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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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쉰떡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6월 20일 (토) 23:2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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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학력

  • 신정고등학교 졸업
  • 동국대학교 사학과 재학

경력

  • 백상응원단 부단장
  • 71대 사학과 학생회
  • 육군 병장 만기전역

좋아하는 것

  • 축구,퍼즐,게임

역사정보데이터베이스 기말과제

최부의 표해록

최부의 표해록 장서각본

3월 23일

二十三日,過靜海縣,是日晴,丑時開船,過釣臺鋪、南家口鋪、雙塘

p.424 鋪,至奉新睾,睾在靜海縣治之前,臣語傅榮曰:“願學水車之制.”榮曰:“你於何地,見所謂水車수차乎?”臣曰:“翼者過紹興府時,有人在湖岸運水車,以灌水田,用力小而上水多,可為當旱農稼之助”榮曰:“其制,木工所知,我未之詳,“臣曰:“昔嘉祐中,高麗臣屬毛羅島제주도人,橋崔桅折,風漂抵岸,至蘇州岷山縣곤산현,知縣事韓正彥篇以酒食,見其舊桅植舟木上不可動,使工人為治施造轉軸,教其起倒之法,其人喜,捧手而熊,毛羅,即今我濟州也,我往濟州,見漂來此,亦與其人一般,足下亦以韓公之心為心,教我以水車之制,則我亦捧手而喜.”榮曰:“水車只用汲水而已,不足學也,臣曰:“我國多水田,厦值旱乾,若學此制,以教東民,以益農務,則足下一唇舌之勞,可為我東人千萬世無窮之利也,望深究其制,有未盡,則問諸水夫,明以教我,”榮曰:“此北方地多沙土,無水田,故水車無所用,此水夫安知其制?我姑思之,”食頃間,榮略語機形之制、運用之方,臣曰:“我所見,轉之以足,此則運之手,且其形制小異,何也?”榮曰:“你所見必是蹈車도차者,然不若此制最便,止用一人,可以運之.”臣曰:“可造以松木否?”榮曰:“松木輕,不可造. 其機通上下用杉木,其腸骨用榆木,其板用樟木,其車腸用竹片約之,前後四柱要大,中柱差小,其車輪、腹板長短、廣(俠)狹]如之,如不得杉、榆、樟等木,須用木理堅韌者方可.”又過獨流巡檢司、沙寧鋪,至武淸縣地方, 과장청운__소, 인정시지장청역, 지명都是楊柳청양류청야. 유박이시, 三更,復開__而行,

정해현(靜海縣)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축시(丑時)479에 배를 출발시켜 조대포(釣臺鋪)·남가구포(南家口鋪)·쌍당포(雙塘鋪)를 지나서 봉신역(奉新驛)에 이르니 봉신역은 정해현치(靜海縣治) 앞에 있었습니다.

신이 부영에게 말하기를,

"수차(水車)[1] 만드는 방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부영이 말하기를,

"당신은 어디에서 수차[2]란 것을 보았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지난번 소흥부를 지날 때 어떤 사람이 호수 언덕에서 수차[3]를 운전하여 논에 물을 대고 있었습니다. 힘을 적게 들이면서 물을 많이 퍼 올리니 가뭄 시에 농사짓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 제작 방법은 목공이 아는 바로서 나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과거 가우(嘉祐)480 연간에 고려에 신속(臣屬)된 탁라도(E羅島)481 사람이 돛대가 부러져 표류되어 연안에 도착한 뒤 소주의 곤산현(混山縣)에 이르렀습니다. 지현 한정언(韓正彦)482은 그에게 술과 음식을 접대하였는데, 돛대가 배에 박혀 움직일 수 없음을 보고는 공인(工人)을 시켜서 돛대를 수리하여 전축(轉軸)을 만든 다음 그 일으키고 넘어뜨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도록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기뻐하면서 두 손을 맞잡고 감사해 마지않았습니다. 483 탁라는 곧 지금의 우리 제주입니다. 내가 제주에 갔다가 표류를 당하여 이곳에 왔으니 그 사람과 똑같습니다. 족하께서 또한 한공(韓公)처럼 마음을 쓰시어 수차의 제작법을 나에게 가르쳐 주시면 나도 또한 두 손을 맞잡으며 기뻐할 것입니다.”

“수차는 물을 푸는 데만 시용될 뿐이니 배울 것이 못됩니다.”

