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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영월 고씨동굴
 
|대표명칭 = 영월 고씨동굴
 
|지정번호 = 천연기념물 제219호  
 
|지정번호 = 천연기념물 제219호  
|지정일 = 1969년 06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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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일 = 1969년 6월 4일
|지정명칭 = 영월고씨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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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명칭 = 영월 고씨동굴
 
|한자명칭 = 寧越 高氏洞窟
 
|한자명칭 = 寧越 高氏洞窟
 
|영문명칭 = Gossigul Cave, Yeongwol
 
|영문명칭 = Gossigul Cave, Yeongwol
 
|분류 = 지질
 
|분류 = 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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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제작 = 약 4-5억년 전
 
|주소 =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영월동로 1121-9
 
|주소 =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영월동로 1121-9
 
|위도 = 37.131102
 
|위도 = 37.131102
 
|경도 = 128.536310
 
|경도 = 128.536310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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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고씨동굴.PNG
|웹사이트 = http://www.ywtour.com/Enjoy?num=53133&g=7&b=125&m=20&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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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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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ssigul Cave===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진별리에 있는 석회동굴. 규모(면적, 높이, 길이) 면적 28만 3,472㎡(지정구역), 총길이 3㎞.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7592 영월고씨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17년 04월 05일.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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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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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ssigul Cave is located in Jinbyeol-ri, Hadong-myeon, Yeongwol-gun. The name “Gossigul” comes from the fact that a certain Go family took refuge in this cave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The total length of this limestone cave is 3 km. It is speculated that the cave was formed about 4-5 hundred million years ago. Due to is extraordinary beauty, the cave is designated as Natural Monument No.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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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31102, 128.536310 [[영월 고씨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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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93320, 127.053657, [[한국학 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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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glem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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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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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월정사는 643년(선덕여왕 12) 당나라 유학을 마친 자장율사가 오대산에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 자장은 절을 세운 것은 아니었고, 문수보살을 만나기 위해 허름한 움막을 지었던 것이다. 고려말 민지가 지은 《봉암사리개건사암제일조사전기》라는 문헌에는 자장을 월정사의 최초 창건자로 보는 인식이 뚜렷히 나타나있고, 오늘날에도 월정사의 시초는 자장율사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ref>"[http://www.whlee.kr/bbs/board.php?bo_table=05_1&wr_id=43&page=6 월정사 역사와문화-1]" 『원행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문수성지 오대산 월정사, 2014년 2월 3일 작성</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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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영월동로에 있는 석회동굴. 규모(면적, 높이, 길이) 면적 28만 3,472㎡(지정구역), 총길이 3㎞이다.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7592 영월고씨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온라인}},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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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자장의 영향으로 인해 오대산은 문수보살을 모시는 문수신앙의 성지로 시작했다. 하지만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오대산은 문수보살 뿐만아니라 다양한 불보살이 상주한다는 5만보살신앙으로 발전한다.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는 중앙의 문수보살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는 각각 관음보살(동), 지장보살(서), 대세지보살(남), 미륵보살(북) 1만 분씩 상주하는 성지로 거듭난 것이다. <ref>"[http://woljeongsa.org/bbs/content.php?co_id=101010&tabs=2#tab 월정사소개]" 『오대산 월정사 홈페이지』</ref> 하지만 이때까지도 움막으로 기록되고 있던 월정사가 어엿한 사찰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신의]]가 이곳에 법당을 세우면서부터다. 이 시기를 전후로 월정사는 오대산 신앙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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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월 고씨굴은 남한강 상류에 위치해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4∼5억년 전에 만들어졌다. 동굴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동굴안의 온도는 연중 15℃ 안팎이며 수온은 5.3℃이다. 고씨굴 안에는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과 땅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석순이 널리 분포해 있으며, 화석으로만 존재한다 믿어왔던 갈로아 곤충이 서식하고 있다. 영월 고씨굴은 종유석과 석순 등이 잘 발달되어 있고, 다른 동굴에 비하여 동굴 속에서만 살아가는 희귀한 생물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6,02190000,32 영월 고씨굴]", 『문화유산정보』{{온라인}}, 문화재청.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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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굴의 발달방향은 북동에서 남서방향이며, 1966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1974년 5월 15일에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ref>"[http://www.ywtour.com/Enjoy?num=53133&g=7&b=125&m=20&s=1 고씨굴(高氏窟)]", 『Young World』{{온라인}}, 문화관광과.</ref>
  
