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도직물 굴뚝

DH 교육용 위키
이수민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6월 17일 (월) 22:57 판

이동: 둘러보기, 검색



해설

심도직물 터에 남아있는 굴뚝으로 1947년부터 2005년까지 국내 굴지의 직물회사로 명성이 높았던 심도직물(주)이 자리잡았던 곳으로 강화주민들이 용흥궁 설치를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현재 김상용 순절비 바로 뒤에 위치해있다. 강화군청이 설치. 강화군은 지난 2005~2008년 심도직물 터에 공원을 조성했고, 30미터에 달했던 굴뚝의 끝부분을 따로 남겨 심도직물을 기념하고 있다. '60~70년대에 직원이 1천200명 정도였고 거쳐 간 사람들 수만 해도 1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건립 배경

옛 심도직물 공장이 있던 자리에 용흥궁 공원이 조성되자, 강화 주민들과 가톨릭교구에서 심도직물을 기억하고자 세웠다. 조형물에는“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는 성경 말씀을 새겼다. 조형물 앞에 놓인 표석에는 “가톨릭 노동사목의 시작”이며 “1968년 산업화의 그늘에서 고통당하던 심도직물 등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한국 천주교회와 가톨릭 노동청년회가 그 첫 발을 내디딘 곳”이라고 써 의미를 강조했다.


운영과 규모

1959년 편찬된 『경기사전』에 따르면 심도직물공업사의 소재지는 강화면 궁청리 394이고, 종업원수는 230명이었다. 60년대 이후 강화군 국회의원인 김재소가 운영을 맡아 역직기 210대의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1천200여 명의 종업원을 고용하는 대규모 업체로 발전하였다. 당시 생산되는 견직물은 국내는 물론 외국으로 수출되고 있었다고 한다. 심도직물은 인천 노동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바로 [심도직물_노조투쟁사건]이다. 인천민주평화인권센터에서 펴낸 '인천민주화운동사 연표'에 따르면, 1967년 5월 14일 강화도 심도직물 노동조합(전국섬유노동조합 직할분회)이 결성된 이후 천주교 인천교구와 함께 해고 노동자의 복직투쟁 등이 전개됐다. 당시 천주교 주교단은 1968년 2월 9일 ‘사회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제목의 공동 성명을 내놓으며 노동자들을 지지했다. 종교계가 성명을 내놓음으로써 사건은 일단락 되고 해고자들은 복직되었다. 이 사건은 국내 종파를 막론하고 종교계에서 노동자 인권과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연대한 사건으로 남아있다는데 의미가 깊다. 또한 로마교황청과 연계해 한국의 노동 문제를 국제 문제로 확대한 사건이다.

[1] 인용 오류: <ref> 태그를 닫는 </ref> 태그가 없습니다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존재하지만, <references/> 태그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