“우리나라는 논이 많은데 가뭄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만약 이 제작법을 배워 동방 백성에게 가르쳐서 농사짓는 일에 도움을 준다면 족하의 한 번 말하는 수고가 우리 동방 사람의 천만대의 무궁한 이익이 될 것입니다. 그 제작법을 잘 알아보시되 미진한 점이 있으면 수부(水夫)에게 물어서 나에게 명백히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이 북방은 사토가 많고 논이 없는 까닭에 수차가 소용이 없으니 수부들이 어찌 그 제작법을 알겠습니까?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 끼 밥을 먹을 동안에 부영이 기계의 형태와 운용 방법을 대략 이야기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내가 본 것은 발로 움직이던데 이것은 손으로 움직이고 또 그 형태도 조금 다르니 무슨 이유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이 본 것은 도차(蹈車)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이 가장 간편해서 한 사람만으로도 운전할 수 있습니다.”

“소나무로 만들 수 있습니까?”

"소나무는 가벼워서 만들 수 없습니다. 틀은 위아래를 통하므로 삼나무를 쓰고, 장골(腸骨)은 느릅나무를 사용하고, 판(板)은 녹나무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수레의 중심은 대쪽을 사용하여 묶고, 앞 뒤 네 기둥은 커야 하고, 가운데 기둥은 조금 작아야 하며, 그 수레바퀴와 중심의 판자(板子)는 길이와 너비를 같게 해야 합니다. 만약 삼나무, 느릅나무, 녹나무를 얻지 못하면 모름지기 나무 결이 단단하고 질긴 것을 사용해야만 될 것입니다." 484

또 독류순검사(獨流巡檢司)·사령포(沙寧鋪)를 지나서 무청현(武淸縣) 지방에 이르고, 양청체운소(楊靑遞運所)를 지나서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 시각에 양청역(楊靑驛)에 이르렀는데, 지명은 모두 양유청(楊柳靑)이었습니다. 정박했다가 3경에 다시 배를 출발시켜 떠났습니다.

23rd Day. Passing Ching-hai County. This day was fair. Between 1 and 3 a.m. we pushed off the boats and passed Tiao-t'ai Stop, Nan-chia-k’ou Stop, and Shuang-t’ang Stop, and came to Feng-hsin Station, which was in front of the seat of Ching-hai County. I said to Fu Jung, “I want to learn how water wheels are made.” Fu Jung said, “Where did you see something called a water wheel?” I said, “Previously, when we passed Shao-hsing Prefecture, there were men on the shore of a lake turning water wheels and irrigating fields. Using little strength, they raised much water. That could be helpful to farming in droughts.” Fu Jung said, “The construction is known to carpenters. I am not familiar with it.” I said, “Long ago in the Chia-yu period (1056-1063], a man from T’o-lo Island,95 which was subject to Koryo, drifted with the wind, his mast and boom broken, to shore. He reached K’un-shan County, Su-chou. The Magistrate of the county, Han Cheng-yen, served him wine and food and saw his old mast, which had been stood in the wood of the boat and could not be moved. He had a craftsman repair the mast and make a windlass and taught [the man] how to raise what had fallen. The man was so happy he clasped his hands and danced round. 96 “T’o-lo is now our Cheju. I went to Cheju, was driven adrift, and came here; I am of the same type as that man. Make His Excellency Han's spirit your spirit, teach me how to make a water wheel, and I, too, shall clasp hands and be happy." Fu Jung said, “The water wheel is used only for drawing water. It is not worth learning about.” I said, “In my country there are many irrigated fields, and frequently there is drought. If I study this method and teach the Koreans to improve their farming, your work of a few words can be an inexhaustible benefit to my Koreans for all ages. I should like to study the method carefully. If there is anything you do not know, you can ask the sailors and explain it to me clearly.” Fu Jung said, “Here in the North the land is mostly sandy soil, and since there are no irrigated fields, water wheels are not used. How can these sailors know their construction? However, I shall think about it.” While we were eating, Fu Jung told me briefly how the machine was built and turned. I said, “The ones I saw were turned with the feet. Yours is turned with the hands, and its shape, too, is a little different. How is that?”

