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DH 교육용 위키
Wikisisop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3월 5일 (일) 10:20 판

(비교) ← 이전 판 | 최신판 (비교) | 다음 판 → (비교)
이동: 둘러보기, 검색

이성계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고려 말의 정국은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고려 정계의 내부에서부터 시작된 개혁의 의지는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혁을 하자는 쪽과, 모든 것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역성혁명을 도모하는 세력으로 나뉘었다. 역성혁명의 중심에는 고려 말 급부상한 신흥무장 세력 이성계(李成桂, 1335~1408, 재위: 1392~1398)와 그와 뜻을 같이한 급진파 신진사대부들이 있었다. 신진사대부들과 함께 고려 왕조를 무너뜨린 이성계는 이전의 고려와는 다른 새로운 성격의 나라, 조선왕조를 열었다.

반원정책의 물살을 타고 고려의 중앙 무대로

이성계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1330~1374) 시기부터 급부상한 신흥 무장 세력이었다. 그는 고려의 중앙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라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쌍성총관부 지역에서 힘을 키워가던 변방의 세력이었다. 쌍성총관부는 원나라가 1258년(고려 고종 45년) 고려에 침입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한 후 설치한 통치 기구였다. 철령 이북의 땅은 공민왕이 이 지역을 수복하기 전까지, 근 100여 년 동안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는 원래 전주 지역의 향리였는데, 가솔을 이끌고 쌍성총관부 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이성계의 가문은 고조부 이안사부터 아버지 이자춘(李子春) 때까지 원나라로부터 천호(千戶)라는 지방관의 자리를 얻어, 대대로 이 지역 고려인과 여진족 위에 군림하는 세력가로 성장하였다.

이렇듯 고려의 중앙과는 거리가 먼 변경 지역의 세력, 심지어 고려의 관리도 아니었던 이성계가 고려의 중앙 조정에 데뷔하게 된 것은 공민왕의 반원(反元) 정책 덕택이었다. 중국의 원-명 교체기의 혼란한 국제 정세를 틈타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고자 했던 공민왕은 1356년 원의 간섭기에 잃어버렸던 땅,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려 하였다. 이때 공민왕이 보낸 동북면병마사 유인우에게 협력하여 쌍성총관부 지역을 고려가 탈환할 수 있도록 도운 사람이 바로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었다. 당시 20대였던 이성계도 아버지와 함께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데 일조하였다.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이 지역에 화주목(和州牧)을 설치한 공민왕은 이자춘의 공을 높이 사 그에게 고려의 벼슬을 내렸다. 1361년 이자춘은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로 임명되어 동북면 지방의 실력자로 급부상하였다.

외침에 시달리고 내적으로는 권문세족의 득세로 왕권이 약화되어 군사 조직이 붕괴하고 국가 재정은 말이 아니었던 고려 말, 비록 변방의 세력이지만 착실히 군사력을 키운 이성계 가문의 힘은 만만히 평가될 것은 아니었다. 이성계는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는 탄탄한 사병 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지역에 뿌리박고 살면서 키운 인맥과 경제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이성계는 급부상한 집안의 배경과 함께 뛰어난 무예를 겸비하고 있었다. 그는 활을 매우 잘 쏘았으며 동북면의 여진족과 고려인들을 수하로 부리면서 장수로서의 자질을 키워나갔다.

아버지 이자춘의 노력으로 고려의 중앙 무대에 명함을 내민 이성계는 자신의 능력에 힘입어 곧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당시 잇따른 외적의 침입은 약화된 고려 조정으로서는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었지만, 청년 이성계에게는 무장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하늘이 준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외적을 물리치며 큰 공을 세워