고려전기, 월정사는 창건 이래 최대 흥성기를 맞이했다. 사실 그 이전까지도 사찰로서 월정사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 초, [[선종]]의 아홉 갈래 승려집단을 일컫는 [[구산선문]] 중 강릉의 사굴산문이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월정사 또한 그 세력권에 포함되어 함께 발전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흥한 것도 잠시, 몽고의 침입 이후 다시 사세가 심하게 기울었다.<ref>"[http://www.whlee.kr/bbs/board.php?bo_table=05_1&wr_id=43&page=6 월정사 역사와문화-5]" 『원행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문수성지 오대산 월정사, 2014년 2월 5일 작성</ref> 이후 1377년(충렬왕 33)에는 절이 화재로 전소되었고, 다시 이일 스님이 중창하여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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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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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는 '노리곡석굴(魯里谷石窟)'이라 했으나 의병장 [[고종원|고종원(高宗遠)]] 일가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했으므로 '고씨동굴'이라 하였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27368&cid=40942&categoryId=33557 고씨굴]", 『한국지명유래집』{{온라인}}, 국토정보지리원.</ref> 이 이야기에서 중심이 되는 사람이 바로 임진왜란 때 강원도 영월에서 의병을 모아 왜구에게 대항한 [[고종원]] 형제에 대한 이야기 이다. 강원도 영월군 진별리 여기에 [[고종원]], [[고종길]], [[고종경]] 삼형제가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었다. 1592년 왜구가 쳐들어와 계속 승리하며 북진하고 있었다. 그해 6월 29일 삼형제는 영남지방의 [[김성일]]과 호남지방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의 [[창의격문|창의격문(倡義檄文)]]을 보고 크게 감격하였다. 자신들도 강원도 각 읍에 통문을 돌려 군량과 병기 및 쇠를 모으고 청장년을 모집하였다. 이들의 봉기 소식을 들은 강원감사 [[유영길]]은 [[고종경]]에게 새로 모집한 관군 오백 명을 주어 흥원진까지 통솔해 가기를 명하였다. 군사를 통솔하여 가는 도중 [[고종경]]은 일부 도망친 군사들을 대신하여 다시 군사를 모았고, 통솔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제 시간에 흥원진에 도착하지 못했다. 강원감사 [[유영길]]은 사정은 가상하지만 군율을 어겼다고 해서 사형을 집행할 것을 명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영월의 백성들이 위급한 상황에서 감사의 명령은 부당하다고 사면을 요청했고, 평창 군수 [[권두문]]이 이러한 사정을 원주 감영에 보고했지만 길이 막혀서 제 시간에 가지 못했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감사 [[유영길]]은 [[고종경]]을 사면한다고 명령 하였으나 이미 사형이 집행된 후였다. 이후 [[유영길]]은 파면 당하였으나 영월 사람들은 [[고종경]]의 부당한 죽음을 보고는 의병에 참여하길 꺼려하여 모두 흩어져 버렸다. 평창 군수 [[권두문]]은 평창군 응암리 전투에서 패해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고 영월은 이로써 싸움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을을 내주게 되었다. 살아남은 형제 [[고종원]]과 [[고종길]]은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노리곡굴로 피난했다. 1592년 8월 17일 왜군은 강원도 영월까지 진입하고 남아 있는 농민들을 협박하여 피난민이 숨은 곳을 알아냈다. 18일 왜군은 뗏목을 타고 진별리 강을 건너 노리곡으로 집결하여 피난민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노리곡굴 입구에 섶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자, [[고종원]]의 아내 조씨 부인은 노리곡굴 안에 있는 연못에 투신하여 자결하였고 [[고종원]] 형제는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서 굴 밖으로 나와 포로가 되었다. 두 형제는 모진 고문을 당해도 결코 투항하지 않았다. 9월 1일 두 형제는 폭우가 심한 밤을 틈타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영월로 돌아가던 길에 [[고종길]]은 잡혀서 죽고, [[고종원]]은 포로가 된 지 이십 여일 만에 풀려나 영월로 돌아왔다. 그후 [[고종원]]은 4월 20일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부터 9월 6일까지의 피맺힌 사건을 [[기천록|『祈天錄(기천록)』]]에 기록해 놓았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25448&cid=49345&categoryId=49345 고종원 형제의 활약]", 『문화원형백과』{{온라인}}, 한국콘텐츠진흥원.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ref>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정책 때문에 불교가 전반적으로 쇠퇴했지만, 오대산 불교는 몇 가지 계기를 통해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첫번째는 조선 초기에 활약한 [[나옹]]의 문도들이 대거 오대산에 머무르면서 상원사와 월정사를 비롯한 오대산 불교권 전체가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두번째는 조선의 6대왕 세조가 이곳에서 기도하던 중 불치의 병을 고치고, 이후 상원사를 중창하는데 적극적인 후원을 했기 때문이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21358&cid=43723&categoryId=43732 오대산의 월정사]" 신정일,『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9: 우리산하』, 다음생각, 2012,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ref> 세번째는 16세기 말 쇠락했던 사찰을 [[사명대사]]가 중창하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왕실의 외사고(外史庫)가 이곳에 건립된 것이다. 이러한 여러 사건들은 억불정책 속에서도 월정사가 오히려 사세를 더욱 키워나갈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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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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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회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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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씨동굴은 전형적인 석회동굴이며,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다층구조를 보인다. 고씨동굴 내에는 종유관, 종유석, 석순, 석주, 동굴산호, 유석, 커튼과 동굴진주, 피솔라이트, 동굴방패, 곡석, 월유 등 다양한 동굴생성물이 분포하고 있으며, 기형종유석도 여러 지점에서 성장한다. 특히 고씨동굴의 특징적인 동굴생성물은 흑색의 동굴산호호서 동굴산호는 동굴수의 공급이 멈춘 석순과 유석 위에서 많이 발견된다. 이러한 흑색의 동굴생성물은 비공개 구간에 특히 많이 나타난다. 동굴생성물이 흑색을 띠는 이유는 동굴수 내에 토양으로부터 공급된 유기물의 영향이다.<ref>"[http://www.ywtour.com/Enjoy?num=53133&g=7&b=125&m=20&s=1 고씨굴(高氏窟)]", 『Young World』{{온라인}}, 문화관광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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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식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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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씨굴에는 총 68종의 다양한 동굴생물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고씨동굴에서 서식하고 있는 동굴생물은 진동굴 생물 13종, 호동굴 생물 14종, 외래성동굴 생물 41종이 발견되고 있다. 특히 고씨동굴 천장에는 현재 관박쥐, 관코박쥐, 물윗수염박쥐, 황금박쥐 등이 서식하고 있다.<ref>"[http://www.ywtour.com/Enjoy?num=53133&g=7&b=125&m=20&s=1 고씨굴(高氏窟)]", 『Young World』{{온라인}}, 문화관광과.</ref>
  
