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정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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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6월 25일 (목) 03:5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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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학력

  • 동국대 불교학과 재학 중

경력

  •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최부 표해록

최부의 표해록 장서각본

  • 4월 10일

初十日,在玉河館 옥하관,是日晴,李恕謂臣曰:“你等還國車馬、關文來,你不久在此.”

옥하관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이서가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이 귀국하는 데 쓰일 거마(車馬)와 관문(關文) 관문이 왔으니, 당신은 이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10th Day. At Jade River House. This day was fair.

Li Shu said to me, “The carriages, horses, and passports for your return home have come. You will not be here long.”

  • 4월 11일

十一日,在王河館,是日陰,李翔 이상來謂臣曰:“你國謝恩使 사은사,何至今不來乎?”臣曰:“道路遼遠,他行止遲速,我不能料念,惟僕之到此,不係國家事,特蒙大國深恩,生還本國,祇自仰天祝手而已,但逗逼,遷延日月,不得全吾哭枢盧墓之心,所以痛哭耳.”翔曰:“我已詳說你言于禮部,禮部已入奏,近當回還,勿憂也”又有姓名王能者,善曉解我國言語,謂臣曰:“我祖父世居遼東東八贴요동동팔참之地,來往義州,我亦是高麗人也,我年十三,父 沒,隨母而居,退計三十一年間,我與母俱為兀良哈올량합 所掠,轉往韃靼달단之國,竟得生返,仍居于此,若有你國使來,未嘗不來相看也.”即以所將錢換酒,慰臣及從者,又語臣曰:“聞你從者無有亡失,然乎?” 臣曰:“然”能曰:“得非幸乎?盖人口聚而為日多,則雖平居無事,間有患死者,况遭被惡風,過盡大海,一無亡失,千古所稀,想必你於平昔積善所致也.”臣曰:“此是皇 홍치제명효종恩覆冒,使萬物各得其所,故我等亦幸得保此生也.”

옥하관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이상이 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 나라의 사은사(謝恩使)가 어찌하여 지금까지 오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길이 아주 멀어 그들의 거동이 더디고 빠름을 내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제가 이곳에 도착한 것은 국가의 일이 아닌데 특별히 대국의 깊은 은혜를 입어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하늘을 우러러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만 유랑하는 처지에 발이 묶인 몸이 시일만 지체시키면서, 나의 아버지 영구(靈甁) 앞에 곡을 하고 분묘(墳墓) 옆에 여막(廬幕) 살려고 하는 마음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게 되니 이 때문에 통곡할 뿐입니다.”

“내가 이미 당신의 말을 예부에 상세히 보고했더니 예부에서 벌써 상주하였습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반드시 돌아가게 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또 왕능(王能)이란 사람은 우리말을 잘 하였는데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는 요동 동팔참(東八站)[518][519][520]45 지방에 대대로 거주하면서 의주(義州)에 왕래하였으며 나 또한 고려 사람입니다. 내 나이 13세 때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따라 살았는데, 되돌아보니 대략 31년간입니다. 나와 어머니는 함께 올량합(元良哈)에게 약탈되어 달단(達旦)의 나라로 갔다가 마침내 살아 돌아와 이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당신 나라의 사신이 오면 와서 서로 만나 보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즉시 가진 돈으로 술을 사서 신과 종자들을 위로하여 주었습니다.

또 신에게 말하기를, “듣건대 당신의 종자(從者) 가운데 죽거나 실종된 사람이 없다고 하니 그렇습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사람이 많고 시일이 많이 흐르게 되면 비록 평상시에 별 일이 없을 때에도 혹 병환으로 죽는 사람이 있는 법인데, 하물며 모진 바람을 만나 큰 바다를 지나왔는데도 한 사람도 죽지 않았으니 천고에 드문 일입니다. 생각건대 반드시 당신이 평소에 적선을 한 덕택일 것입니다.”