고려 조정에 내알한 뒤, 이성계의 본격적인 활동은 1361년 독로강(현재 평안북도 강계 지역) 만호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면서부터 시작되어, 승승장구를 계속하였다. 같은 해 겨울, 압록강이 얼어붙자 중국에서부터 쏟아지듯 침입해온 10만 명의 홍건적들이 수도 개경을 함락시켰다. 이때 이성계는 고려인과 여진족 2,000명으로 혼합 구성된 자신의 사병 조직을 이끌고 수도 탈환에 참가하였다. 그는 홍건적의 두목을 모두 활로 쏘아 죽이고, 개경에 맨 처음 입성하는 큰 공을 세웠다. 이듬해에는 원나라 장수 나하추의 침입을 물리쳤으며, 1364년에는 공민왕을 폐하려는 원나라 황제의 명령으로 침입한 덕흥군과 최유의 1만 군대를 최영과 함께 무찔러 고려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또한 자신의 이종사촌이 되는 여진족 삼선ㆍ삼개의 난을 평정하여 동북면의 안정도 되찾았다. 이로써 그는 고려 중앙 조정에서 탄탄한 입지를 확보함과 동시에 중요 벼슬을 거치게 되었다.

이성계의 활동은 동북쪽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극심해진 삼남 지역의 왜구 침입을 막아내는 데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특히나 해안뿐만 아니라 내륙에까지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던 극악한 왜구를 황산에서 섬멸함으로써 그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이 전투를 ‘황산대첩’이라고 한다.

이후 이성계는 북쪽과 남쪽을 오르내리며 근 20여 년간을 고려 조정을 위해 일했다. 그가 치르는 전투는 모두 승리하였으므로 그는 ‘불패의 사나이’, ‘난세를 구원할 영웅’으로 명성을 쌓아갔다. 거듭되는 승전은 그를 고려 조정에서 없어서는 안될 인물로 만들었고, 벼슬길은 승승장구였다. 또한 그의 인기와 명성을 좇아 많은 사람이 주변에 모여들게 되었다. 그 중에는 이미 그 운이 다한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생각을 품은 신진사대부들도 있었다.

위화도 회군, 쿠데타 드디어 권력의 정점에 서다

자신의 능력으로 승승장구하며, 아무리 그 입지를 확고히 한다 하여도 이성계에게는 변방지역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기에, 누대에 걸쳐 뿌리내린 막강 권문세족들이 버티는 고려 중앙 정치 무대에서 그의 성장은 한계가 있었다. 특히 같은 시기 이성계와 함께 외적을 퇴치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권문세족 출신의 최영에게는 이성계로서는 넘어서기어려운 존재감이 있었다. 공민왕 사후 한때 중앙 정계를 주름잡던 이인임 세력을 최영과 함께 물리친 이성계는 수문하시중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언제나 최영의 다음 자리였다.

위화도(威化島)는 신의주시 상단리와 하단리를 이루는 섬이다. 이성계와 조민수는 이 섬에서 요동정벌군을 돌려, 수도였던 개경으로 진군하였다.

이즈음 국제 정세는 원나라가 북쪽 몽골 지역으로 쫓겨 가고 명나라가 중국 본토를 차지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었다. 중국 본토를 차지한 후, 명나라는 원∙명 교체기의 혼란한 상황 동안 돌아보지 못한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려 하였다. 고려와의 관계에 있어서 명나라공민왕이 회복한 철령 이북의 땅을 다시 반납하라는 억지를 부리고 나섰다. 철령 이북의 땅은 원나라가 고려의 땅을 강제 점거하였던 쌍성총관부 지역으로 명나라는 이곳에 철령위를 세우면서 이전의 원나라의 땅이었던 지역은 모두 명나라의 소유라고 주장하였다.

최영과 그가 보호하고 있던 우왕은 명나라의 이러한 요구에 반발했다. 그리고 명나라 국초의 불안한 정국을 틈타 요동까지 정벌하자고 나섰다. 이성계는 최영의 의견에 반대했다. 이성계는 최영이 울분에 차 전투의 시기와 국제 정세를 잘못 읽고 있다고 판단하고, 요동정벌이 불가한 4가지 이유를 들었다.