해방 전후로는 당시 조계종의 최고 지도자를 4번이나 역임했던 [[한암]]이 오대산에 머무르면서, 상원사와 월정사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로서 위상을 확립하게 된다. <ref>"[http://woljeongsa.org/bbs/content.php?co_id=101010&tabs=3#tab 월정사소개]" 『오대산 월정사 홈페이지』</ref> 하지만 곧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1951년 1.4후퇴 때 사찰 대부분이 불타버렸지만, 이후에 [[탄허]], [[만화]], [[현해]] 등에 의해 다시 중건되어 월정사의 명맥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2017년 현재 월정사의 주지는 정념스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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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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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glemap width="700" height="200" lat="37.130538" lon="128.536252" type="normal" zoom="8" icon="http://maps.google.com/mapfiles/marker.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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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30538, 128.536252, [[영월 고씨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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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glemap>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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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오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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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오대산은 태백산맥의 한줄기로서 비로봉, 호령봉, 상왕봉, 두로봉, 동대산 등 다섯 봉우리가 오목하게 원을 그리며 누대를 이루고 있는 까닭에 붙여진 명칭이다. 즉, 오대산은 어느 하나의 봉우리를 지칭한다기보다는 다섯 봉우리를 아우르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이 봉우리에는 각각 중대(적멸보궁), 북대(미륵암), 서대(수정암), 동대(관음암), 남대(지장암)의 다섯 암자가 있다. <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7437&cid=42840&categoryId=42847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와 암자]" 한국문화유산답사회,『답사여행의 길잡이3 - 동해,설악』, 2011,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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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 >
오대산은 자장이 월정사를 개창한 이래 불교신앙의 성산으로 추앙되어 왔다. 일찍이 고려시대부터 오대산은 "나라 안의 명산 중에서도 이곳이 가장 좋은 곳이니 불법이 길이 번창할 곳이다."(《삼국유사》「대산월정사 오류성중」) 라는 말이 있었다.<ref>"[http://www.whlee.kr/bbs/board.php?bo_table=05_1&wr_id=43&page=6 월정사 역사와문화-1]" 『원행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문수성지 오대산 월정사, 2014년 2월 3일 작성</ref>  또한 옛 사람들은 오대산을 '삼재가 들지 않는 명당 터'라 여기기도 했고 '어떤 재앙이 닥쳐도 안전한 땅'이라고 믿었다. <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21358&cid=43723&categoryId=43732 오대산의 월정사]"신정일,『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9: 우리산하』, 다음생각, 2012,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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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고씨동굴_내부6.jpg | 고씨동굴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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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고씨동굴 석주.jpg | 고씨동굴 내부 석주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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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고씨동굴_내부1.jpg | 고씨동굴 내부 석주_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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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lery>
  
