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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gneung Royal Tomb in Yeongwol is the tomb of King Danjon (1441-1457, reigned 1452-1455, the sixth king of Joseon, who died in exile. The deposed and exiled king was buried secretly. It was only during the reign of King Jungjong when the court began to discuss about holding a proper memorial service for Danjong. Later in 1698 during the reign of Sukjong, Danjong’s title as a king was restored and his tomb was recognized as a royal tomb. Overall, the tomb is simple in style without a stone screen or balustrade.
  
  

2017년 4월 13일 (목) 11:52 판


Jangneung Royal Tomb

Jangneung Royal Tomb in Yeongwol is the tomb of King Danjon (1441-1457, reigned 1452-1455, the sixth king of Joseon, who died in exile. The deposed and exiled king was buried secretly. It was only during the reign of King Jungjong when the court began to discuss about holding a proper memorial service for Danjong. Later in 1698 during the reign of Sukjong, Danjong’s title as a king was restored and his tomb was recognized as a royal tomb. Overall, the tomb is simple in style without a stone screen or balustrade.


위치


가상현실

기본정보

  • 문화재 지정번호: 사적 제196호
  • 소재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

조선 제6대 왕 단종(端宗, 생존:1441-1457, 재위:1452-1455)의 무덤으로,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6호로 지정되었다. 세조(世祖, 재위:1455~1468)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에서 죽음을 당한 후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은 영월의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몰래 수습하여 동을지산 자락에 암장하였다.

오랫동안 묘의 위치조차 알 수 없다가 1541년(중종 36)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이 묘를 찾아내어 묘역을 정비하였고, 1580년(선조 13)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 등을 세웠다. 1681년(숙종 7) 단종은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되고, 1698년(숙종 24) 11월 단종으로 추복되었으며, 능호는 장릉(莊陵)으로 정해졌다.[1]

단종과 세조

장릉(莊陵)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야기 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단종(생존:1441~1457, 재위:1452~1457)과 세조(생존: 1417~1468, 재위:1455~1468)의 관계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용대로, 단종과 세조는 친척지간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친족끼리 왕의 자리 때문에 서로 죽이는 상황까지 벌어진 것일까? 이 상황을 제대로 알려면 당시 단종의 입장과 세조의 입장을 여러 각도에서 고려해 보아야 한다.

단종의 할아버지는 세종(생존: 1397~1450, 재위: 1418~1450), 그리고 아버지는 문종(생존: 1414~1452: 재위: 1450~1452)이다. 보시면 알겠지만 이 혈통라인이 보기 드문 적통직계 라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세종위의 태조(생존:1335~1408, 재위:1392~1408), 정종(생존:1357~1419, 재위:1400~1419), 태종(생존: 1367~1422, 재위:1400~1418) 세종 라인을 보더라도 태종은 태조의 적장자가 아니며 세종 자신도 적장자가 아니라 제3 왕자였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본래 조선은 유교국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세종 이전 시기에는 유교국가의 미덕인 적장자 승계 원칙이 잘 치켜지지 않았다가, 세종 이후로 적장자 승계로 문종에게 다시 적장자인 단종에게 이상적인 승계원칙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학자들이 이 시기를 가리켜 조선의 유교주의 기틀이 완성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즉 단종은 이미 명분 상 세조에 비해서 밀릴 것이 없었고, 심지어 성군인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피를 이었다고 했으니 백성들의 지지도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어린 단종을 보필할 외가 세력들이 전무 했으며, 할아버지가 남긴 아들 들이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였다는 것이다. 세종의 셋째 아들로 문장의 대가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은 이분의 서체가 워낙 유명해서 명나라 황제까지 탐을 낼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세종의 아들 중에 단종과는 악연인 세조(수양대군)도 포함이 된다. 세조의 면을 본다면 많은 사람들이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이미지가 강하며, 특히 김종서를 철퇴로 때려죽인 모습도 있어 무인적 기질이 높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세조는 문장 능력도 뛰어난 문인이었다. 특히 문종, 수양대군(세조), 안평대군 이 3 사람은 세종대왕 시절 각종 문화예술 사업 및 정치 분야 그리고 직책도 맡고 있었다. 단지 안평대군이 워낙 글이나 글씨를 잘 썻고, 문종은 모든 방면에서 뛰어나서 문인적 기질이 형제들에 비해서 가려진 것뿐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무예는 이들 형제들 중에서 으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일개 무인의 능력으로 비교 한 것이지, 실제 문종은 군사전략 측면에서 매우 뛰어난 왕이었다. 특히 조선시대 화기사를 연구한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당시 조선시대 화기는 모두 문종이 고안해 내었다 할 정도로 엄청난 무기연구가였다. 즉 문종은 현대 매체에서 묘사한 것처럼 나약한 이미지의 왕 보다는 문과 무를 겸한 뛰어난 왕이라는 것이다. 문종이 이렇게 비추어진 모습은 짧은 재위년도를 이유라고도 하는데, 대부분 학자들은 이 이유에 동의하지 않고 어머니 소현왕후 심씨가 1447년에 사망하였고, 세종대왕이 1450년에 사망하였으니, 6년동안 장례를 치르느라 과로사 했다고 보고 있다. 심지어 『조선왕조실록』 「문종실록」에서 수양대군(세조)의 관계를 보아도, 수양대군은 문종에게 정치적 위협이 될 만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2] 특히 수양대군이 공격적인 모습을 보인다 하기는 어려우며 오히려 문종의 보호를 받고 있는 모습이 이 기록 이후로 계속 보인다. 즉 문종은 수양대군의 든든한 후견인이었다.