Fu Jung said, “The ones you saw must have been treadwheels. They are not so convenient as this kind, which can be turned by a single man.” I said, “Can they be built of pine?”. Fu Jung said, “Pine is light and cannot be used to build them. For the upper and lower axles (chi-t’ung], we use cryptomeria. We use elm for the trough [ch’ang-ku] and camphorwood for the paddles (pan). Bamboo strips are used to bind the spokes (she-ch'ang]. The four pillars in front and back must be big, but the central pillar, to the contrary, should be small. The dimensions of the wheels, spokes, and paddles are like this. If you cannot get cryptomeria, elm, and camphor-wood, you must use woods of tough, pliable grain; they will do.97 [We went from Tu-liu Police Station to Yang-liu-ch’ing Station and beyond.]

3월 24일

二十四日,過天津衛천진,是日陰,曉過直沽城,河名,即沾水也,至天津衛城,衛河自南而北,即臣所沿來之下水也,白河自北而南,臣所去之上水也,二河合流于城之東以入海,城臨兩河之會,海在城之東十餘里,即舊時江淮以南漕運,皆浮大海,復會于此,以達京師,今則疏鑿水道,置開閉縱,舟楫之利,通于天下,城中有衛司及左衛·右衛之司,分治海運等事,城東有巨廟臨河岸,大書其額,臣遠而望之,其上天宇,其下廟”字,其中一字,不知某字也,河過丁字沽、海口里、河東巡更所、桃花口、尹兒灣、蒲溝兒、下老米店,至楊村睾,睾西又有巡檢司,

천진위(天津衛)를 지났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새벽에 직고성(直古城)485을 지났는데 강의 이름은 고수(活水)였습니다.

천진위성(天津衛城)에 이르렀는데 위하(衛河)는 남에서 북으로 흐르니 곧 신이 흐름을 따라온 강의 순류였으며, 백하(白河)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니 곧 신이 거슬러 가야 할 강의 역류였습니다.

두 강이 성의 동쪽에서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갔습니다.

성은 두 강이 만나는 곳에 임해 있었습니다.

바다는 성의 동쪽 10여 리에 있었으니 곧 옛날 강회(江__) 이남의 조운이 모두 큰 바다로 나갔다가 다시 이곳에 모인 뒤 경사로 가곤 하였습니다.

지금은 수로를 뚫어 열고 갑문을 설치하여 열고 닫으니 선박의 편리함이 천하에 통하게 되었습니다.

성안에 위사(衛司)와 좌위사(左衛司)·우위사(右衛司)486의 관사(官司)가 있어 해운 등의 일을 나누어 관장하였습니다.

성 동쪽에는 큰 사당이 강 언덕에 접해 있어 그 편액을 큰 글자로 썼는데, 신이 먼 데서 바라보니 그 위는 '천(天)'자, 그 아래는 '묘(廟)'자였지만 중간의 한 글자는 무슨 글자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487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정자고(丁字法)·해구리(海口里)·하동순경소(河東巡更所)·도화구(桃花口)·윤아만(尹兒灣)·포구아(蒲름兒)488. 하로미점(下老米店)을 지나서 양촌역(楊村驛)에 이르니 양촌역 서쪽에는 또 순검사가 있었습니다.

24th Day. Passing T’ien-chin [Tientsin] Garrison. This day was cloudy.

At dawn we passed Chih-ku. The name of the river by the wall was Ku River. We came to the wall of T’ien-chin Garrison. The Wei River ran from south to north and was the river down which I had come, the Pei River ran from north to south and was the river up which I was to go, and the two rivers joined east of the wall to flow into the sea. The wall overlooked the junction of the rivers, and the sea was over ten li east of the wall. In olden times, all cargoes from the Yangtze, Huai, and places south of them sailed the open sea and reassembled there to reach the capital. Now, the benefits of canals cut, locks placed, and boats given passage reach throughout the Empire. Inside the wall were garrison posts. The posts of the Left and Right Garrisons divided the administration of sea transport and other matters. East of the wall was a huge shrine overlooking the river bank, the inscription on its plaque so big that though I was far from it, I saw it. At the top was the word “Heaven” [t'ien] and at the bottom the word "Shrine” [miao]. There was a word in between them, but I do not know what it was. 98 [We went from Ting-tzu-ku to Yang-ts’un Station.]

3월 25일

二十五日,陰,早經上老米店、白河里、南蔡村、北蔡村、王家務、杜口、雙溪、蒙村、白廟兒、河西巡檢司,至河西睾,睾與遞運所,相距七 八步,傳榮謂臣曰:“潮江三司奏你等漂風之事,表本限在四月初一日,我奉表而來,恐未及限,自此驛乘先到京師,他日於兵部前相遇,莫敢辑禮以示相知之意,新天子法度嚴肅故”云.

p.426

흐렸습니다.

