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식"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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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정보)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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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예술고등학교 졸업, 유명 지휘자 금난새와 동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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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가난해서 수돗물로 배를 채우곤 했다."고 한 당사자가 송창식.
 
너무 가난해서 수돗물로 배를 채우곤 했다."고 한 당사자가 송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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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곡을 직접 작사,곡 하고 노래까지 불렀다. (천재적인 싱어송 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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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시절에는 하루 종일 24시간을 음악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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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후 송창식의 음악에서 국악적인 시도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간혹 사용되는 국악의 5음계 선율 정도이다. 그래도 자세히 들어보면 이전 음악과는 달리 분명히 국악의 향취가 음악 전체에 스며있음을 느낄 수 있다. 국악에 대한 송창식의 의견은 이렇게 표현된다.
 
하지만 이후 송창식의 음악에서 국악적인 시도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간혹 사용되는 국악의 5음계 선율 정도이다. 그래도 자세히 들어보면 이전 음악과는 달리 분명히 국악의 향취가 음악 전체에 스며있음을 느낄 수 있다. 국악에 대한 송창식의 의견은 이렇게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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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 음악이 현재의 우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노래를 만들 때 우리 국악이 그동안 정상적으로 변화하고 발전해 왔다면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음악을 비롯해서 모든 문화는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제가 어떤 음악을 하든 그것이 우리 음악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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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곳 홍대에서 송창식은 운명의 갈림길에 서게 됐다. [[세시봉]]에서 [[대학생의 밤]]이라는 장기자랑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사회자였던 홍대생 [[이상벽]]이 송창식의 재능을 발견하고 [[세시봉]] 무대에 서게 했던 것이다. 그의 데뷔 무대는 여러모로 남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ref>[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60927.22021185658 국제일보, 김형찬의 대중음악 이야기 (36) 만족 모르는 음악 장인 송창식 (상)]</ref>
 
바로 그곳 홍대에서 송창식은 운명의 갈림길에 서게 됐다. [[세시봉]]에서 [[대학생의 밤]]이라는 장기자랑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사회자였던 홍대생 [[이상벽]]이 송창식의 재능을 발견하고 [[세시봉]] 무대에 서게 했던 것이다. 그의 데뷔 무대는 여러모로 남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ref>[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60927.22021185658 국제일보, 김형찬의 대중음악 이야기 (36) 만족 모르는 음악 장인 송창식 (상)]</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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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점퍼와 워커 차림에 낡은 통기타를 치며 오페라 아리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을 불러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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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생활 패턴이 생긴 것은 송창식의 자존심과도 관련이 있다는 윤형주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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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고래사냥 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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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7일 (월) 22:09 판

정의

대한민국의 포크송 가수 및 싱어송라이터.

내용

인물정보

  • "포크를 대중화한 영원한 가객"[1]
  • 서울예술고등학교 졸업, 유명 지휘자 금난새와 동창이다.
금난새가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천재적인 친구가 있었는데

너무 가난해서 수돗물로 배를 채우곤 했다."고 한 당사자가 송창식.


  •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데뷔무대를 가졌다.
  • 1967년 같은 세시봉멤버였던 윤형주트윈폴리오로 데뷔하였다
    • 대표곡 : 웨딩케이크, 하얀손수건
  • 대부분의 곡을 직접 작사,곡 하고 노래까지 불렀다. (천재적인 싱어송 라이터)
"그간 발매한 앨범 수록곡 외 미발표한 자작곡이 1000여 곡 정도 된다"며

"청년 시절에는 하루 종일 24시간을 음악에 살았다. 꿈속에서도 작곡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또 "꿈속에서 악상이 떠오르면, 아침에 일어나 악보로 정리한다"며 그만의 독특한 창착 과정을 공개하기도 했다.[2]


