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규와 한국근대교육자료 디지털 큐레이셔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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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 Choi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11월 17일 (일) 23:1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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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3.1)운동시기

문 그대는 금번의 조선독립운동에 관하여 금년 2월 이후 동지들과 밀회하며 계획한 사실이 있다는데 어떠한가.

답 그렇다. 계획하는 밀회에 참석한 사실이 있다.

시기

최초에 2월 20일경

장소

金智煥으로부터 상의가 있으니 開城 북부예배당으로 회의에 참석하여 달라고 하여서 그날 밤에 예배당으로 갔던 바,

인물

그때 모인 자는 金智煥·姜助遠·申公良·李康來·盧在明·吳鎭世·崔重淳·朴容夏 등이었는데,

내용

金智煥은 회동한 석상에서 이번 京城에서 한국의 독립운동 계획을 하고, 오는 3월 1일을 기하여 조선 각도에 걸쳐서 일제히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고, 동시에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되어 있으므로 더욱 開城에서도 위 선언서를 배부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여서 그 일에 관하여 타합을 하였다. 金智煥은 목사인 姜助遠에 대하여 교회의 예배당에서 자기와 그와 두사람이 배부를 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계속하여 운동을 하기로 하면 어떤가 하고 물었던 바 姜助遠은 사안이 교회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일반인에 대한 문제인 만큼 예배당에서 배부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하며 동의를 하지 않았으며 또 자기들도 도저히 운동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으므로 독립의 취지는 찬성하겠으나 계속하여 운동의 책무를 맡는 것은 하지 못하겠다고 주장하여 회동한 자 일동도 그들과 같은 의견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결정은 하등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서 해산하였다. 그리고 그날밤 金智煥이었는가 姜助遠이 독립운동의 계획에 관하여 의심을 품고 있는 것 같았으므로 나의 말을 의심한다면 京城에 가서 吳華英을 만나서 물어보라고 말하였으며 姜助遠도 한편은 吳華英에게 물어보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시기

2월 28일 밤

장소

남부예배당에 모여 달라고 부탁하여 왔으므로 갔더니

인물

그날밤의 회동한 사람은 申公良·李康來·吳鎭世·崔重淳·朴容夏·孫金聲·崔南奎 등이었다.

내용

처음에 姜助遠은 나에 대하여 동인의 집까지 와 달라는 서면을 보내 왔으므로 동인의 집으로 갔던 바 동인은 京城의 吳華英으로부터 독립선언서 80매를 보내왔다고 하면서 그 선언서와 吳華英으로부터 姜助遠 앞으로 보내온 편지를 보여주므로 그것을 한번 훑어보았더니 지난번에 말을 하여둔 바와 같이 독립선언서를 보내겠으나 開城에서는 너무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선언서도 조금만 보내겠으니 적절히 배부하여 달라, 그리고 또 선언서의 배분뿐만 아니라 지난번 말을 하여둔 동지의 서명 날인을 될 수 있는대로 많이 받아 달라는 의미의 편지이었으며, 그에 의하면 姜助遠이 京城의 吳華英을 찾아가서 선언서의 배부와 동지의 서명 날인을 받는 일에 관하여 이미 吳華英과 타합을 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동지의 서명 날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 이전에 吳華英이 또 開城에 왔을 때 대표자의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내기로 되어 있으므로 만약에 그 대표자가 체포되었을 경우에는 많은 동지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서명날인을 받기로 한 것이어서 그 사실을 다시 姜助遠에 부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吳華英이 開城에서 위 서명날인에 관하여 이야기 한 것을 盧在明으로부터 전하여 들었다. 나는 위 吳華英의 편지를 읽어보고 즉시 姜助遠으로부터 선언서 배부에 관하여 지금부터 남부예배당으로 와 달라는 것이었으므로 동인과 함께 회의에 참석하였는데 그 석상에서 姜助遠은 이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선언서를 배부하여 주면 좋겠다고 의견을 말하였으나 회의에 모인 사람들은 누구하나 말하지 않고 그것을 배부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姜助遠은 그렇다면 배부를 보류하는 수밖에 없다 하며 申公良을 향하여 독립선언서를 그대의 집에 맡아 두어 달라고 말하자 동인은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당신의 집에 두는 것이 안전하고 좋지 않으냐고 하여서 姜助遠은 자기집에 둘 수도 없으므로 차라리 북부예배당에 두면 어떠하냐고 일동에 물었으므로 우리들은 예배당에 두는 것은 그대의 마음대로 하라고 대답하고 결국 예배당에 감추어 두기로 결정하는 수밖에 다른 결정을 내림이 없이 해산하였다.

엇갈리는 진술

  • 이만규가 대정 8년 5월 1일에 한 진술

문 그대는 姜助遠이 선언서를 보여 줄 때에 몇 매인가를 받지 않았는가.

답 그렇다. 나는 한 장을 얻었다.

  • 강조원이 대정 8년 4월 24일에 한 진술

선언서가 왔으므로 李萬珪를 부르러 보냈고, 그것을 보여 주었더니 李萬珪는 京城에서 보내온 것 전부 중에서 매수는 알 수 없으나 가지고 갔고 나에게 나머지를 준 것이다.