그런데 사실 오대산은 중국 산서성 북동부에 있는 청량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청량산 또한 동서남북중의 다섯 봉우리가 누대를 이루고 있어 오대산이라고 부르며, 예로부터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불교 성지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이곳은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으로 알려져있고, 월정사를 최초 창건한 자장이 신라로 돌아오기 이전에 문수보살을 만난 곳도 바로 이곳이다. 중국의 오대산인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만나고 다시 신라의 오대산으로 돌아와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월정사가 세워졌으니 이는 매우 의미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ref>"[http://www.whlee.kr/bbs/board.php?bo_table=05_1&wr_id=43&page=6 월정사 역사와문화-1]" 『원행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문수성지 오대산 월정사, 2014년 2월 3일 작성</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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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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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효중, "[https://www.youtube.com/embed/qEQDL9z45ws 영월 고씨동굴", YouTube, 게시일: 2015년 3월 3일. 2017년 4월 26일 확인.
오대산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림지대로 동식물상이 다양하고 풍부하며, 1975년에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월정사로부터 상원사로 이어지는 10km의 계곡은 5백년 된 전나무들과 고산식물, 잡목들로 우거진 숲으로 수려하고 웅장한 경관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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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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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qEQDL9z45ws"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관련 인물 및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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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
===나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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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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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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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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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48호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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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139호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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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성보박물관]] 소장 불교문화재 640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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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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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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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석'''==
 
<references/>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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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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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천연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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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최한샘]]

2017년 5월 25일 (목) 10:15 기준 최신판


Gossigul Cave

Gossigul Cave is located in Jinbyeol-ri, Hadong-myeon, Yeongwol-gun. The name “Gossigul” comes from the fact that a certain Go family took refuge in this cave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The total length of this limestone cave is 3 km. It is speculated that the cave was formed about 4-5 hundred million years ago. Due to is extraordinary beauty, the cave is designated as Natural Monument No. 219.

정의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영월동로에 있는 석회동굴. 규모(면적, 높이, 길이) 면적 28만 3,472㎡(지정구역), 총길이 3㎞이다. [1]

내용

  • 영월 고씨굴은 남한강 상류에 위치해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4∼5억년 전에 만들어졌다. 동굴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동굴안의 온도는 연중 15℃ 안팎이며 수온은 5.3℃이다. 고씨굴 안에는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과 땅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석순이 널리 분포해 있으며, 화석으로만 존재한다 믿어왔던 갈로아 곤충이 서식하고 있다. 영월 고씨굴은 종유석과 석순 등이 잘 발달되어 있고, 다른 동굴에 비하여 동굴 속에서만 살아가는 희귀한 생물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2]
  • 동굴의 발달방향은 북동에서 남서방향이며, 1966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1974년 5월 15일에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3]