아침 일찍 상로미점(上老米店)·백하리(白河里)·남채촌(南蔡村)·북채촌(北蔡村)·왕가무(王家務)·두구(杜口)·쌍천(雙淺) 몽촌(蒙村)·백묘아(白廟兒)·하서순검사(河西巡檢司)를 거쳐서 하서역(河西驛)에 이르니, 하서역은 체운소와 7-8보 거리였습니다. 부영이 신에게 말하기를, “절강삼사(浙江三司)에서 당신들의 표류한 일을 아뢰었는데, 표문(表文)은 원래 4월 1일까지가 시한입니다. 내가 표문을 받들고 와서 시한에 맞추지 못할까 하여, 이 역에서 역마(驛馬)를 타고 먼저 경사로 가겠습니다. 훗날에 병부 앞에서 만날 때 습례(揖禮)를 하여 서로 아는 내색을 해서는 안 되니, 이는 새 천자의 법도가 엄숙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25th Day. Cloudy.

[We went from Shang-lao-mi Stop to Ho-hsi Station.] Fu Jung said to me, “When the Three Authorities of Chekiang memorialized on your being blown adrift, their memorial was dated the 1st Day, Fourth Month. I brought the memorial with me, and I am afraid we may not meet the date. From this station I shall go by relay carriage ahead of you to the capital. Later, when we meet before the Ministry of War, do not greet me and show that we know each other. I say that because the laws of the new Emperor are strict.”

3월 26일

二十六日,晴,大風,沙塵漲天,且不能開,順風而行,過要兒渡口、下馬頭、納鈔廳、天妃廟、中馬頭、車榮兒、上馬頭、河西務、土門樓、葉青店、王家木罷渡口、魯家坞、攀繪口,至泊蕭家林里前河之越岸,臣船相對處,有十餘人乘桴,架屋榜上,亦來泊,有賊人來劫奪,乘人亦强健者,相與搏擊,陳萱曰:“盗肆行國掠若此,其分付你來,各自相警,小心過夜”云云,自天津以北,白沙平鋪,一望無際,曠野無草,五穀不生,人煙鮮少,即曹操征烏丸時,遣其將,自洱沱河入路沙,路沙即此地也.

맑았습니다.

큰바람이 불어 모래 섞인 먼지가 하늘에 가득하여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순풍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 요아도구(要兒渡口), 하마두(下馬頭), 납초청(納廳), 천비묘(天妃廟), 중마두(中馬頭), 거영아(車榮兒), 상마두(上馬U), 하서무(河西務), 토문루(土門樓), 엽청점(葉靑店), 왕가파도구(王家木混渡口), 노가오(魯家烏), 반증구(攀繪口)를 지나서 소가림리(蕭家林里) 앞 강가의 건너편 언덕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신의 배와 서로 마주보고 있는 곳에 10여 인이 위에 지붕을 얹은 뗏목을 타고 와서 대었습니다.

도적이 와서 겁탈하니 뗏목을 탄 사람도 또한 건장한 자라서 서로 치고 때렸습니다.

진훤은, “도적이 멋대로 때리고 빼앗기를 이와 같이 하니, 당신의 무리에 게 분부하여 각자가 경계하도록 하고 조심스럽게 밤을 지내도록 하십시오"라 운운하였습니다.

천진위(天津衛)로부터 북쪽은 고르게 깔린 흰모래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빈 들판에 풀이 없고 오곡(五穀)이 자라지 않았으며 인가가 드물었습니다.

조조(曹操)가 오환(烏丸)을 정벌할 때 그 장수를 보내어 호타하(滹沱河)로부터 노사(路沙)로 들어가게 했었는데 노사가 곧 이곳이었습니다.

26th Day. Fair. High winds; dust and sand filled the sky, and we could not open our eyes.

[We went from Yao-erh-tu-k’ou to Hsiao-chia-lin Village and stopped there.] In the place across from my boat were more than ten men on rafts that had shelters on top of them. They, too, had come and stopped. Bandits came to rob them, but the men on the boats were also strong and fought back. Ch’en Hsüan said, “That is how outrageously the bandits beat people and rob them. You had better warn your people to be on guard, and let us pass the night cautiously.” From T’ien-chin Garrison north, white sand lay flat as far as the eye could see. There was no grass in the waste land. The five grains did not grow, and settlements were few and far apart. When Ts’ao Ts’ao subjugated the Wu-wan, he sent his generals from Hu-t'o River into Lu-sha. Lu-sha was that place.1

3월 27일

二十七日,晴大風,平明至和合驟,又過縣,縣治在河之東岸,馬頭巡檢司、崔氏園亭在其中,至此沙堆高大,如丘陵然,又過火燒屯、公雞店、李二寺、長店兒、大通關、渾河口、土橋巡檢司,至張家灣,即諸路貢賦、朝貢、商賈之船之所集處也.