  • 시인 서정주와의 인연도 깊다. 자신의 시를 가사로 쓰도록 허용하지 않기로 유명하나 송창식에게 만큼은 허용
  • 팬층이 두터운 편, 소설가 박완서도 송창식의 팬이었다고 한다. [3]
  • 그의 신조는 "연습 없이 노래는 없다. 연습과 결과는 완전히 정비례한다" 였다.
  • 트윈폴리오를 해체하고 송창식은 솔로로 활동하며 자신의 음악적 지평을 넓혔다.
    • 사랑에 관한 한 최고의 표현이 담긴 '우리는',
    • 재일동포 2·3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싶어 만들었다는 '가나다라',
    • 트윈 폴리오 해체 후 홀로서기를 시작하던 시절에 만든 '딩동댕 지난 여름' '꽃보다 귀한 여인' 등

그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노래를 만들고 불러 지금의 '가객(歌客)' '음유시인' 명성을 얻었다.[4]

음반

  • 네이버에 송창식 정규 앨범으로 등재된 음반을 기준으로 기입함.

송창식의 음악적 노력

  • 본디 클래식 전공이었던 송창식은 윤형주와의 트윈폴리오 활동을 통해 대중음악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당시 대중음악은 팝송이 주가 되었는데, 성악을 위해 이태리어와 독어는 공부했으나, 영어 공부는 전혀 하지 않았기에 발음의 어려움이 있었다.[5]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앤디 윌리엄스의 노래를 따라불렀고, 작곡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자신만의 노래를 만드는 일에 힘썼다.
  • 1969년, 트윈폴리오 해체 이후, '금수저'인 윤형주와 달리 돌아갈 곳이 없었던 송창식은 음악적으로 더 파고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1974년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송창식의 음악 스타일은 매우 달라져 있었다. 군복무 중 어느 날 본 AFKN-TV의 아마추어 노래자랑에서 자신보다 노래를 훨씬 더 잘 부르는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은 것이다. 송창식은 자신이 해왔던 음악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고 음악을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때까지 소홀히 해왔던 트로트와 국악을 파고들었다. [6]처절한 음악적 반성에 이르렀고, 그 중 하나가 한국성에 대한 자각이었다. 자신이 한국인이면서도 한국의 음악적 전통을 계승하는 음악을 해오지 못했다는 반성에서 국악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송창식의 음악에서 국악적인 시도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간혹 사용되는 국악의 5음계 선율 정도이다. 그래도 자세히 들어보면 이전 음악과는 달리 분명히 국악의 향취가 음악 전체에 스며있음을 느낄 수 있다. 국악에 대한 송창식의 의견은 이렇게 표현된다.

"저는 제 음악이 현재의 우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노래를 만들 때 우리 국악이 그동안 정상적으로 변화하고 발전해 왔다면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음악을 비롯해서 모든 문화는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제가 어떤 음악을 하든 그것이 우리 음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송창식은 국악의 계승이 막 시도되던 1974년에 이미 40년이나 앞선 경지에 올라 있었다. '피리 부는 사나이'의 대히트로 1974년 MBC 10대가수가요제에서 10대가수에 선정되면서 송창식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7]
  • 집도 절도 없었기에 더 간절했던 그는, 형편이 많이 나아지고 난 이후에도 음악적인 노력을 그치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예술가로 칭송받고 있다.

에피소드

세시봉 데뷔무대

당시 오갈 데가 없어서 홍대 미대에 다니는 친구를 따라 강의도 듣고 캠퍼스에서 어울리기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홍대생으로 여겨지게 됐던 송창식. 바로 그곳 홍대에서 송창식은 운명의 갈림길에 서게 됐다. 세시봉에서 대학생의 밤이라는 장기자랑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사회자였던 홍대생 이상벽이 송창식의 재능을 발견하고 세시봉 무대에 서게 했던 것이다. 그의 데뷔 무대는 여러모로 남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8]

송창식이 세시봉에서 어떻게 데뷔했는지는 유명하다.

그는 점퍼와 워커 차림에 낡은 통기타를 치며 오페라 아리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을 불러냈다.
기대를 하지 않았던 만큼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러나 다음에 뭘 불렀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때 그는 앙코르 송으로 한 곡을 더 불렀다. 노래를 부르기 전에 이렇게 운을 뗐다.

