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흥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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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한국어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을 붙였다.[1]


영어

Yongheunggung was the residence where King Cheoljong (r. 1849-1863), the 25th king of the Joseon dynasty, once lived. He lived here because his family had been exiled to Ganghwa due to his brother's involvement in treason in 1844. When the preceding king, Heonjong (r. 1834-1849), died without an heir, Cheoljong, a member of the royal Yi family, was selected to become king.

Originally, this was a thatched-roof house. But in 1853, four years after Cheoljong ascended the throne, a local magistrate, Jeong Gi-se (1814-1884), replaced it with new tile-roof buildings and named the house complex "Yongheunggung (龍興宮)," literally meaning “Palace of a Rising Dragon.”[2]

러시아어

Ёнхынгкунг был резиденцией, где когда-то жил император Чольджонг (ок. 1849-1863), 25-й император династии Чосон. Он жил здесь, потому что его семья была выслана на остров Ганхва из-за причастности его брата к измене в 1844 году. Когда предыдущий император Хенджонг (1834-1849), умер без наследника, Чольджонг, член императорской династии Ли, был выбран, чтобы стать императором. Первоначально это был дом с соломенной крышей. Но в 1853 году, через четыре года после восшествия на престол Чольджонга, местный судья Чон Ги-се (1814-1884) заменил его новыми зданиями с черепичной крышей и назвал комплекс домов "Ёнхынгкунг", что буквально означает "Дворец восходящего дракона".

지도

해설

용흥궁

용흥궁은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내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이며, 별전은 정면 6칸, 측면 2칸인 ㄱ자형 집이다. 용흥궁은 창덕궁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3]

철종은 어렸을 때 이름이 원범(元範)이고, 정조(正祖)의 아우인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이며,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이다. 1844년(헌종 10) 회평군(懷平君)의 옥사에 연루되어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어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부로 살았다. 당시 영조(英祖)의 혈손으로는 헌종(憲宗)과 원범 두 사람뿐이었다. 1849년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으로 19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철종

철종(哲宗, 1831∼1863)은 조선 제25대 왕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름은 이변(李昪)이다. 초명은 이원범(李元範)이다. 자는 도승(道升), 호는 대용재(大勇齋)이다. 전계대원군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용성부대부인 염씨이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정조의 손자, 순조(純祖)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 때 나이 19세였다.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부로서, 1844년(헌종 10) 형 회평군의 옥사로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명을 받아 봉영의식(奉迎儀式)을 행한 뒤 6월 8일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졌다. 이어 이튿날인 6월 9일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에서 관례(冠禮)를 행한 뒤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리고 농사짓다가 갑자기 왕이 되었으므로 처음에는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51년(철종 2) 9월에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그 뒤 김문근이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이 되어 왕비의 아버지로서 왕을 돕게 되니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또다시 계속된 셈이었다.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하였다. 정치의 실권은 안동김씨의 일족이 좌우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삼정(三政: 田政·軍政·還穀)의 문란이 더욱 심해지고 탐관오리가 횡행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마침내 농민들은 1862년 봄 진주민란을 시발로 해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이에 철종은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이라는 임시 특별기구를 설치해, 민란의 원인이 된 삼정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한 정책을 세워 시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모든 관료에게는 그 방책을 강구해 올리게 하는 등 민란 수습에 힘썼다. 그러나 뿌리 깊은 세도의 굴레에 얽매여 제대로 정치를 펴 나갈 수 없었다.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 만에 33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수용(睟容: 임금의 畵像) 4본이 천한전(天漢殿)에 봉안되었다.

혈육으로는 궁인 범씨(范氏) 소생의 영혜옹주(永惠翁主)가 있어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에게 출가했을 뿐 후사가 없었다. 시호는 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이다. 묘호는 철종(哲宗)이다. 능호는 예릉(睿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 원당리에 있다.[4]

철종 어진

  • 철종 어진

철종의 31세 초상으로 1861년(철종 12)에 도사(圖寫)된 작품이다. 조선 후기 1861년, 이한철 작으로, 1954년 화재로 일부 소실되었다.

보물 제1492호. 족자, 비단에 채색. 세로 202.3 x 가로 107.2 cm


  • 철종 어진 속 복장

왕의 군복을 입고 있다.

왕의 군복 구성은 전립, 전복, 동다리, 광대, 전대, 로 이루어진다.

시각자료

사진

영상

가상현실

-추후 드론과 파노라마사진을 넣을 곳입니다.


출처

  1.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용흥궁
  2. Heritage Wiki 용흥궁
  3. 인천광역시 강화군청 문화관광 - 용흥궁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철종(哲宗)
  5. 국립고궁박물관
  6.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용흥궁
  7.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용흥궁
  8.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용흥궁
  9.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용흥궁
  10. 인천광역시 강화군청 문화관광 - 용흥궁
  11.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용흥궁
  12.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용흥궁
  13.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용흥궁
  14. 인천광역시 강화군청 문화관광 - 용흥궁
  15. Youtube, 채널A Home, <천일야사>
  16. 네이버tv, 채널A, <천일야사>
  17. 네이버tv, tvN, <알쓸신잡>


기여

일자 역할 이름 전공
2019년 4월 편집 및 정리 김현승 인문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