맑고 큰바람이 불었습니다.

해뜰 무렵 화합역(和合驛)에 이르고 다시 곽현(鄕縣)을 지났는데, 현치(縣治)는 강의 동쪽 언덕에 있었습니다.

마두순검사(馬頭巡檢司)와 최씨원정(崔氏園亭)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이곳에 이르니 모래더미가 높고 커서 구릉과 같았습니다.

또 화소둔(火燒屯), 공계점(公雞店), 이이사(李二寺),장점아(長店兒), 대통관(大通關), 혼하구(河口), 토교순검사(土橋巡檢司)를 지나서 장가만(張家灣, 장씨성을 가진 만호가 여기에 살아서 생긴 이름)[1]에 이르니, 곧 여러 로(路)의 공부(貢賦)와 조공(朝貢) 그리고 상고(商賈) 등의 배가 모여드는 곳이었습니다.

27th Day. Fair. High winds.

[We went from Ho-ho Station to Chang-chia Bay,] which was the place at which the tax, tribute, and merchant boats from everywhere assembled.

3월 28일

二十八日,至北京玉河館,是日晴,舍舟乘聽,過東嶽廟、東關鋪,至路河水馬驛,一名通津疇,中門大書寰宇通衢,驛西有遞運所,西北有通州舊城,通路亭在城之東南,東抱白河,白河一名白遼河,或謂之東路河,臣等步入城之東門,過族表田拱尚義門、大運中倉門、進士門,出舊城西門,又過新城第一鋪、大運西倉門、玄靈觀,又出新城西門,城與舊城相接,通州卽秦之上谷郡也,今轄于順天府,州治之南,有通州衛左衛·右衛、定邊衛、神武中衛,臣等於新城西門外,乘聽過永濟寺、廣惠寺,至崇文橋,橋在北京城門之外,楊旺與李寬、唐敬、夏斌、杜玉等,引臣等步入皇城東南崇文門,行至會同館,京師乃四夷所朝貢之地,會同本館之外,又建別館,謂之會同館,臣等所寓之館,在玉河之南,故亦號為玉河館,

북경의 옥하관(玉河館)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배를 놓아두고 당나귀를 타고 동악묘(東岳廟), 동관포(東關鋪)를 지나서 통진역(通津驛)이라고도 하는 노하수마역(路河水馬驛)에 이르니 중문(中門)에 '환우통구(豪宇通衢)'[1][2]라고 크게 씌어 있었습니다.

역 서쪽에는 체운소(遞運所)가 있고 서북쪽에는 통주(通州)의 옛 성이 있었습니다.

통로정(通路亭)은 성 동남쪽에 있었으며 동쪽으로 백하(白河)가 감아 돌아 흐르고 있었는데, 백하는 일명 '백수하(白遂河)'라고도 하고 '동로하(東路河)'라고도 불렀습니다.

신 등이 걸어서 성의 동문으로 들어가서 정표전공상의문(佐表田拱尙義門), 대운중창문(大運中倉門), 진사문(進士門)을 지나서 구성(舊城)의 서문으로 나오고, 또 신성제일포(新城第一鋪), 대운서창문(大運西倉門), 현령관(玄靈觀)을 지나서 또 신성(新城)의 서문으로 나오니, 신성은 구성과 서로 잇닿아 있었습니다.

통주는 곧 진(秦)의 상곡군(上谷郡)으로 지금은 순천부(順天府) 소속이었습니다.

주치(州治)의 남쪽에 통주위(通州衛), 좌위(左衛), 우위(右衛), 정변위(定邊衛), 신무중위(神武中衛)가 있었습니다.

신 등은 신성의 서문 밖에서 당나귀를 타고 영제사(永濟寺), 광혜사(廣惠寺)를 지나서 숭문교(景文橋)에 이르니, 숭문교는 북경 성문 밖에 있었습니다.