그러므로 문종의 능력을 이어받은 단종도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왕위에 오른 나이는 겨우 12살이였고, 반면에 세종시기부터 탄탄한 정치력을 쌓아온 30대 후반 삼촌을 상대하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그리고 현대의 매체에서는 단종의 모습을 나약하게 묘사하는데 이건 『조선왕조실록』 「단종실록」 이 가지고 있는 문헌 고증의 한계에 있었던 것이다. 단종실록을 보면 수양대군을 세조라 이미 명칭하고 있다. 이것을 다시 반증하면 「단종실록」 자체가 세조시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감히 수양대군이라 명칭하지 못하고 세조로 올려서 기술하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문체는 「단종실록」 「문종실록」을 비교하면 아주 명확하게 들어난다. 즉 「단종실록」에서 정치적 의견이나 대립이 나타날 때마다 세조를 옹호하는 논조로 기술하거나 단종을 아예 노산군(魯山君)으로 기술해 버렸다. 이건 현존 실록에서 왕을 왕자처럼 기술 한 것이다. 반면 「문종실록」을 보면 위와 같은 경우가 일어 날 수가 없다.

결정적으론 단종을 보좌하는 세력의 구심점이 제대로 작동이 안되었다는 것이다. 문종은 죽기 직전 병권을 김종서 정치는 집현전 학자들에게 맡겼다. 사실 문종은 단종의 미래를 걱정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형제인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에게도 부탁을 하였다. 그러나 타의는 아니든 수양대군은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하였고, 안평대군은 집현전 세력과 연합하고, 김종서는 충직한 단종 추종자였다. 그 결과 조정은 3파전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그런데 즉위 직후 김종서와 안평대군이 연합하면서 거대한 당파세력이 이루어진다. 이것은 수양대군 당파를 없애버릴 정도로 위협적 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합당이 이루어지자 오히려 집현전 학자들 중 이런 독자적인 김종서의 행보나, 종친 안평대군의 오만한 모습에 실망하여 일부가 수양대군 일파쪽으로 붙게 된다. 그렇다고 해도 이들 숫자는 소수라 정권은 단종을 지지하는 김종서+안평대군 집단이 차지하게 된다.

이러면서 급해진 쪽은 수양대군이었다. 고금의 역사를 통틀어 신하들 간의 정치적 싸움은 보통 실패하면 사직, 최악은 사형이다. 그러나 대군이라 불리는 왕자들의 입장에서는 정치적 실패는 무조건 죽음이었다. 또한 과거에 중국의 명 건문제(1399~1402)와 명 영락제(1403~1424)의 경우를 보더라도 삼촌이 영락제가 조카인 건문제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를 탈취 하였다. 이런 선례가 과거에 있었기 때문에 수양대군이 이 영향을 받아서 난을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수양대군이 단종이 즉위한지 1년 만에 철퇴를 들고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 몇 명 과 함께 김종서 집으로 가 김종서를 살해 한 것이다. 그것을 필두로 궁 안을 점거하고 자신과 다른 노선에 있는 신하들을 살해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계유정난을 성공시킨 것이다.[3]

그러면 여기서 드는 의문은 왜 김종서와 안평대군 집단이 방비를 안했느냐 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추측이 있지만 제일 타당성 있는 이론은 바로 “수양이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상상을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중국에서도 명 홍희제(1425)가 죽고 선덕제(1426~1435)에 즉위 하였을때는 숙부 한왕이 반란을 일으켜 조카인 선덕제를 죽이려다가 전투에서 패배하고 조카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런 일도 있었고 실제로 김종서와 안평대군은 세종과 문종 시기까지 근거리에서 수양대군을 봐왔고, 약간의 돌출 행동만 했었지, 절 때 문종이나 세종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시 이 둘은 수양대군의 행동에 대해서 오판 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결국 수양대군은 왕위에 올라 세조가 되고, 단종 복위 사건이 일어나자 단종도 살해하기에 이른다.