"십자군 전쟁 때 어느 병사의 이야기입니다."

주위가 숙연해졌다. 그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머니 나 울며 당신 곁을 떠났으나 나는 참 행복스러운 병정이오'로 시작하는
'어머니(Cara Mamma)'란 가곡이었다. 노래를 끝낸 뒤 그는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아들의 편지를 받은 것은 아들을 기다리다 숨진 어머니가 아니라 그 옆을 지켰던 신부님이었습니다."
그러곤 다시 기타를 치며 "오 마리아, 오 마리아, 오 마리아, 아멘"이란 구절을 불렀다.
나중에야 알았다. 악보를 구해봤더니 그 후렴이 없었다. 송창식에게 물었더니 그는
"내가 덧붙인 거야"라고 태연스레 대답했다. 그때 깨달았다. 그에겐 노래를 회화나 이야기처럼 불러내는 능력이 있었다.

타고난 재능이었다. [9]


아래는 송창식 첫 등장 당시 에피소드와 불렀던 노래 (MBC 예능 놀러와클립)

독특한 생활

  • 밤낮 바뀐 생활로 유명하다. 남들 다 잘 때 일어나고 다 일어날 때 잔다. 심지어는 시차가 반대인 미국에서도 그곳의 낮과 밤에 맞춰 거꾸로 자고 일어났다고 한다.
  • 위와 같은 생활 패턴이 생긴 것은 송창식의 자존심과도 관련이 있다는 윤형주의 이야기.
트윈 폴리오를 처음 시작했던 당시 송창식은 가난했고 갈 곳이 없었으나 자존심은 셌다.


종종 집에 데려갔을 때도 내 어머니의 관심을 불편해 했고, 이틀 만에 우리 집을 나와 세시봉으로 돌아갔다.
그런 그가 마침내 방 한 칸을 얻은 것이 1968년이었다.
당시 같이 어울렸던 사람 중 대일학원 강사였던 김영남씨가 술을 마시다 송창식에게 물었다.
"원효호텔에서 잘래?"
옳다구나 송창식이 따라간 곳이 서울 원효로에 있던 김영남씨의 집 뒷방이다.
북향인 데다 방 밖을 벽이 가로막아 빛이 들지 않았다. 낮 한 시에도 어두컴컴했다.
새벽에 잠드는 송창식의 지금 수면 습관도 그때 비롯된 것으로 짐작한다.


  • 가수 김도향과 함께 단전 호흡 수련을 오랫동안 해온 것으로도 유명하다.[10]
  • 인생관, 가치관이 특이하다. 매일같이 특이한 체조와 함께 점심마다 같은 음식을 하나 정해서 몇 년 째 먹는다고 한다. 현재는 스파게티만 3년~4년 째 점심으로 매일 같은 가게에서 먹는다고 한다. 스파게티 주인이 송창식씨가 매일 찾아와서 같은 스파게티를 먹으러 온다고 방송에까지 나왔었다.[11]
  • TV조선 인생다큐 마이웨이에서도 송창식과의 인터뷰를 위해 새벽같이 찾아가 한참을 설득해서 성사시켰다.
  • 1975년 말 연예계가 대마초사건으로 발칵 뒤집히게 되며, 송창식도 함께 불려갔으나 무혐의를 받고 풀려난다. 원체 건전한 삶을 살았던 그였기 때문이나, 동료 가수들이 모두 구금된 상태여서 그가 풀려나는 대신 동료들의 이름을 불었다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12]