양왕(楊旺)은 이관(李寬), 당경(唐敬), 하빈(夏斌), 두옥(杜玉) 등과 함께 신 등을 인도하여 걸어서 황성(皇城) 동남쪽에 있는 숭문문(崇文門, 지금의 동교민항(東交民巷))으로 들어가 회동관(會同館)[3]에 이르렀습니다.

경사는 곧 사이(四夷)가 조공하는 곳이므로, 회동본관 이외에 또 별관을 세워서 회동관이라 불렀습니다.

신 등이 머문 관사는 옥하(玉河)의 남쪽에 있었던 까닭에 '옥하관'[4]이라고도 불렀습니다.

28th Day. Arrival at Jade River House [Yü-ho-kuan], Peking. This day was fair.

[We left the boats and, at first riding donkeys and later walking, went from Tung-yüeh Shrine through T’ung-chou.] T’ung-chou was Shang-ku-chün of Ch’in. Now it is under Shun-t’ien Prefecture. South of the department headquarters are T’ung-chou Garrison, Left Garrison, Right Garrison, Ting-pien Garrison, and Shen-wu Center Garrison. Outside the west gate of the new wall we got on donkeys and passed Yungchi Temple and Kuang-hui Temple and came to Ch’ung-wen Bridge. The bridge was outside the gates of Peking. Yang Wang, Li K’uan, T’ang Ching, Hsia Pin and Tu Yü led us on foot through the Imperial City Southeast Ch’ung-wen Gate and to the Central Post Hotel [Hui-tung-kuan]. The capital was the place to which tribute was brought by the Four Barbarians; [consequently], in addition to the Main Building of the Central Post Hotel, an annex had also been built and called Central Post Hotel. That building, in which we were lodged, was also called Jade River House, because it was south of the Jade River.

3월 29일

二十九日,兵部,是日晴,楊旺引臣等出玉河館門,顧見東衢有橋,橋兩傍建門,扁玉河橋,步由西衢,過上林(院)(苑」監100、南薰坊鋪、大盤院、欽天監、鴻爐寺、工部,至兵部,有尚書余子俊坐一廳,左侍郎姓何、右侍郎姓阮,對坐一廳,郎中二員、主事官員,連坐一廳,臣等先調侍郎,次調尚書,然後請郎中、主事官廳,郎中等不復問臣以漂來事,指庭中槐陰為題,今做絕句,又以渡海為題,令做唐律,又有職方清吏司郎中戴豪,引臣至廳上,廳壁掛天下地圖,臣所經之地,一見瞭然,郎中等指謂臣曰:“你發自何地,泊于何地?”臣以手指其漂舟之地、所歷之海、所泊之

p.428 清,海路正經于大琉球國之北,戴郎中曰:“你見琉球地乎?”臣曰:“我漂白海之中,遇西北風南下,望見山樣在有無中,且有人煙之氣,恐是琉球界也, 然未可知.”又問曰:“你所帶來人有死亡者乎?”臣曰:“我四十三人,頁皇恩如海,皆得保性命而來,”又問曰:“你國治喪,用文公《家禮》否?”臣曰:“我 國人生子,先教以《小學》、《家禮》,科學亦取精通者,及其治喪居家,一皆遵之,”又問:“你國王好書否?”臣曰:“我 王一日四接儒臣,好學不厭,樂取諸人.”問畢,饋臣餅茶,唐敬引臣等還玉河館,夕,有姓名何旺者,頗解我國言,來謂臣:“你國貿册封使安宰相處良等二十四人來此館,留四十餘日,今三月二十二日還程”云云,臣嘆其不得相見,何旺曰:“你亦還 國, 何嘆之甚?” 臣曰:“憔悴他鄉,四顧無親,若見本國人,則如見父兄,且父新死母當喪,弟又少不更事,家又資寞,不保朝夕之際,我適漂海,其存其沒,家莫聞知,徒以為鯨濤鼓天,滄海無涯,必見臭載,葬身魚腹,以資奠之家,治重疊之要,其老母弱弟之痛為如何也?我若得遇安令公之行,一時還鄉,則得免道路之虞,若不得同歸,他先歸國,好傳吾消息,則可以少舒母弟之痛,天不恤我,只隔七日間,不得相見本國之使,胡可不自痛恨也?”

병부(兵部)에 이르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양왕이 신 등을 안내하여 옥하관 문을 나오니 동쪽 거리에 다리가 보였습니다.

다리 양쪽 가에는 문을 세웠는데 '옥하교(玉河橋)'라는 편액이 달려 있었습니다.