그것은 여름철 농번기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부적당한 점,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쓰기 힘든 점, 요동을 공격하는 사이에 남쪽의 왜구가 침입할 우려, 그리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의 의견은 군사에 정통한 장수로서 일견 타당한 부분도 있었으나 완강한 최영과 우왕에 의해 무시되었다. 결국 이성계는 우왕과 최영의 명을 받아 우군도통사가 되어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요동정벌 길에 올랐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가기 전 위화도에 주둔한 이성계는 큰 비를 만나고 더는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대로 물에 빠져 죽을 것인가 군대를 돌릴 것인가의 기로에서 이성계는 조민수를 설득해 회군을 선택했다.

위화도에서 회군하면서 이성계는 이미 왕명을 거역한 반역자의 신세가 되었다. 이러나 저러나 운명의 기로에 서 있었던 그는 요동정벌을 위해 얻은 대군을 개경으로 끌고 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요동정벌대에 군사 대부분을 내주었던 최영은 적은 숫자로 이성계에게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성계는 쿠데타에 성공했고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태산과 같은 존재, 최영을 제거했다. 이성계는 우왕을 왕위에서 내쫓고 고려 중앙 정계의 일인자가 되었다. 그의 쿠데타에 힘을 실어준 것은 공민왕 시기 중앙 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한 성리학을 신봉하는 신진사대부들이었다.

당시 신진 사대부는 고려말의 사회적 모순을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 그 안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던 온건파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급진파로 나뉘어 있었다. 온건파로는 정몽주∙이색 등이 있었고 급진파로는 정도전이 대표적이었다. 처음에는 신진 사대부 전체가 이성계와 협력하여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왕위에 앉히는 등 정견을 같이하였지만, 새로운 왕조를 향한 급진파의 급격한 추진력은 결국 두 세력을 반목하게 하였다. 결국 이성계는 정도전과 결탁하여 역성혁명을 반대하고 고려에 대한 충성을 주장하던 정몽주를 마지막으로 제거함으로써 역성혁명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 시기 이성계는 조준의 건의에 따라 전제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구세력의 경제력을 박탈하고 신진 사대부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새로운 나라를 향한 새로운 지배계층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도 하였다.


신진 사대부 세력을 기반으로 새로운 왕조를 열다

정몽주를 제거하고 4개월 뒤, 이성계는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1392년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그는 개경에서 공양왕에게 선위를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라 개국하였고, 이듬해 나라의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었다.

조선의 3대 기본 정책은 숭유억불∙농본주의∙사대주의였다. 이것은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 때 이념적 바탕을 제공한 신진 사대부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성리학을 신봉하고 고려시대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였던 신진 사대부들의 경험론이 반영된 숭유억불(유학을 높이고 불교를 누른다.), 중국 송나라에서부터 시작된 성리학 사상의 주요한 경제적 바탕이 된 농업을 국가의 중심 산업으로 하는 농본주의, 그리고 분수를 알아 큰 나라를 모시고 주변과 교린하는 성리학적 사대주의가 조선을 이루는 중심 사상이 된 것이다.

사대주의는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 하편’의 '오직 어진 자가 큰 나라로 작은 나라를 섬기고 오직 지혜로운 자가 능히 작은 나라로 큰 나라 섬긴다 ...(중략)...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즐기는 자요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두려워하는 자이니 하늘의 도리를 즐기는 자는 천하를 편안하게 하고 하늘의 도리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릴 것이다.' 라는 글 중 ‘이소사대(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섬긴다 以小事大)’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조선이 유학에서 최고로 치는 어진 자보다는 지혜로운 자라는 두 번째 자리를 택함으로써 중국에 비해 작은 나라인 조선의 안정과 당시 국제 정세 속에서 실리를 추구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성계가 세운 이 세 가지 건국이념은 이후 조선 500년의 정체성을 이루는 근간이 되었다.