장릉(莊陵)의 발견 시기 고증

본래 장릉은 “1541년(중종 36)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이 묘를 찾아내어 묘역을 정비하였고, 1580년(선조 13)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 등을 세웠다. 1681년(숙종 7) 단종은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되고, 1698년(숙종 24) 11월 단종으로 추복되었으며, 능호는 장릉(莊陵)으로 정해졌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조사하다보면 한 부분이 사실과 다르다는 부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영월군수 박충원에 대한 내용이다. 박충원(1507~1581)은 중종시기 사람이다. 즉 위 시기에 영월 군수를 했을 수도 있으나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을 들여다보면 이미 1516년(중종 11)에 이미 단종의 묘를 발견 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그리고 당시 발견자는 박충원이 아니라 우승지 신상(申鏛) 이었다.[4] 그리고 박충원에 대해서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을 추적해 보아도 그와 단종의 묘인 장릉에 관한 내용은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러면 이것과 관련하여 보아야 할 인물이 바로 엄흥도인데 엄흥도가 언급되는 기사도 위 기사와 동일한 1516년(중종 11)이다.

그러므로 원래 장릉은 신상이 1516년에 발견하였고 그가 단종 묘 관리에 힘썼으며 훗날 1580년(선조)13에 묘를 정비하였고, 1681년(숙종 7)에 단종을 노산대군으로 승격시키고 1698년(숙종 24)에 장릉으로 정해진 것이다.

장릉에 얽힌 이야기

당시 영월 호장이었던 엄홍도가 한밤중에 몰래 시신을 거두어 산속으로 도망 가다가 노루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곳을 발견하고 그곳에 단종의 시신을 묻었다. 떳떳이 시신을 거둘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좋은 터를 고를 겨를이 없었다. 쫓기는 와중에 마침 노루가 앉았던 터에만 눈이 쌓이지 않았기에 엉겁결에 땅을 파고 시신을 묻었을 뿐인데, 풍수지리가들의 말에 의하면 단종의 묘가 자리 잡은 곳은 천하의 명당이라고 한다.[5]


특징

1. 매년 4월 한식날에 단종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냈는데, 1967년부터는 단종문화제로 이름이 바뀌어서 영월의 대표적인 향토문화제가 되었다. 문화제로서 제향이 거행되는 조선시대 왕릉은 장릉뿐이다.

2. 원래 왕릉은 한양에서 100리를 벗어나지 않는 곳에 두는 것이 관례이나, 여주의 세종대왕 무덤인 영릉을 빼고 가장 멀리 조성된 왕릉이다.

3. 낮은 구릉에 자리 잡고 있는 다른 왕릉과는 달리 산줄기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4. 규모는 크지 않으나 조선의 왕릉 중에서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온 곳으로 손꼽힌다.


구조

장릉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석물 또한 단출하다. 봉분 앞에 상석이 있고, 상석 좌우에 망주석 1쌍이 서 있으며, 그 아랫단에 사각형 장명등과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이 있다.[6] 추봉된 정릉(貞陵: 태조의 계비 神德王后康氏의 능) 등의 예에 따라 난간석과 무인석은 설치하지 않았다.[7]

특이한 것은 다른 왕릉에서는 볼 수 없는 배식단사(配食壇祠)라는 건물이 홍살문 바로 앞 오른쪽에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건물은 정조15년(1791년)에 건립하였으며, 여기에는 단종께 충절을 다한 충신위(忠臣位) 32인, 조사위(朝士位) 198인, 환자군노(宦者軍奴) 28인, 여인위(女人位) 6인을 포함 총 264인의 위패(位牌)를 모셔 놓은 곳이다.[8]

  • 홍살문
  • 수복청
  • 정자각
  • 재실
  • 배식단사(配食壇祠) - 단종을 위해 순절한 충신을 비롯한 264인의 위패를 모심
  • 충신각 - 단종으로 인하여 순절하거나 희생된 충신·종친·시종 들의 위패를 공동으로 모심.
  • 단종 비각 - 단종의 생애를 기록한 비.
  • 엄흥도 정려비
  • 낙촌기적비 - 박충원의 행적을 새긴 정려비
  • 영천(靈泉) - 제사 지낼 때 쓰는 제정(祭井)
  • 곡장 3면, 상석 1, 장명등 1,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석마 1쌍, 석양 1쌍, 석호 1쌍

왕릉에 사당·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 있는 곳은 장릉뿐인데 이는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은 단종과 관련된 것들이다.

참고문헌

  • 사료
    1. 『조선왕조실록』「단종실록」
    2. 『조선왕조실록』「문종실록」
    3. 『조선왕조실록』「중종실록」
    4. 『조선왕조실록』「세조실록」
    5. 『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
    6. 『조선왕조실록』「숙종실록」

출처

  1. 두산백과, '장릉'
  2. 세조와 수양대군의 관계,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의원회
  3. 계유정난,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의원회
  4. 단종 묘 최초발견, 『조선왕조실록』,국사편찬의원회
  5.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3 - 동해, 설악, 돌베개, 2011.
  6. 두산백과, '장릉'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장릉'
  8.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원형백과 한국의 풍수지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