“이것은 황제의 은혜가 하늘처럼 덮어 만물로 하여금 각기 제 자리를 얻게 한 까닭에, 우리들 또한 다행히 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1th Day. At Jade River House. This day was cloudy. Li Hsiang came and said to me, “Why has the Envoy of Thanksgiving from your country not come by now?” I said, “It is a long way; I cannot tell when he is moving and stopping or whether he is going fast or slow. All I think of is that my own coming here has nothing to do with affairs of state and that if only I receive the profound kindness of China and am returned home alive, I shall look up to Heaven and join my hands in prayer. But wasting away, loitering about, delaying for days and months, I shall not satisfy my desire to weep at the coffin and keep watch at the grave. It is that over which I grieve.” Li Hsiang said, “I have explained in detail to the Ministry of Rites what you say, and the Ministry has put in its memorial. You will soon be sent back; do not grieve.” There was a man named Wang Neng who understood our language well. He said to me, “For generations my ancestors lived in Tung-pa-hu, Liao-tung, and they went to and fro between there and Ŭiju. I, too, am a man of Koryð. When I was thirteen, my father died, and I went with my mother and for thirtyone years lived in Liao. I and my mother were captured by Urianghai11 and moved to Tatary. In the end we got back alive and have been living here. Whenever envoys have come from your country, I have always met them.” He bought wine with cash that he had and comforted me and my staff. He said to me, “I have heard that none of your staff died; is that so?” I said, “Yes.” Wang Neng said, “Wasn't that fortunate! Even ordinarily, among a large group of people over a period of time occasionally someone dies; how much more likely is that when violent winds are met and a great ocean crossed. Not to have a single death is rare in history. I imagine it must have been brought about by your amassing of virtue in ordinary life.” I said, “It is that the mantle of Imperial graciousness causes all things to take their place. We, too, therefore, survived.”

  • 4월 12일

十二日,在玉河館,是日朝雨午陰,有姓名李海,亦解我國語音,來語臣曰:“我從使臣往還你國已六度矣,徐宰相居正서거정,尚亡悲乎?”

옥하관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아침에는 비가 내렸고 낮에는 흐렸습니다.

이해(李海)란 사람도 우리말을 알았는데 신에게 와서 말하기를, “내가 사신을 따라서 당신 나라에 다녀온 것이 벌써 여섯 차례입니다. 서거정(徐居正) 재상께서는 잘 계시겠지요?”라고 하였습니다.

12th Day. At Jade River House. This day it rained in the morning and was cloudy at noon.

There was one Li Hai who also understood our language. He came and said to me, “I have gone with envoys to your country and back six times. Is Prime Minister Sỏ Ko-jong still well ?”

  • 4월 13일

十三日,在王河館,是日陰,張夔者,張元之季也,聰慧勝兄,謂臣曰:“寂旅館,何以消過日月?”以醋醬來遺,

옥하관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장기(張愛)란 사람은 장원(張元)의 막내 동생으로서 총명함이 형보다 나았는데, 신에게 “쓸쓸하고 적막한 여관에서 무엇으로 소일합니까?”라 하면서 초(醋)와 장(醬)을 보내왔습니다. 13th Day. At Jade River House. This day was cloudy.

One Chang K’uei was the youngest brother of Chang Yüan and was more perceptive than his eldest brother. He said to me, “How do you while away the days and months in this desolate house?” He brought vinegar and soy sauce and presented them to me.

  • 4월 14일

十四日,在玉河館,是日晴,有姓名孫錦者謂臣曰:“若此夏日之長,難以經過,我甚憐之,”即魄臣以米一斗、菜一盤、鹽·醬·醋各一器,臣令程保往謝之,錦曰:“你等在陳之嘆,專是會同館官회동관 員不取票之過也,皇帝豈知若此乎?”

옥하관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손금(孫錦)이란 사람이 신에게, “이같이 긴긴 여름날은 지내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매우 딱하게 생각합니다”라 하고는 즉시 쌀 1되, 채소 1쟁반, 소금, 장, 초 각기 1그릇씩을 보내 왔습니다.

신은 정보를 보내 사례했더니 손금이 말하기를,

“당신들이 진(陳) 땅에서 내뱉는 탄식 47은 오로지 회동관(會同館) 관원이 품신을 올리지 않은 잘못 때문입니다.

황제께서 어찌 이 같은 사실을 아시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14th Day. At Jade River House. This day was fair.

A man named Sun Chin said to me, “Long summer days like these are hard to pass; I am very sorry for you.” He presented to me one peck of rice, a plate of vegetables, and one container each of salt, soy sauce, and vinegar. I ordered Chong Po to go and thank him, and Sun Chin said, “The fact that you are short of rations is the fault of the officials of this Central Post Hotel. How can the Emperor know that matters are like this ?”

47.《論語》〈衛靈公)의 “在陳絶糧”에서 유래하는데 온갖 苦難 속에 처해 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춘추시대의 陳은 현재 河南省 陳州를 수도로 하던 小國이었다. 衛國을 떠난 孔子는 黃河를 건너 동남쪽으로 향하여 山東의 小國인 曹나라로 가려 하였으나 曹나라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이에 西南으로 방향을 돌려 河南의 宋으로 간 뒤 다시 그 西南의 陳國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陳은 吳의 침략을 당하고 있던 때였던 만큼, 공자 일행은 이곳에서 식량이 떨어져 끼니를 잇기도 힘든 형편이었다.