  • 이만규가 대정 8년 5월 1일에 한 진술

문 3월3일에 好壽敦女學校 생도가 시위운동을 한 사실은 그대가 알고 있는가.

답 그렇다.

문 그 다음날 그대는 松都고등보통학교 재학생에 대하여 동교의 식당에서 운동을 하도록 선동한 사실이 있지 않은가.

답 아니다. 선동한 사실없다.

문 그러나 호수돈 여학교 학생이 한때 체포되었다가 망명된 사실이 있으니 이제부터는 충분한 각오를 가지고 운동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대 학교의 재학생들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가.

답 아니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문 그러나 4일에는 그대 학교의 재학생이 주동자가 되어서 운동을 하지 않았는가.

답 그렇다.

문 어찌하여 학생이 솔선하여 운동을 하였는가.

답 그것은 京城으로부터 학생이 와서 학생들을 선동하였다고 생각된다.

문 그러나 그대의 학교 학생들은 그대로부터 선동을 받았다고 진술하는데 어떠한가.

답 나는 절대로 선동하지 않았다.

문 京城의 학생이 중심이 되어서 각지의 학생과 연락을 취하고 맹렬히 운동하고 있는 상황을 학생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답 그렇다. 그것은 운동이 폭발한 후에 이야기한 사실은 있으나 선동의 의미로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독립에 대한 의견

문 그대는 전부터 독립을 희망하는가.

답 나는 평소에 그와 같은 희망을 갖지 않았으며 이번 吳華英 등으로부터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독립이 된다면 독립을 하였으면 하는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그후 도저히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그 희망을 포기하였다.[1]

李萬珪에 관한 수사보고

대정 8년 4월 10일

순사부장 水野憲

개성경찰서장 귀하

독립운동선동자에 관한 건

출생지 江原道 原州郡 地正面 艮峴里

본적 開城郡 松都面 高麗町

주소 開城郡 松都面 高麗町

私立松都高等普通學校 교사

李萬珪

당 31세

위 사람은 금년 3월 3일 李太王 전하의 국장이 있던 당일 이래로 당 지방에서의 학생(남녀)기타의 독립운동 소요사건의 선동을 한 주모자로 인정되어서 명령에 의하여 각 視察係를 독려하여 査察 中에 있던 바, 본인은 私立松都고등보통학교의 부교장으로서 교장인 미국인「왓손」의 깊은 신뢰를 받고, 동교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자로서 항상 江原道 原州郡의 출신자인 貞和女學校 교사 李康來, 高麗病院主 李昌雨 및 好壽敦女子고등보통학교 서기 申公良 등과 친밀히 교제를 하고, 본인의 일거일동은 즉시 전교생도를 좌우하는 신망이 있다.

소요사건 폭발 전에 선언서에 서명한 자 吳華英(남감리파 목사로서 여름에 당지의 전도를 담당한 일이 있는 자)가 독립운동을 획책하기 위하여 금년 2월 22일 開城에 와서 金智煥(남부예배당 전도사로서 소요피고사건에 관하여 현재 입감 중인 자), 李敬重, 李康來, 吳鎭世, 申公良과 밀의를 하고, 24일 松都고등보통학교에서 전교 생도에 대하여 克己라는 제목으로 몹시 과격한 강연을(내용은 분명하지 않다) 하고, 막 京城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에 吳華英은 비밀로 타인을 멀리하고 李萬珪의 집에 들러서 비밀회의를 한 사실이 있다. 생도들이 소요를 이르키는데 즈음하여 일본인 교사 太田代次郞은 교장에게 주의할 것을 진언하여 직원회를 개최하고 무마시킬 방법을 협의하기 전에 일반 교사(조선사람)에 향하여 제군들은 孫秉熙 이하 30여 명이 서명하여 발표한 선언서와 같이 조선의 독립에 관하여 찬부의 의견을 물었던 바, 李萬珪는 다른 사람보다 제일 먼저 말하기를 물론 독립은 찬성하며 희망하나 생도들의 망동은 제지하여야 할 것으로서 그 의사를 발표하여 일반 교사로 하여금 이에 부화뇌동하게 한 상태이다.

소요를 선동한 관계인 忠橋예배당 담임목사 姜助遠을 취조한 결과 2월 28일경에 京城 吳華英으로부터 선언서 약 百매를 송부하여 왔으므로 李萬珪를 통하여 그 중 약 반으로 짐작되는 매수를 李萬珪에 주고, 나머지를 申公良에게 건네주었다는 진술이 있었다.

이상과 같은 상황으로서 본인은 당 지방에 있어서의 남녀학생들에게 소요하도록 선동을 한 주모자로 인정되므로 이를 보고합니다.[2]


출처

  1.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15 15권 三一運動 V > 三ㆍ一 獨立示威 關聯者 訊問調書(檢事調書)(國漢文) > 李萬珪 신문조서 보안법 위반사건에 관하여 대정 8년 5월 1일 경성지방법원 개성지청 검사분국에서 朝鮮總督府 검사 川崎爲三 朝鮮總督府 裁判所 서기 木村正治 열석하고 검사는 피고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신문하다.]
  2.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13 13권 三一運動 III > 三ㆍ一 獨立宣言 關聯者 訊問調書(일반 시위자 조서)(國漢文) > 李萬珪에 관한 수사보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