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 궐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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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조선 전기 문신이자 공자의 64대 손인 공서린(1483∼1541) 선생이 후학지도를 위해 세운 곳으로 지금은 공자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중종 2년(1507) 문과에 급제하고 공조참의, 대사헌 등을 지낸 공서린 선생이 후학을 지도할 때 은행나무에 북을 달아 놓고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깨우쳤는데, 그가 죽자 은행나무도 말라죽었다고 전한다. 그 뒤 정조가 화산에서 바라보니 많은 새들이 슬피 울며 은행나무 곁으로 모여들었고, 이를 괴이하게 여긴 임금이 가까이 가서 보니 죽은 은행나무에서 새싹이 돋고 있었다고 한다.

정조 17년(1792) 이곳을 공자가 살던 노나라의 마을 이름을 따라 궐리로 바꾸고 사당을 세운 후 ‘궐리사’라고 했다.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00년 다시 세우고 1981년 강당을 세웠으며, 1993년 중국 산동성에서 기증 받은 공자의 석고상을 모셨다.

사당은 앞면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동쪽으로는 학문을 배우는 공간인 강당 건물이 있어 동학서묘의 전형적인 서원 건축 양식을 보이고 있다.

논산의 노성 궐리사와 함께 우리나라 2대 궐리사로서 조선 후기 사당형식을 잘 보여 주는 곳이며, 해마다 지방 유림들이 모여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1]

정조의 오산 궐리사를 복설과 공자 후손의 등용

정조는 1791년까지만 해도 “마땅히 360군현이 모두 공자를 제사하는 장소(향교)가 있는데 어찌 유독 니성(尼城)에 별도의 사우를 교궁(校宮) 밖에 설립하였는가? 교화가 이르지 않고 풍속이 바르지 않아서이다.”라고 할 만큼 지방에 향교 외의 별도의 공간에서 석전제향(釋奠祭享)을 올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정조의 입장은 다음 해 수원부에서 공씨(孔氏) 집성촌을 확인하고, 더구나 기묘명현(己卯名賢)이었던 공서린(孔瑞麟, 1483 ~ 1541)이 낙향하여 정착한 곳이라는 사실을 안 뒤 수원에 궐리사를 영건을 허가하는 조치를 내리면서 바뀌게 된다. 정조는 1792년 8월 27일 공자 탄신일을 앞두고 공자의 후손을 찾아 등용하겠다는 뜻을 보이고, 대신과 경재(卿宰), 삼사의 관원들에게 의견을 제출하게 했다. 그리고 청나라의 북경으로 가는 동지사의 서장관을 규장각 각신으로 보내라면서 그로 하여금 공씨 족보(族譜)를 구해오게 하였다.[2]
이때 정조는 공서린의 9대손인 공윤항(孔胤恒, 1769 ~ ?)을 등용하는 것은 물론, 공서린에게 시호를 내리는 것을 염두에 두고 여러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신하들에게 의견을 제출하라고 명하였다.

공씨 후손 등용에 대한 신하들의 헌의 결과 조선에는 공자의 직계파가 없고, 지파(支派)만 있기 때문에 자연히 기묘명현으로 이름난 공서린의 후손을 찾아 녹용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러자 정조는 공서린의 후손이 곤궁한 형편으로 행장(行狀)조차 작성해 내지 못하여 아직껏 시호를 받지 못한 것은 [3]
등용하라는 명이 있은 지 60년이 지나도록 영조(英祖)의 하교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였다.

정조는 그로부터 5일 뒤에 경기감사를 시켜 수원 구정촌(九井村)에 있는 성묘 유지(聖廟遺址)의 도상을 그려 오게 하는 한편, 용인에 있는 공서린의 직계후손을 찾아보게 하였다.[4]
다음 날 예조에서는 공서린의 직계후손 공윤도(孔胤道)가 경상도 선산(善山)에 살고 있는데 시장(諡狀)의 일로 곧 상경할 것이며, 공덕일(孔德一)의 6대손 공윤동(孔胤東)을 통해 직계자손을 확인하였다는 보고를 올렸다. 이에 대해 정조는 우리나라에 온 공씨는 마땅히 공서린을 정통으로 삼아야 하며, 또한 참봉으로 특제된 뒤 불사(不仕)한 공덕일파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 두 파 후손을 즉시 수용하고, 이후에는 양파(兩派) 후손 가운데서 대대로 봉록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또 중국 연성공(衍聖公)[5]
의 세작(世爵)을 모방하여 만일 문관, 무관, 음관 가운데 공씨가 한 명도 없을 경우 양파 가운데서 융통성 있게 처리하여 관직에 등용하라고 명하였다.