  • 4월 15일

十五日,在王河館,是日晴,有官吏自禮部來問臣職姓名及帶來人姓名, 寫以歸,莫知何為.

옥하관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예부에서 온 어떤 관리가 신의 관직, 성명과 데리고 온 사람의 성명을 물어서 적어 가지고 돌아갔는데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15th Day. At Jade River House. This day was fair.

An official came from the Ministry of Rites and asked my position and name and the names of the men who had come with me. He wrote them down and went back; I do not know why.

  • 4월 16일

十六日,在王河館,是日晴,有錦衣衛금의위後所班劍司校尉孫雄者來,臣曰:“寓空館無所事,淹留已過旬望,不知何日還國?”雄曰:“禮部 奏聞討賞,然後可回去.”臣曰:“我等來此,不因國家事,九死之後,只求生還耳,今則殘喘已壯,焦腸已沃,傷足已完,瘦骨已實,都是皇上懷撫遠人之恩,重且大也,我無一絲毫之補於大國,得蒙此重大之恩,固已措躬之無地矣,又何有賞賜之為哉?我所願,早還家山,巢老母葬死父,以終吾孝,此人子之切情,禮部豈能知道?”雄曰:“禮部近有事,故致今次事稽緩,我當詳告汝情于尚書,後又來看你.”

옥하관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금의위(錦衣衛) 후소(後所)의 반검사(班例司) 교위(校尉)인 손웅(孫雄)이란 사람이 왔기에 신이 말하기를, “빈 여관에 머물며 아무런 하는 일도 없이 벌써 보름을 지냈습니다. 언제나 귀국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손웅이 말하기를,“예부에서 황제에게 상주하여 상 내려 주실 것을 청한 후에야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이곳에 온 것은 나랏일 때문이 아니고, 거의 죽을 뻔한 뒤인지라 살아서 돌아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지금은 끊어질 듯하던 숨도 돌아왔고 말라버렸던 창자도 기름기가 돌고 다친 발도 다 나았고 쇠약했던 몰골도 이미 실해졌으니 모두 황상께서 먼 나라 사람을 품안에 넣어 어루만져주시는 은혜가 무겁고도 크기 때문입니다. 나는 대국에 조그마한 보탬도 없으면서 이런 무겁고도 큰 은혜를 입게 되어 진실로 몸 둘 곳도 없는데 또 어찌 상을 내리신다는 것입니까? 나의 소원은 얼른 고향에 돌아가서 늙은 어머니를 뵙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장사지내 나의 효도를 다하는 것입니다. 이 자식된 자의 간절한 심정을 예부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예부에서 근자에 일이 있었기 때문에 당신의 일이 지체되었습니다. 내가 마땅히 당신의 사정을 상서(尙書)에게 상세히 알린 후에 다시 와서 당신을 뵙겠습니다.” 16th Day. At Jade River House. This day was fair.

One Sun Hsiung, Captain of the Dress Swords Post of the Rear Office of the Imperial Bodyguard [Chin-i wei hou-so pan-chien ssu chiao-wei], came. I said, “We have been lodged in this empty guest house with nothing to do, waiting and hoping, for more than ten days already. We do not know when we shall return home.” Sun Hsiung said, “After the Ministry of Rites has memorialized asking for awards, you may go back.” I said, “Our coming here had nothing to do with affairs of state. After being on the verge of death, we sought only to return home alive. Now, our dying breath has grown strong, our dried guts have softened, our hurt feet have healed, and our weak bones have hardened. That is all because the graciousness of the Emperor in caring for strangers is generous and great. I, without having served China in the slightest, have received that generous and great kindness. I am already embarrassed; why, then, should there be a giving of awards ? What I want is to go home quickly, see my old mother, bury my dead father, and carry out my filial duties. How can the Ministry of Rites know what urgency this son feels?” Sun Hsiung said, “Recently there has been some trouble in the Ministry of Rites, causing them to order your case to be delayed. I shall set all the circumstances concerning you 'before the Minister and later come see you.”

  • 4월 17일

十七日,在玉河館,是日洒雨,琉球人유구인의 모습陳善、蔡賽、王忠等來告回國,遂以矮扇二把、踢席二葉贈臣,日:“物雖至薄,情實有在”臣曰:“我所遇

知於足下者,在情不在物也.”陳善曰:“我國王會在二十年前,差我父送貴回還,大為人人見愛,常想恩情,我又得與大人相善,得非幸乎?”

