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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쌓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286년에 중수하였다.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 한 후 고구려와 신라 간에 이곳에서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벌어졌다. 백제의 수도 한성이 고구려군에 함락되었을 때 개로왕이 아단성 아래에서 피살되었으며, 이 산성을 삼국사기에 기록된 아단성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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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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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에 있는 백제시대 산성.
  
삼국시대 전략적 요충지로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로 용맹을 날리던 고구려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의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온달장군이 죽령 이북의 잃어버린 땅을 찾기 위해 이 아단성 밑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화살을 맞아 전사했다고 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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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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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의 경사진 산허리 윗부분을 둘러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아차산성(阿嵯山城)·아단성(阿旦城)·장한성(長漢城)·광장성(廣壯城) 등으로도 불린다.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대비하기 위해서 광주(廣州)에 도읍을 두었을 때 쌓았다고 한다. 현재 동쪽·서쪽·남쪽에 각각 문터와 수구(水口)터만 있을 뿐 다른 시설은 확인되지 않는다. 성 안에 작은 계곡을 아우르고 있을 정도로 규모가 매우 큰 편이다.
  
조선 태조는 아단(阿旦)을 아차(阿且)로 고쳐 아차성으로 불렀으며, 장한성(長漢城), 광장성(廣將城) 등으로도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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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은 약 1㎞ 정도인데, 해발 200m의 산꼭대기에서 시작하여 동남쪽 한강변의 경사진 산허리 윗부분을 둘러 쌓았다. 기본적으로 경사진 땅을 깎는 삭토법(削土法)을 이용하여 대강의 형태를 쌓은 뒤 그 윗부분에 낮은 석루(石壘)를 둘러 쌓은 모습이었던 것 같다. 현재 석루 부분은 무너져 흙과 돌을 함께 섞어서 쌓은 듯한 모습만 확인된다. 높이는 성벽 밖에서 보면 평균 10m 정도이지만 그보다 더 높은 곳도 있다. 성벽 안쪽은 1∼2m 내외의 높이인데, 수구 주변은 평탄해져서 안쪽벽은 남아 있지 않다. 성 밖에서 강변나루터에 이르는 구간은 좌우 양쪽의 지형을 이용해 흙을 깎아 성벽을 대신하였던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지금은 주택이 분포하면서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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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성은 백제 도성의 운명을 좌우하는 도하처(渡河處)를 수비하기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한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 맞은편에 있는 서울풍납동토성(風納洞土城, 사적 제11호)과 함께 가장 중시된 성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백제시대의 아단성으로도 비정되고 있다. 한편 475년(개로왕 21)에 백제 수도 한산(漢山)이 고구려에 함락되었을 때 이 성 아래에서 백제 개로왕이 죽임을 당하였고,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인 온달(溫達, ?∼590)이 죽령 이북의 실지(失地) 회복을 위하여 신라군과 싸우다가 역시 이 성 아래에서 전사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클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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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7일 (화) 14:42 판

개관

[정의]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에 있는 백제시대 산성.

[내용] 아차산의 경사진 산허리 윗부분을 둘러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아차산성(阿嵯山城)·아단성(阿旦城)·장한성(長漢城)·광장성(廣壯城) 등으로도 불린다.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대비하기 위해서 광주(廣州)에 도읍을 두었을 때 쌓았다고 한다. 현재 동쪽·서쪽·남쪽에 각각 문터와 수구(水口)터만 있을 뿐 다른 시설은 확인되지 않는다. 성 안에 작은 계곡을 아우르고 있을 정도로 규모가 매우 큰 편이다.

성벽은 약 1㎞ 정도인데, 해발 200m의 산꼭대기에서 시작하여 동남쪽 한강변의 경사진 산허리 윗부분을 둘러 쌓았다. 기본적으로 경사진 땅을 깎는 삭토법(削土法)을 이용하여 대강의 형태를 쌓은 뒤 그 윗부분에 낮은 석루(石壘)를 둘러 쌓은 모습이었던 것 같다. 현재 석루 부분은 무너져 흙과 돌을 함께 섞어서 쌓은 듯한 모습만 확인된다. 높이는 성벽 밖에서 보면 평균 10m 정도이지만 그보다 더 높은 곳도 있다. 성벽 안쪽은 1∼2m 내외의 높이인데, 수구 주변은 평탄해져서 안쪽벽은 남아 있지 않다. 성 밖에서 강변나루터에 이르는 구간은 좌우 양쪽의 지형을 이용해 흙을 깎아 성벽을 대신하였던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지금은 주택이 분포하면서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이 산성은 백제 도성의 운명을 좌우하는 도하처(渡河處)를 수비하기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한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 맞은편에 있는 서울풍납동토성(風納洞土城, 사적 제11호)과 함께 가장 중시된 성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백제시대의 아단성으로도 비정되고 있다. 한편 475년(개로왕 21)에 백제 수도 한산(漢山)이 고구려에 함락되었을 때 이 성 아래에서 백제 개로왕이 죽임을 당하였고,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인 온달(溫達, ?∼590)이 죽령 이북의 실지(失地) 회복을 위하여 신라군과 싸우다가 역시 이 성 아래에서 전사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클래스

  •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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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성 은 ~에 만들어 졌다 삼국시대
아차산성 는 ~를 포함한다 아차산성 우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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