1792년 9월 29일 정조는 공서린에게 ‘문헌(文獻)’의 시호를 내린 후 4일 후에는 궐리사를 영건하라는 하교를 내리는데 이미 도상형지(圖像形止)를 살펴본 후 계획을 세워두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정조는 “공씨가 우리나라에 와서 수원에 처음 거처한 것이 읍지(수원읍지)에 실려 있고, 일전에 경기감사에게 도상과 형판을 들이라 하여 보니 과연 기이하게도 궐리의 사우가 있고 은행나무가 있으며, 세거(世居)한 후예가 있었다. 또 궐리에서 수십 리 떨어진 곳에 새로 건립한 영당이 있다.”는 것을 열거하면서 수원에 궐리사를 창건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지시하였다. 그리고 10월 16일에는 초계문신을 직접 시험하는 과강(課講)과 일차(日次) 유생의 전강(殿講)을 실시하여 공윤항에게 급제를 내리고 풍악을 내려 성균관 관원이 그를 인도하여 반궁(泮宮) 한 바퀴를 돌도록 명했다. 이때 공윤항은 『시전(詩傳)』「주남(周南)」편을 외워 순통(純通)을 받았고, 『서전(書傳)』「요전(堯典)」도 줄줄 잘 외웠다. 정조는 양경(兩經)에 합격하면 특별 전교로 급제를 내린다는 율(律)을 적용하여 공윤항을 급제시켰다.


정조의 궐리사 창건을 통한 정치적 의도란?

정조가 공자의 후손이 수원에 거주하고 있는 사실을 인지한 후 시작된 공씨 후손의 녹용과 공서린의 시호 추서, 궐리사 영건 등 일련의 과정을 볼 때 정조는 조선에 들어온 공씨가 수원에 정착하였다는 사실을 부각시켜 수원의 유학적 전통을 진작시키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수원은 전통적으로 무예를 좋아하고 학문하는 사람이 적은 고장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수원을 문무겸전(文武兼全)의 고을로 육성하고, 한편으로는 수원에 공자의 후손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어 은연중에 수원을 조선유학의 본고장으로 만들어 나가고자 하였던 정조의 의도가 강하게 투영된 장소가 바로 현재 오산 궐리사인 것이다.

위치

파빌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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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참고문헌

정해득, 『정조시대 현륭원 조성과 수원』, 「궐리사(闕里祠) 창건과 독산성(禿山城) 수축」, 신구문화사, 2009.

각주

  1.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 『일성록(日省錄)』 정조(正祖) 16년 8월 21일 정해(丁亥), “以先聖後裔錄用事、詢于大臣卿宰三司之臣、仍命赴燕書狀官、以閣臣差遣、求孔氏族譜。” 이날의 기록은 『공성탄신연화(孔聖誕辰筵話)』(奎 5932)라는 별도의 책으로 만들어졌다.
  3. 『일성록』 정조 16년 8월 21일 정해, “ … 昔在先朝甲寅年間、因泮長陳達、故相金興慶、至以爲事、關國運世道、不可不急、先調用爲言、先朝特下給、別料錄用之命、而銓官等因循、至今不爲調用、豈有如許無狀之銓官乎、濟其偏私急於黨、比則無不遂之、慾無不售之事、於是乎流弊至於作威賣權、此所以御極以後、先從此習、必欲痛革、以正禮樂刑政之柄也 … 。”
  4. 上同, “ … 故大司憲孔瑞麟、以先聖後裔兼爲我國名賢、列聖朝崇獎之擧至矣、然而其家人無勢以不得撰狀、尙未延諡、此何異於有錄用之命、而過六十年、迄不收用 … 。”
  5. 공자의 직계 후손에게 내려지던 세습봉호로서 서한(西漢) 평제(平帝) 원시(元始) 1년(서기 1)에 예교(禮敎)를 널리 선양하기 위해 공자의 후예를 포성후(褒成侯)에 봉하면서 시작되었다. 그후 각 왕조를 거치면서 봉호의 명칭과 직위에 조금씩 변화가 있었는데, 송나라 인종(仁宗) 지화(至和) 2년(1055)에 이르러 '연성공'으로 바뀌었고 그것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1935년에 중화민국 정부는 '연성공'의 직위를 취소하고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으로 바꾸었다. 이로 인해 공자의 77대 장손인 공덕성(孔德成)이 마지막 연성공이자 최초의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이 되었는데, 2008년에 그가 죽음으로 인해 '연성공'이라는 작위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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