옥하관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부슬비가 내렸습니다.

유구국의 진선(陳善)·채새(蔡賽)·왕중(王忠) 등이 와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됨을 고하였습니다.

마침내 작은 부채 두 자루와 방석 두 닢을 신에게 선사하면서 말하기를, “물건은 매우 하찮은 것이지만 저희들의 정이 담겨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내가 족하와 알고 지낸 이유도 정에 있었던 것이지 물건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진선이 말하기를, “우리 국왕께서 일찍이 20년 전에 나의 아버지를 귀국에 보내어 다녀오게 하신 적이 있는데[522][523] 귀국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아 항상 은정(恩情)을 생각하셨습니다.

나 또한 대인과 친해졌으니 다행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17th Day. At Jade River House. This day there were showers.

The Ryukyuans Ch'en Shan, Ts'ai Sai, and Wang Chung came and announced that they were returning home. Then they presented to me two small fans and two floor mats and said, “Though they are poor things, our feelings truly go with them.” I said, “Our friendship is based on feelings, not things.” Ch'en Shan said, “Twenty years ago, the King of my country sent my father to your country and back. He was extended great love by numbers of people, and he always remembered their kindness. Is it not fortunate that I, now, have found so much in common with you?”

  • 4월 18일

十八日,禮部,是日陰,辦事吏王瑛,持牌子패자來叫臣,其牌書仰喚朝鮮漂海夷官崔溥,火速赴司,毋違云云,臣從王瑛,過南薰鋪,至文德坊,城之正陽門內,建大明門,門之左為文德坊,右為武功坊,正陽三層,大明二層也,行至禮部,主客司郎中李魁、主事金福·王雲鳳等承尚書周洪謨、左侍郎倪、右侍郎張之命,謂臣曰:“明早引入朝,給賞衣服,可易吉服,事畢便打發回去,”臣對曰:“我漂海時,不勝風浪,盡撒行李,僅守此喪服來,無他吉服,且我當要配吉,恐不合於禮,且以喪服入朝,義又不可,請大人__的禮制,更示何如?”李郎中將臣言歷議,良久,使吏鄭春謂臣曰:“明早受賞時,無展禮節次,可令你從吏代受,明後日謝恩時,你親拜 皇帝,不可不參”云云,臣還王河館,夕,孫錦又以栗二、醬瓜一器來醜之,有一人驅羣羊,過玉河館門而去,其一羊有四角,二羊毛長垂地.

예부에 이르렀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사무를 주관하는 서리 왕환(王煥)이 패자(牌子)를 가지고 와서 신을 불렀습니다.

그 패자 속의 글은, 바다를 표류해 온 조선의 관원 최부를 불러 급히 관사(官司)로 가게 하라. 어김이 없어야 할 것이다. 운운하였습니다.

신은 왕환을 따라 남훈포(南薰鋪)를 지나서 문덕방(文德坊)에 이르렀습니다. 성의 정양문(正陽門)49 안에 대명문(大明門)을 세웠는데, 대명문의 왼쪽은 문덕방(文德坊), 오른쪽은 무공방(武功坊)이었고, 정양문은 3층, 대명문은 2층이었습니다.

가서 예부에 이르니, 주객사낭중(主客司郞中) 이괴(李魁), 주사(主事) 김복(金福), 왕운봉(王雲鳳) 등이 상서(尙書), 예(倪) 좌시랑(左侍郞), 장(張) 우시랑(右侍郞)54의 명을 받들어 신에게 말하기를,

“내일 아침에 함께 입조하면 의복을 상으로 줄 것이니, 길복(吉服)으로 바꾸어 입도록 하오. 일을 마치면 즉시 돌아갈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나는 표류할 때 풍랑을 견디지 못하여 행장을 모두 버리고 이 상복(喪服)만을 겨우 입고 왔으므로 다른 길복은 없습니다. 또 내가 친상을 당하여 길복을 입는 것이 예(禮)에 맞지 않을 듯하고, 상복 차림으로 입조하는 것은 의(義)에 맞지 않으니 청컨대 대인께서는 예제(禮制)를 참작하여 지시를 바꾸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李) 낭중은 신의 말을 여러 사람과 의논하다 한참을 지난 후에 서리 정춘(鄭春)을 시켜 신에게, “내일 아침 상 받을 때는 예를 차리는 절차가 없으니 따라온 아전으로 하여금 대신 상을 받도록 하고, 모레 황제의 은혜를 사례할 때는 당신이 몸소 황제에게 배례(拜禮) 해야하니 참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는 등의 말을 전하였습니다.

