친족을 대할 때에는 화목함이 극진하며, 곤궁한 이를 구제하여 미치지 못할까 걱정했다. 벗과 교우함에 정성과 신뢰에 기반하여 일찍이 멀고 가까움에 차이를 두지 않았다. 또한 못된 무리의 습속이 아름답지 못하여 비록 흉중에서 경위(涇渭)가 절로 나뉘어도 남과 나의 당파를 따지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고, 평생토록 산업에 매이지 않아 관직에 있으면서 더욱 지푸라기 하나도 누가 되지 않게끔 하였다.

순천(順川)에 있을 때 월봉이 남아서 말 한 마리를 샀는데, 돌아갈 적에 향리들이 인계문서에서 빼놓자 공이 웃으며 말하길 "월봉은 홀로 관물이 아닌가"라 하여 끝내 기록하였다. 대개 공이 스스로 단속하는 엄격함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가업이 평소 넉넉해 또한 청렴함을 스스로 내비치려 하지 않았기에, 남들은 이를 아는 자가 드물었다.

문장은 풍부하고 민첩하며, 필법에도 일가견이 있었고, 성품은 술을 잘 마셔서 손님이 찾아오면 번번이 술잔을 채우게 명하였다. 갑술년(1694) 상복을 벗고 더욱 입신양명에 뜻이 없어서 오직 술 마시는 것으로 회포를 풀었다. 또한 양주(楊州) 해등촌(海等村)에 별장을 경영하여 조만간 은퇴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늘 한스럽게 여겼다.

부인은 전주 이씨(李氏)로 장령 제형(齊衡)의 따님이다. 온유하고 아름다우며 효성스럽고 순종하여 몹시 부덕(婦德)이 있었는데, 앞서 무진년(1688) 7월 일에 졸하여 풍덕에 장사지냈다. 공께서 돌아가시고 합장하였다.

공은 3남 4녀를 두었다. 장남 수함(壽涵)은 생원ㆍ현감이다. 그 밑으로 덕함(德涵)ㆍ인함(仁涵)은 모두 요절하였다. 딸들은 각각 판서 서문유(徐文裕)ㆍ부사 윤홍(尹泓)ㆍ현감 심융(沈瀜)ㆍ감역 최상진(崔尙震)에게 시집갔다. 측실의 아들이 하나로 선함(善涵)이다.

해로(海老)와 윤지명(尹志溟)ㆍ홍치후(洪致厚)의 처는 첫째에게서 나왔다. 생원 성로(星老)ㆍ진사 산로(山老)는 둘째에게서 나왔다. 진사 귀로(龜老)와 부사 유겸명(柳謙明)ㆍ홍중연(洪重衍)의 처는 셋째에게서 나왔다. 서 판서는 황주하(黃柱河)에게 시집간 딸을 두었다. 윤 부사는 아들 종주(宗柱)와 송한원(宋漢源)에게 시집간 딸을 두었다. 심 현감은 아들 달현(達賢)ㆍ진현(進賢)ㆍ도현(道賢)과 김리경(金履慶)ㆍ유상진(柳尙晉)에게 시집간 딸을 두었다. 최 감역은 아들 진사 준흥(駿興)ㆍ운흥(運興)과 심동진(沈東鎭)에게 시집간 딸을 두었다. 안팎으로 자손이 약간 명이다.

나와 공은 외사촌간으로 선비(先妣)께서 계실 적에 두 집안의 정이 깊고 도타웠다. 불행히도 공이 문득 세상을 떠나고, 오래지 않아 선비께서도 다시 하세하시니 나는 매번 전날을 추억할 때마다 슬퍼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산로가 행장을 가지고 와 만나서 공의 유당(幽堂)에 들어갈 명문을 청하고, 이어 눈물을 떨구며 말했다. "선백부(先伯父)께서 일찍이 유사(遺事)를 지었는데 초고를 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셨으며, 그 뒤에 가형께서도 돌아가시니 산로가 불초하여 조고의 행적이 날로 사라지게 하고 있습니다. 저의 어리석음을 가련히 여기시어 한 말씀 내려주시어, 조금이나마 속죄할 수 있다면 선인(先人) 뭇 숙부와 고인들의 혼도 분명히 명계에서 감읍할 것입니다."

아! 그 말이 몹시 슬프다. 내 비록 글재주가 없어도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이 정묘년(1687) 나량좌의 상소는 실로 사문(斯文) 세도(世道)의 큰 변고여서 온 조정이 끓어오르고 논의가 붕궤하였는데, 공께서 올곧게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고 늠연히 세태를 가로지르는 지주가 되셨으니 그 공이 크다고 할 만하다. 오늘의 분분함을 돌아보면 다시 큰일이 일어나 얼음과 숯, 희고 검음이 일체 뒤집혔으니 공에게 이것을 보게 하지 못하여 그 결과가 이러한 것이 아닌가. 구천에서 돌아올 수 없음이니, 아아!

명(銘)으로 이른다.

於惟李公 早以文鳴 아아 이 공이여, 일찍부터 문명(文鳴)을 떨쳐

始雖迍邅 晩乃騫騰 처음 비록 험난해도 나중에는 날아올라

內而臺閣 與夫喉舌 안으로는 대각(臺閣)으로 후설(喉舌)을 담당했고

外則州縣 以曁方嶽 밖에서는 주현(州縣)으로 방악(方嶽)에 이르렀네

靡施不宜 所在盡職 부당한 일 벌이지 않아 직분을 다하였고

士論爭推 輿望亦屬 사론이 서로 추앙해 한몸에 기대 받아

人皆謂公 朝暮卿月 남들이 모두 공을 아침저녁 달로 봤네

天閼其齡 識者之惜 하늘이 내린 수명 식자들의 한이로다

粤彼德水 衣履所托 아아 저 덕수(德水)에 옷과 신을 의탁하니 [3]

我銘不誣 百世無怍 내 글이 거짓 아니라 백세토록 부끄럼 없네


갤러리


연관 콘텐츠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존재하지만, <references/> 태그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