서쪽 거리로 걸어서 상림원감(上林苑監), 남훈방포(南薰坊鋪), 태의원(太醫院), 흠천감(欽天監), 홍려시(鴻__寺), 공부(工部)'를 지나 병부에 이르렀습니다.

상서(尙書) 여자준(余子俊)이 한 청사에 앉아 있고, 하(何) 좌시랑(左侍郞)과 완() 우시랑(右侍郞)이 다른 청사에 마주앉아 있으며, 낭중(郞中) 2인과 주사관(主事官) 4인[1][2]은 또 다른 청사에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신 등이 시랑을 먼저 뵙고, 다음에 상서를 뵙고 난 뒤에 낭중과 주사관이 있는 청사로 갔습니다.[3]

낭중 등은 신에게 표류해 온 일에 대해서는 다시 묻지는 않고, 뜰 안의 홰나무[4][5] 그늘을 가리키며 시제(詩題)를 삼고는 절구(絶句)를 짓도록 하고, 또 도해(渡海)로써 시제를 삼고는 당률(唐律)을 짓도록 하였습니다.[6]

또 직방청리사(職方淸吏司)의 낭중 대호(戴豪)의 안내에 따라 대청 위에 이르렀는데, 청사 벽에 천하의 지도가 걸려 있어 신이 지나온 지역이 한 눈에 환히 보였습니다. 직방청리사주사였던 원황 [7]

낭중 등은 지도를 가리키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어디에서 출발하여 어디에 정박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손으로 배가 표류하기 시작한 땅과 지나온 바다와 정박했던 섬을 가리켰습니다.

가리킨 해로(海路)가 대유구국(大琉球國)의 북쪽을 지나고 있을 때 대(戴) 낭중이 말하기를, “유구 지방을 보았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내가 표류하여 백해(白海)로 들어가 서북풍을 만나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멀리 보니 산 모양이 보일락말락 했고 또 인가의 기색이 있어 유구의 땅인 듯했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데리고 온 사람 중에 죽은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43인은 바다와 같은 황제의 은혜를 입어서 모두 목숨을 보전하여 올 수 있었습니다.”

“당신 나라에서 초상을 치를 적엔 주문공의 《가례》를 씁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들을 낳으면 먼저 《소학(小學)》과 《가례》를 가르치고, 과거(科擧)에서도 또한 이에 정통한 사람을 뽑으며, 초상을 치를 때나 일상생활에서 한결같이 《가례》를 따릅니다.”

“당신의 국왕은 글 읽기를 좋아합니까?”

“우리 국왕은 하루에 네 번 유신(儒臣) 을 접견하고, 배우기를 즐겨하여 싫증을 내지 않으며 남의 장점을 취하기를 좋아하십니다.”

다 묻고 나서는 신에게 떡과 차를 대접하였습니다. 당경이 신 등을 인도하여 옥하관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녁에 우리말을 제법 할 줄 아는 하왕(何旺)이란 사람이 신에게,

“당신 나라의 하책봉사(賀冊封使)인 안처량(安處良) 재상(宰相)[8] 등 24인이 이 옥하관에서 40여 일을 머물다가 이 달 3월 22일에 돌아갔습니다”라 운운하였습니다.[9]

신은 그들과 서로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습니다.

하왕이 말하기를,

“당신도 본국으로 돌아갈 것인데, 어찌 그리 심히 한탄하십니까?"라고 하였습니다. 타향에서 고생에 시달려 초췌해지고 사고무친의 처지에 본국 사람을 만난다면 마치 부형을 만난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아버지가 갓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상사(喪事)를 치러야 하는데 아우는 어려서 경험이 부족하고, 집안은 또한 가난하여 조석(朝夕)도 보전하지 못하는 마당에 내가 바다에 표류되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집에서는 알 수 없을 터인데, 다만 하늘에 솟구치는 큰 파도와 가이없는 푸른 바다 속에서 배가 뒤집혀 필시 물고기 밥이 되었을 줄로 여길 것입니다. 가난한 집에서 거듭되는 상사를 치르게 되었으니 늙은 어머니와 어린 아우의 비통함이 어떻겠습니까? 내가 만약 안(安) 영공(令公)의 행차를 만나서 같이 고향에 돌아갔다면 길에서 생기는 근심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며, 만약 함께 돌아가지 못하였더라도 그가 먼저 본국에 돌아가서 내 소식을 잘 전해 준다면 내 어머니와 아우의 아픔을 조금 덜어줄 수 있을 것인데, 하늘이 나를 돌보지 않아 겨우 7일이 어긋나 본국 사신을 만나지 못하게 되었으니 어찌 크게 한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29th Day. Going to the Ministry of War. This day was fair.