신은 옥하관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녁에 손금(孫錦)이 또 좁쌀 2되와 장아찌 1그릇을 보내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러 마리의 양떼를 몰고 옥하관 문을 지나갔는데, 그중 한 마리는 뿔이 네 개나 달려 있고 두 마리는 털이 길어 땅바닥에 드리웠습니다.

18th Day. Attending the Ministry of Rites. This day was cloudy.

Foreman Wang Huan, carrying a placard, came and summoned me. On the placard was written, “We summon Ch’oe Pu, the barbarian official of Korea who drifted across the sea, to come to this office in great haste.” I followed Wang Huan past the Nan-hsün Stop to Wen-te Ward. Inside the Cheng-yang Gate of the wall stood the Ta-ming Gate. To the left of the gate was Wen-te Ward; to the right Wu-kung Ward. Cheng-yang had three stories, Ta-ming two. We arrived at the Ministry of Rites. Li K’uei, Senior Secretary of the Bureau of Receptions, and Chin Fu and Wang Yün-feng, Administrative Secretaries, receiving commands from Minister Chou Hung-mo, Left Vice Minister Ni, and Right Vice Minister Chang,12 said to me, “At dawn you will be taken to Court to receive awards of clothing. You should change your clothing to festive dress. When that is over we shall send you off to go back.” I replied, “When I was drifting at sea, I was overwhelmed by the wind and waves and let all my baggage go. I came here barely having saved these mourning clothes; I have no festive dress. At any rate, I am afraid that to be festive when I should be in mourning would not measure up to what is proper. To enter Court in mourning clothes, moreover, could not loyally be done. I beg of your Excellencies to weigh the ceremony; would it be possible to change your instructions ?” Senior Secretary Li talked about what I had said in detail and for some time and had the sub-official Cheng Ch’un say to me, “When you receive the awards tomorrow morning, there will not be an elaborate performance of ritual. You may order a subordinate officer to receive them for you. When you acknowledge the Imperial graciousness the day after tomorrow, you yourself will bow to the Emperor. You must take part in that.” I returned to Jade River House. In the evening, Sun Chin came again and presented to me two pecks of grain and one container of melons in soy sauce. A man drove a flock of sheep past the gate of Jade River House. One of the sheep had four horns, and two of them had hair so long it hung to the ground.

48. 통지서. 49. 明淸時代 北京 內城의 正門이다. 俗稱으로 前門이라고도 한다. 50. 正陽門을 들어가면 바로 大明門이 있는데 동으로 禮部, 서로는 前軍都督府의 사이에 위치한다. 淸代에는 大淸門이라 불렸지만 후에 철거되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編, 《明淸北京城圖》(地圖出版社, 1986) 참조. 51. 主客司는 禮部 소속 4淸吏司의 하나로서 洪武29년(1396)에 원래 禮部 소속의 主客部를 고쳐 설치하였다. 郞中 1인(정5품), 員外郞 1인(종5품), 主事 1인(정6품)을 두었다. 土司와 변방지구의 각 민족 및 외국의 조공 왕래, 접대, 賞賜 등의 일을 관장하였다. 52. 이 당시의 예부상서는 周洪謨이다. 《明史》권184, 列傳72 周洪謨,. 53. 倪左侍郞은 兒岳을 가리키는 듯하다. 天順8년(1464)에 進士가 된 岳은 成化22년(1486) 禮部右侍郞이 되어 弘治初에 左侍郞이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明史》권 183, 列傳71, 岳 참조. 그런데 《明孝宗實錄》弘治元年(1488) 12월 癸卯 條에는 “禮部右侍郞 倪岳을 左侍郞으로 승진시켰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어 혼란스럽다. 하 지만 다음 각주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成化23년부터 弘治2년까지 禮部右侍郞은 張悅 이었다는 점에서 위 《實錄》에서 언급한 내용의 실상에 대해서는 고증이 필요하다. 아마 成化22년 右侍郞이 되었던 岳이 23년 張悅이 右侍郞이 되면서 실질적으로 左侍郞 역할을 하다가 12월에 들어와 정식으로 임명받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54. 張悅을 가리킨다. 《明憲宗實錄》成化23년(1487) 11월 辛酉 條에 工部右侍郞이었던 張悅을 禮部右侍郞으로 임명한 사실이 보인다. 한편 《明孝宗實錄》 弘治2년 (1489) 7월 丁丑 條에 “禮部右侍郞 張悅을 吏部右侍郞으로 보직을 바꾸었다”고 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張은 成化23년부터 弘治2년까지 右侍郞을 맡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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