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도직물 굴뚝"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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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도직물==
 
  
===심도직물_굴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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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정보
심도직물 터에 남아있는 굴뚝으로 1947년부터 2005년까지 국내 굴지의 직물회사로 명성이 높았던 심도직물(주)이 자리잡았던 곳입니다'라는 문구가 새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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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심도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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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명칭 = 심도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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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Simdo cotton m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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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칭 = 沁都織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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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문화·교육/문화·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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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제작 = 194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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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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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 = 37.7484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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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도 = 126.4849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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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심도직물_굴뚝.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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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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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경기사전(京畿事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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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도직물 터에 남아있는 굴뚝으로 1947년부터 2005년까지 국내 굴지의 직물회사로 명성이 높았던 심도직물()이 자리잡았던 곳으로 강화주민들이 용흥궁 설치를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현재 김상용 순절비 바로 뒤에 위치해있다. 강화군청이 설치. 강화군은 지난 2005~2008년 심도직물 터에 공원을 조성했고, 30미터에 달했던 굴뚝의 끝부분을 따로 남겨 심도직물을 기념하고 있다. '60~70년대에 직원이 1천200명 정도였고 거쳐 간 사람들 수만 해도 1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1959년 간행. 경기사전에 따르면 심도직물공업사의 소재지는 강화면 궁청리 394이고, 종업원수는 23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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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도직물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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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배경===
강화군청이 설치. 강화군은 지난 2005~2008년 심도직물 터에 공원을 조성했고, 30미터에 달했던 굴뚝의 끝부분을 따로 남겨 심도직물을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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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도직물 공장이 있던 자리에 용흥궁 공원이 조성되자, 강화 주민들과 가톨릭교구에서 심도직물을 기억하고자 세웠다조형물에는“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는 성경 말씀을 새겼다. 조형물 앞에 놓인 표석에는 “가톨릭 노동사목의 시작”이며 “1968년 산업화의 그늘에서 고통당하던 심도직물 등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한국 천주교회와 가톨릭 노동청년회가 그 첫 발을 내디딘 곳”이라고 써 의미를 강조했다.
  '60~70년대에 직원이 1천200명 정도였고 거쳐 간 사람들 수만 해도 1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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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사===
 
1978년 강화문화원 발행. 심도직물, '심도(沁都) 견직 공업 주식회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
 
"전 국회의원인 김재소가 출자 경영하는 업체로 현재 역직기 210대의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1천200여 명의 종업원을 고용하고 있는데 생산되는 견직물은 국내는 물론 외국으로 수출되고 있다."심도직물은 인천 노동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천민주화운동사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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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도직물 기록==
  인천민주평화인권센터에서 펴낸 '인천민주화운동사 연표'를 보면 1967년 5월 14일 강화도 심도직물 노동조합(전국섬유노동조합 직할분회)이 결성된 이후 천주교 인천교구와 함께 해고 노동자의 복직투쟁 등이 전개됐다. 천주교 인천교구 한상욱 노동사목위원회 부위원장은 "심도직물 사건은 한국 천주교가 사회참여를 시작한 출발점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또한, 로마교황청과 연계해 한국의 노동 문제를 국제 문제로 확대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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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도(沁都) 견직 공업 주식회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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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사전에 따르면 심도직물공업사의 소재지는 강화면 궁청리 394이고, 종업원수는 230명이었다. "전 국회의원인 김재소가 출자 경영하는 업체로 현재 역직기 210대의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1천200여 명의 종업원을 고용하고 있는데 생산되는 견직물은 국내는 물론 외국으로 수출되고 있다."심도직물은 인천 노동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천민주평화인권센터에서 펴낸 '인천민주화운동사 연표'를 보면 1967년 5월 14일 강화도 심도직물 노동조합(전국섬유노동조합 직할분회)이 결성된 이후 천주교 인천교구와 함께 해고 노동자의 복직투쟁 등이 전개됐다. 천주교 인천교구 한상욱 노동사목위원회 부위원장은 "심도직물 사건은 한국 천주교가 사회참여를 시작한 출발점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또한, 로마교황청과 연계해 한국의 노동 문제를 국제 문제로 확대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우리 옷감이야기 103(교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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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경기사전(京畿事典), 경기사전편찬위원회, 創文社,1959.</ref>
1950~60년대 인조 뉴똥 생산이 이뤄지면서 의복용으로 많이 사용됐다. '현대패션 110년'이란 책 역시 "1950년대 옷감은 한복감으로 고급에 속했던 실크, 즉 뉴똥이 인기가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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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강화사』, 강화문화원,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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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사목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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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사업===
 