금지곡

  • 당시 대부분의 대중가요는 여러 이유로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는데, 송창식의 노래 중에서도 왜 불러고래사냥, 불꽃이 지정되었다.
  • 불꽃은 명확한 사유도 모르고 지정되었는데, 가사의 나는 타오르는 불꽃 한 송이가 문제시 된 것으로 추측된다.[13]
  • 왜 불러고래사냥 모두 박정희 정권 시절의 영화<바보들의 행진>(1975)의 OST였다.
    • 왜 불러는 영화에서 머리 긴 청년들이 장발단속을 피해 달리는 장면에서 쓰였다. 그러니까 청년들이 달아나면서 경찰들에게 "왜 불러"라고 놀리는 의도로 삽입된 것이 이 노래였는데, 덕분에 당시 공권력을 조롱했다는 이유로 금지곡명단에 오른 곡이다.[14]
    • 고래사냥은 염세주의를 부추긴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고 하나, 영화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고래사냥 가사이다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 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 앉았네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삼등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간밤에 꾸었던 꿈의 세계는
아침에 일어나면 잊혀지지만
그래도 생각나는 내 꿈 하나는
조그만 예쁜 고래 한 마리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우리들 사랑이 깨진다 해도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는다 해도
우리들 가슴 속에는 뚜렷이 있다
한마리 예쁜 고래 하나가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 금지곡의 귀재(?)인 김민기가 유신정권을 비판하는 공장의 불빛이라는 노래극의 음반을 녹음할 때 작업실을 빌려주었다.[15]
  • 송창식이 정권의 눈 밖에 난 것은, 금지곡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1977년 3월 23일 송창식이 예비군 훈련기피로 구속되는 사건으로 더욱 명백해진다. 당국은 이제까지 연예인의 훈련기피를 가벼운 벌금형으로 다루던 것을 구속을 원칙으로 엄하게 다스리겠다면서 송창식을 시범케이스로 내세운 것. 결국 송창식은 더이상의 변명을 하지 않고 돌연 가요계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16]

멀티미디어

노래영상

담배가게 아가씨

  •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멤버인 정엽과 윤도현이 리메이크하며 유명해졌다.
  • 익살스러운 가사와 기타 리프가 멋진 곡이다.
  • 옆에서 기타를 치고 있는 사람은 기타리스트 함춘호인데, 송창식을 통해 기타를 접하게 되었고,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가수들의 음반작업에 참여하는 대표 기타리스트가 되었다. 송창식 공연이 있을 때엔 항상 동행하며 기타를 친다.

한 번쯤

비의 나그네

  • 가장 좋아하는 노래.
  • 작사는 향남, 작곡은 이장희가 했지만, 송창식 목소리와 잘 어울리는 곡이다.

네트워크 그래프

참고자료

이미지 출처

기여

주석

  1. 엠넷 legend 100 artist 소개문구
  2. 스타투데이 기사, 송창식 "미발표곡 1천곡, 금난새의 천재라는 평에‥" (2013.0925)
  3. 보그 매거진 "한 사람, 박완서"(2019.02.20)
  4. 윤형주 칼럼,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6트윈 폴리오 해체… 가객 송창식의 탄생
  5. 때문에 조영남에게 자주 핀잔을 들었다고
  6. 국제일보, 김형찬의 대중음악 이야기 (37)음악 이외에는 돌아갈 곳 없던 '흙수저' 송창식…통기타로 도전장/ 만족 모르는 음악 장인 송창식 (중)
  7. 국제일보, 김형찬의 대중음악 이야기 (38) 만족 모르는 음악 장인 송창식 (하)
  8. 국제일보, 김형찬의 대중음악 이야기 (36) 만족 모르는 음악 장인 송창식 (상)
  9. 윤형주 조선일보 칼럼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 #4 무협지 읽는 사나이
  10. 나무위키 송창식 여담
  11. 나무위키 송창식 여담
  12. 국제일보, 김형찬의 대중음악 이야기 (38) 만족 모르는 음악 장인 송창식 (하)
  13. 국제일보, 김형찬의 대중음악 이야기 (38) 만족 모르는 음악 장인 송창식 (하)
  14. 나무위키 송창식 대표곡
  15. 송창식, 나무위키
  16. 국제일보, 김형찬의 대중음악 이야기 (38) 만족 모르는 음악 장인 송창식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