나라를 세운 뒤 이성계는 1394년 무학도사의 도움을 받아 한양에 도읍을 정하여 궁궐을 짓고 수도를 이전하였다. 이것은 고려의 본거지인 개경을 벗어남으로써 고려의 기득권층을 배제하고 새로운 지배계층을 형성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성계는 관제를 개편하여 유학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관제를 마련하고 너무 힘이 드세진 개국공신을 견제하면서 각지의 인재들을 아울러 왕권을 튼튼히 하였다. 또한 [경제육전]을 편집하게 하여 법치주의에 입각한 국가체제의 정비를 추구하였다. 이 [경제육전]은 성종대 경국대전의 완성 이전까지 조선 초기 법전의 초석이 되었으며 조선 500년간 기본 법전이 된 [경국대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환란의 말년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체성의 나라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재위 기간은 1392년부터 1398년까지 불과 6년밖에 되지 않는다. 하늘 아래 가장 높은 자리인 왕위에 스스로 오르는 영웅다운 삶을 살아낸 그였지만 말년에 자식들이 벌이는 골육상잔의 권력 다툼 앞에서 그는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고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비극의 시작은 세자 책봉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는 데는 정도전을 대표로 하는 급진적 신진 사대부의 힘도 컸지만, 안으로는 이성계의 집안에서도 새 나라를 개창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두 사람 있었다. 그것은 이성계의 첫 부인 한씨의 소생인 다섯째 아들 이방원(훗날 태종)과 그의 두 번째 부인 강씨(신덕왕후)였다. 개국공신에게 논공행상이 있듯이 집안의 큰 조력자들에게도 논공행상이 있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다음 왕위를 예약하는 세자의 자리였다. 아버지를 도와 나라를 세우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방원은 그 세자 자리가 당연히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성계의 참모 역할을 했던 정도전과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도록 불철주야 내조한 강씨의 생각은 달랐다. 왕권과 신권의 조화로운 정치를 추구하는 성리학의 골수 깊은 신봉자인 정도전에게 너무 강한 성격의 이방원이 다음 왕위를 잇는 것은 부담이었다. 강씨는 내조의 공을 전실 자식인 이방원이 가져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성계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둔 강씨는 자신의 아들 중 하나가 다음 왕이 되기를 강력히 희망하였다. 이미 첫 부인 한씨가 사망한 뒤라 이성계의 곁에서 이방원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방원으로서는 너무나 억울하게 ‘죽 쒀서 개 준 격’으로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이 세자자리를 차지하였다. 나라도 무너뜨린 이방원이었다. 눈앞에서 왕위가 사라지는 것을 가만 지켜볼 인물이 아니었던 이방원은 즉시 정도전과 맞서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자신의 사병을 일으켜 정도전을 급습해 죽이고 이복동생 방석과 방번을 모두 살해하였다. 아버지 이성계가 번연히 살아 있는 와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성계는 이 변란에서 두 아들과 사위까지 잃었고 권력 앞에 인면수심으로 행동하는자식들의 다툼에 인생무상을 느꼈다.

이성계는 마침내 1398년 9월에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물려주었다. 정종의 즉위는 난을 일으킨 후 바로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아버지를 협박해 왕위를 찬탈한 것처럼 보일까 염려한 이방원이 마련한, 왕으로 가기 전 일종의 유예기간인 셈이었다. 이후 2년 뒤 이방원은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넷째 형 방간마저 물리치고,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아 조선의 3번째 왕으로 등극하였다.

왕위를 둘러싼 자식들의 목숨을 건 권력 다툼에 회의를 느낀 이성계는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고향인 함경도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다섯째 아들 이방원을 몹시도 증오하였지만 이미 이방원에게로 기운 대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방원은 이성계를 모셔오기 위해 매번 차사를 보냈지만 이성계는 아들이 보낸 차사마저 모조리 죽여서 돌려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나온 말이 심부름을 간 사람이 소식이 아주 없거나 또는 회답이 좀처럼 오지 않을 때 쓰는 ‘함흥차사’란 말이다.

이후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간곡한 설득으로 겨우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 태상왕의 자리에 있다가 창덕궁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시호는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며, 묘호는 태조이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이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