===기념사업===
2015년 5월 10일, 인천교구장 최기산 주교는 이 굴뚝 앞에서 ‘강화 심도직물 사건’을 기념하는 조형물 축복식을 주례했다. 인천교구 노동사목부(담당 김윤석 신부)가 주관한 이날 행사에는 홍승모 몬시뇰(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장) 등 교구 사제단과 가톨릭노동청년회·장년회 회원, 심도직물 노동자 출신 신자 등 150여 명이 함께 했다. 최 주교는 축복식 강론에서 “1960년대 심도직물에서 일하던 노동자 1200여 명은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등 지금은 상상도 못하는 어려움을 겪었다”며 “심도직물 사건은 노동자 편을 들기 힘든 사회적 여건에서 인천교구와 한국교회가 노동자와 연대함으로써 노동사목이 시작되는 계기를 부여했다”고 말했다. 당시 JOC 회원으로 심도직물에서 일했던 한청자 루치아 씨는 “그 때 고통은 말도 못할 정도였고 바른 말 한 마디만 해도 해고당하던 시절이었다”며 “50년이 지나 기념 조형물 축복식에 참석하니 옛 생각이 나 감개무량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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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10일, 인천교구장 최기산 주교는 이 굴뚝 앞에서 ‘강화 심도직물 사건’을 기념하는 조형물 축복식을 주례했다. 인천교구 노동사목부(담당 김윤석 신부)가 주관한 이날 행사에는 홍승모 몬시뇰(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장) 등 교구 사제단과 가톨릭노동청년회·장년회 회원, 심도직물 노동자 출신 신자 등 150여 명이 함께 했다. 최 주교는 축복식 강론에서 “1960년대 심도직물에서 일하던 노동자 1200여 명은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등 지금은 상상도 못하는 어려움을 겪었다”며 “심도직물 사건은 노동자 편을 들기 힘든 사회적 여건에서 인천교구와 한국교회가 노동자와 연대함으로써 노동사목이 시작되는 계기를 부여했다”고 말했다. 당시 JOC 회원으로 심도직물에서 일했던 한청자 루치아 씨는 “그 때 고통은 말도 못할 정도였고 바른 말 한 마디만 해도 해고당하던 시절이었다”며 “50년이 지나 기념 조형물 축복식에 참석하니 옛 생각이 나 감개무량하다”고 밝혔다. 강화읍 주민들이 이 자리에 세운 표석에 따르면 1970년대 심도직물은 종업원이 1200여 명에 이를 만큼 규모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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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강한,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569, ], 가톨릭뉴스, 2015.05.11</ref>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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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도직물 노조사건==
[File: 심도직물_굴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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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도직물 사건은 1967년 5월 심도직물 노동자들이 가톨릭노동청년회(가노청) 회원 중심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하면서 불거진 노사 갈등으로 1968년 2월까지 계속됐다. 당시 천주교 주교단은 1968년 2월 9일 ‘사회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제목의 공동 성명을 내놓으며 노동자들을 지지했다.

2019년 6월 17일 (월) 22:47 판



해설

심도직물 터에 남아있는 굴뚝으로 1947년부터 2005년까지 국내 굴지의 직물회사로 명성이 높았던 심도직물(주)이 자리잡았던 곳으로 강화주민들이 용흥궁 설치를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현재 김상용 순절비 바로 뒤에 위치해있다. 강화군청이 설치. 강화군은 지난 2005~2008년 심도직물 터에 공원을 조성했고, 30미터에 달했던 굴뚝의 끝부분을 따로 남겨 심도직물을 기념하고 있다. '60~70년대에 직원이 1천200명 정도였고 거쳐 간 사람들 수만 해도 1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건립 배경

옛 심도직물 공장이 있던 자리에 용흥궁 공원이 조성되자, 강화 주민들과 가톨릭교구에서 심도직물을 기억하고자 세웠다. 조형물에는“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는 성경 말씀을 새겼다. 조형물 앞에 놓인 표석에는 “가톨릭 노동사목의 시작”이며 “1968년 산업화의 그늘에서 고통당하던 심도직물 등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한국 천주교회와 가톨릭 노동청년회가 그 첫 발을 내디딘 곳”이라고 써 의미를 강조했다.


심도직물 기록

'심도(沁都) 견직 공업 주식회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

경기사전에 따르면 심도직물공업사의 소재지는 강화면 궁청리 394이고, 종업원수는 230명이었다. "전 국회의원인 김재소가 출자 경영하는 업체로 현재 역직기 210대의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1천200여 명의 종업원을 고용하고 있는데 생산되는 견직물은 국내는 물론 외국으로 수출되고 있다."심도직물은 인천 노동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천민주평화인권센터에서 펴낸 '인천민주화운동사 연표'를 보면 1967년 5월 14일 강화도 심도직물 노동조합(전국섬유노동조합 직할분회)이 결성된 이후 천주교 인천교구와 함께 해고 노동자의 복직투쟁 등이 전개됐다. 천주교 인천교구 한상욱 노동사목위원회 부위원장은 "심도직물 사건은 한국 천주교가 사회참여를 시작한 출발점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또한, 로마교황청과 연계해 한국의 노동 문제를 국제 문제로 확대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1] 인용 오류: <ref> 태그를 닫는 </ref> 태그가 없습니다

심도직물 노조사건

심도직물 사건은 1967년 5월 심도직물 노동자들이 가톨릭노동청년회(가노청) 회원 중심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하면서 불거진 노사 갈등으로 1968년 2월까지 계속됐다. 당시 천주교 주교단은 1968년 2월 9일 ‘사회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제목의 공동 성명을 내놓으며 노동자들을 지지했다.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존재하지만, <references/> 태그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