Yang Wang took us outside the gate of Jade River House. Over our shoulders we saw that on East Street there was a bridge, on both sides of which gates had been built. A plaque said, “Jade River Bridge.” We walked along West Street past the Directorate of Imperial Parks, Nan-hsün Ward Stop, Imperial Academy of Medicine, Directorate of Astronomy, Court of State Ceremonial, and the Ministry of Works and came to the Ministry of War. Yü Tzu-chün, the Minister, was there, sitting in one hall. Left Vice-Minister Ho and Right Vice-Minister Yüan were sitting in a hall across from him.2 Two Senior Secretaries and four Administrative Secretaries were sitting in a row in another hall. First we went to the Vice Ministers, next to the Minister, and afterwards to the hall of the Senior and Administrative Secretaries. The Senior Secretaries and the others did not question me again on my drifting there. They pointed to the shadow of a Japan pagoda tree (huai) in the garden and ordered me to write a quatrain (chüeh-chü) on that subject. Then they ordered me to write an eight-line poem in the T’ang style on the subject “Crossing the Sea.” Tai Hao, Senior Secretary for the Bureau of Maps,3 took me up into the hall, on a wall of which a map of the Empire was hung. The places through which I had passed were clear at a glance. The Senior Secretary pointed at it and said to me, “Where did you start and where did you land?” I pointed out the place where the boat had gone adrift, the sea through which we had passed, and the island on which we had landed. Our course passed directly north of Great Ryukyu. Senior Secretary Tai said, “Did you see Ryukyuan land?” I said, “While drifting in the white sea, we met a northwest wind and went south. We saw vague mountainous shapes, and there was also an aura of settlement. I suspected that it was the shore of Ryukyu, but still I do not know.” He asked, “Did any of the men who accompanied you die?” I said, “All forty-three of my men, trusting to an Imperial benevolence as great as the sea, kept alive.” He asked, “When you observe mourning in your country, do you use Wen Kung's Chia li?”. I said, “When my countrymen have children, they first teach them from the Hsiao hsuëh and Chia li. Even in the examinations, we choose those wellversed in it. It governs our mourning, and everyone follows it in daily life.” He asked, “Does the King of your country like books?”. I said, “Our King receives the Confucian ministers four times a day. He never grows tired of learning, and he likes to select worthy scholars. 4 When all had stopped asking questions, they served me tea and cakes. T'ang Ching took us back to Jade River House. In the evening one Ho Wang, who understood our language somewhat, came and said to me, “Prime Minister An Ch’ð-ryang, an Envoy of Congratulations, and twenty-three men from your country came to this guest house and stayed more than forty days. They set out to return on the 22nd Day, Third Month.”5 I expressed sorrow that we had not met. Ho Wang said, “You will return to your country, too. Why do you grieve so much?” I said, “I am suffering abroad, with no relatives anywhere around me. If I should see someone from my own country, it would be like seeing my father or elder brother. My father, moreover, has died recently, and my mother is in mourning. My younger brother is young and inexperienced. The family is poor and insecure from morning to night. “I drifted out to sea, and whether I am dead or alive my family have not heard. They can only assume that in the mountainous, heaven-shaking waves of the great, endless sea, I must have blackened my name and buried myself in a fish's belly. My poor family will be observing double mourning. How great must be the grief of my old mother and weak, little brother! “If I had met His Excellency An's party and returned home at the same time as he, I should have avoided mishaps on the road. If I had not returned with him but he had gone home first and kindly delivered word of me, it would have been possible to mitigate a little my mother's and younger brother's grief. Heaven has no pity on me; I have missed meeting an envoy from my own country by only seven days. How can I not have deep regret?”

2월 28일

二十八日,陰大風,擋丹逆風清河口,過三汉淺鋪,又__白洋河,夜半至泊河岸,地名不知.

흐리고 큰바람이 불었습니다.

배를 끌어 바람을 맞받으면서 청하구(淸河口)를 거슬러 올라가 삼차천포(三叉淺鋪)를 지났습니다.

또 백양하(白洋河)를 거슬러 올라가 밤중에 강가에 정박했는데, 지명은 알 수 없었습니다.

28th Day. Cloudy. [We went past Ch’ing-ho-k’ou, up the Pai-yang River and beyond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