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극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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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fs이채영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6월 23일 (일) 01:3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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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의 국어학자이자 북한의 정치인

내용

인물정보

[2]

  • 이극로는 어문학자로서 일제 치하에서 민족 어문운동을 주도하여 한글 보급과 민족 정신 고취를 위해 일생을 바쳤다.
  • 이극로는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 출신으로 글을 배울 가정형편이 못되어 어릴적에 주경야독으로 공부하다가 한말 국가 위기 상황에서 국권회복과 실력양성을 위해 신문물 수용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고향을 떠나 마산의 창신학교에 입학했다.
  • 1912년 4월 고국을 떠나 서[1]로 망명길에 올랐다. 1912년 중국 동북지방 내도산의 독립군 부대 훈련도감, 무송의 백산 학교와 환인현의 동창 학교에서 교육하였다. 이 여정에서 한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값진 경험을 하게 되었다.
  • 이극로는 1922년 4월 베를린 대학 철학부에 입학하여 5년간 정치학과 경제학을 주과로 삼고, 철학과 인류학을 부과로 하여 폭넓은 영역의 학문을 두루 섭렵하였다.
  • 이극로는 대한민국의 안과의사인 공병우세벌식과도 약간 관련이 있는데, 이극로가 눈병으로 공병우가 운영하는 병원에 찾아왔었다고 한다. 여기서 공병우는 한글학자 이극로에 대한 열정에 자극을 받아 공병우는 본격적으로 한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3]
  • 사후에 조국통일상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그가 '월북자'였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학계 관심이 멀어졌었다. 그러나, 최근 이극로가 1920년대 독일에서 유학했을 시절 한글을 보급했다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다시 재조명을 받아 주목받고 있다. [4]

한글연구활동

  • 이극로는 독일 유학시절 베를린대학에 조선어 강좌를 개설하여 강사로 재직하면서 한글 사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 빈곤한 생활을 했음에도 유학생활로 배움을 거듭하여 조선어학회에서 큰 일을 해낼 수 있었던 뒤엔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선생(1885-1943)의 도움이 있었다.

[5]

  • 이극로는 귀국하여 한글 연구와 보급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를 추구하는 조선어 연구회에 가입하였다.조선어학회는 어문 운동의 첫 결실로서 1933년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제정 발표하고 1936년에는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완성하였다.
  • 이극로는 해방 뒤 출옥 후 조선어학회를 재건, 조선말 교과서 편찬, 국어 강습회 조직 등의 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6]

조선어학회사건

정치인 이극로

  • 1948년 4월 남한만의 단독선거 실시에 반대하여 이극로는 김구, 김규식, 김원봉 등과 통일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남북 제(諸)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 협상이 실패하자 홍명희 등과 함께 북한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극로는 1974년까지 조선 통일 민주주의 민족전선 의장단으로 활동하였다. [8]
  • 이극로는 '좌익'계열 인물이 아닌 중도우파 성향의 노선을 견지했던 한글학자였다.'는 시각도 있다.[9]

어록

"이리 뛰고 저리 뛰나 단돈 몇 푼 주는 이 없다.

나의 집에도 재산이라고는 무엇이 있겠는가. 생각하던 끝에 모스크바에서 리동휘가 기념으로 준

망원경과 사진기가 있었는데 그것을 한 벌의 양복과 함께 안국동 환정 왜놈 전당포에 가져다 잡히고

10원의 돈을 구하여 그 달은 기근을 면하게 되었다.


또 새날이 온다.


몇 벌 안 되는 옷들이 전당포에 들어갔다왔다 하기를 몇 차례 거듭하였더니

나중에는 옷 찾을 돈마저 없어 전당포에 아주 들어가고 말았다.

또 그 밖의 재산으로는 내가 결혼 당시에 형님들이 해주신 금반지, 비녀, 금귀이개가 있었다.

나는 차마 입 밖에 내기 어려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안 되게 되었다.

하루는 안해(아내)에게 '사업에서 대단히 재정 곤란을 가져와 회원들이 굶고 있으니

그 물건을 팔면 1백∼2백 원은 될 것이다, 일시적이나마 이 위국을 면케 해주어야지 어떻게 하겠는가,

내가 지금하는 사업이 성공만 하면 당신 열손가락에 금반지, 보석반지를 다 끼워주겠다'고 우스운 말을 하면서

면구스러운 마음을 감추려고 하기까지 하였다.

안해는 서슴없이 그의 언니에게 부탁하여 팔게 되니 돈 250원이 되었다.

그럭저럭 그 해도 지나갔다."


- 이극로 자서전 中 조선어편찬회 재정악화 당시의 기록 -[10]


멀티미디어

이미지

이극로3.jpg

▲이극로 선생 가족사진(부인 김공순 여사와 자녀들,1939년) [11]

이극로2.jpg

▲국립한글박물관, 이극로 관련 영상 [12]

동영상

참고문헌

기여

주석

  1. 네이버지식백과
  2. 향토문화전자대전
  3. 위키백과 이극로
  4. 위키백과 이극로
  5. 네이버블로그
  6. 향토문화전자대전 이극로
  7. 향토문화전자대전 이극로
  8. 향토문화전자대전
  9. 위키백과 이극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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