명칭 유래

  • 원래는 '노리곡석굴(魯里谷石窟)'이라 했으나 의병장 고종원(高宗遠) 일가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했으므로 '고씨동굴'이라 하였다.[4] 이 이야기에서 중심이 되는 사람이 바로 임진왜란 때 강원도 영월에서 의병을 모아 왜구에게 대항한 고종원 형제에 대한 이야기 이다. 강원도 영월군 진별리 여기에 고종원, 고종길, 고종경 삼형제가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었다. 1592년 왜구가 쳐들어와 계속 승리하며 북진하고 있었다. 그해 6월 29일 삼형제는 영남지방의 김성일과 호남지방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창의격문(倡義檄文)을 보고 크게 감격하였다. 자신들도 강원도 각 읍에 통문을 돌려 군량과 병기 및 쇠를 모으고 청장년을 모집하였다. 이들의 봉기 소식을 들은 강원감사 유영길고종경에게 새로 모집한 관군 오백 명을 주어 흥원진까지 통솔해 가기를 명하였다. 군사를 통솔하여 가는 도중 고종경은 일부 도망친 군사들을 대신하여 다시 군사를 모았고, 통솔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제 시간에 흥원진에 도착하지 못했다. 강원감사 유영길은 사정은 가상하지만 군율을 어겼다고 해서 사형을 집행할 것을 명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영월의 백성들이 위급한 상황에서 감사의 명령은 부당하다고 사면을 요청했고, 평창 군수 권두문이 이러한 사정을 원주 감영에 보고했지만 길이 막혀서 제 시간에 가지 못했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감사 유영길고종경을 사면한다고 명령 하였으나 이미 사형이 집행된 후였다. 이후 유영길은 파면 당하였으나 영월 사람들은 고종경의 부당한 죽음을 보고는 의병에 참여하길 꺼려하여 모두 흩어져 버렸다. 평창 군수 권두문은 평창군 응암리 전투에서 패해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고 영월은 이로써 싸움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을을 내주게 되었다. 살아남은 형제 고종원고종길은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노리곡굴로 피난했다. 1592년 8월 17일 왜군은 강원도 영월까지 진입하고 남아 있는 농민들을 협박하여 피난민이 숨은 곳을 알아냈다. 18일 왜군은 뗏목을 타고 진별리 강을 건너 노리곡으로 집결하여 피난민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노리곡굴 입구에 섶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자, 고종원의 아내 조씨 부인은 노리곡굴 안에 있는 연못에 투신하여 자결하였고 고종원 형제는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서 굴 밖으로 나와 포로가 되었다. 두 형제는 모진 고문을 당해도 결코 투항하지 않았다. 9월 1일 두 형제는 폭우가 심한 밤을 틈타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영월로 돌아가던 길에 고종길은 잡혀서 죽고, 고종원은 포로가 된 지 이십 여일 만에 풀려나 영월로 돌아왔다. 그후 고종원은 4월 20일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부터 9월 6일까지의 피맺힌 사건을 『祈天錄(기천록)』에 기록해 놓았다.[5]

특징

석회암

  • 고씨동굴은 전형적인 석회동굴이며,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다층구조를 보인다. 고씨동굴 내에는 종유관, 종유석, 석순, 석주, 동굴산호, 유석, 커튼과 동굴진주, 피솔라이트, 동굴방패, 곡석, 월유 등 다양한 동굴생성물이 분포하고 있으며, 기형종유석도 여러 지점에서 성장한다. 특히 고씨동굴의 특징적인 동굴생성물은 흑색의 동굴산호호서 동굴산호는 동굴수의 공급이 멈춘 석순과 유석 위에서 많이 발견된다. 이러한 흑색의 동굴생성물은 비공개 구간에 특히 많이 나타난다. 동굴생성물이 흑색을 띠는 이유는 동굴수 내에 토양으로부터 공급된 유기물의 영향이다.[6]

서식생물

  • 고씨굴에는 총 68종의 다양한 동굴생물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고씨동굴에서 서식하고 있는 동굴생물은 진동굴 생물 13종, 호동굴 생물 14종, 외래성동굴 생물 41종이 발견되고 있다. 특히 고씨동굴 천장에는 현재 관박쥐, 관코박쥐, 물윗수염박쥐, 황금박쥐 등이 서식하고 있다.[7]

위치

시각자료

갤러리

동영상

주석

  1. "영월고씨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2. "영월 고씨굴", 『문화유산정보』 OnLine , 문화재청.
  3. "고씨굴(高氏窟)", 『Young World』 OnLine , 문화관광과.
  4. "고씨굴", 『한국지명유래집』 OnLine , 국토정보지리원.
  5. "고종원 형제의 활약", 『문화원형백과』 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
  6. "고씨굴(高氏窟)", 『Young World』 OnLine , 문화관광과.
  7. "고씨굴(高氏窟)", 『Young World』 OnLine , 문화관광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