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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씐바위에 새겨진 오언율시)
(글씐바위에 새겨진 오언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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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八十三歲翁, 蒼波萬里中</big><br/>
 
<big>八十三歲翁, 蒼波萬里中</big><br/>
 
<big>一言胡大罪, 三黜亦云窮</bi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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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北極空瞻月, 南溟但信風</bi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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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北極空瞻日, 南溟但信風</big><br/>
<big>貂喪舊萬思在, 感激泣孤哀</bi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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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貂喪舊萬思在, 感激泣孤衷</bi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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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 셋 늙은이가, 멀고 먼 푸른 바다 가운데 있구나<br/>
 
여든 셋 늙은이가, 멀고 먼 푸른 바다 가운데 있구나<br/>
 
한 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이기로서니, 세 번이나 쫓겨남에 또한 궁한 내 신세여<br/>
 
한 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이기로서니, 세 번이나 쫓겨남에 또한 궁한 내 신세여<br/>
북녘 하늘 공연히 달을 바라보면서, 남쪽 바다 순풍이 올 것임을 다만 믿노라<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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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하늘 공연히 해를 바라보면서, 남쪽 바다 순풍이 올 것임을 다만 믿노라<br/>
담비갖옷 내려주셨던 옛 생각에 만감이 교차하니, 북받치는 감정에 이 세상 홀로임을 슬피 우노라<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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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비갖옷 내려주셨던 옛 생각에 만감이 교차하니, 북받치는 감정에 고독한 충정으로 슬피 우노라<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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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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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지을 무렵, 송시열의 나이는 83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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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내용을 통해 연로한 인간의 쓸쓸함이 묻어나옴을 느낄 수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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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가 지어진 맥락을 잠깐 살펴보자면,<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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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훗날의 경종)을 낳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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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元子: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인해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재집권하는 일이 발생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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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이 곧 기사환국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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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송시열은 왕세자가 책봉되자, 시기적으로 너무 이르다는 것을 이유로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린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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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송시열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오히려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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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있던 송시열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올라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일생을 마감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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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에 육지에 오르기 전 보길도에 잠시 내려 바위에 새긴 것으로 짐작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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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를 고려하였을 때 계절을 유추해본다면, 아마도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길목이었을 것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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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에 반짝거리는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서도, 그러한 바다가 아름다워 보였을리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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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스스로의 정치적 역정이 결말지점에 와있을 것이라는 슬픈 예감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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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 먼 푸른 바다 가운데 있구나(蒼波萬里中)"라는 표현은 바로 그러한 심정에서 자연스레 표출된 구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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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이기로서니(一言胡大罪)"는 아마도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린 일을 가리키는 것이라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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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지 않다 판단되는 일에 대해 군주를 향해 상소하는 것은 신하된 자의 당연한 책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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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그러한 언행이 올바로 전달되지 않는 당시 조정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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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이나 쫓겨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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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비 갖옷(貂喪)은...
 
담비 갖옷(貂喪)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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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9년(1658년) 2월에 송시열이 부름에 응하지 않자 효종은 “봄이 와서 날이 풀리면 올라오라고 했는데 송시열이 오지 않는 것이 청나라 사신이 온다는 소식을 들어서인가”라며 걱정했다. 결국 그해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송시열은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2월에는 북벌 때 입으라며 초구(담비로 만든 털옷)를 직접 하사할 정도로 효종은 그를 존경하고 신임했다. 그러나 효종은 그로부터 1년도 되지 않아 급서(急逝)했다. 송시열이 조정의 대신으로 효종과 국사를 의논한 기간은 너무 짧았고, 서인의 영수로서 정치적 부침이 시작되었다.
 
효종 9년(1658년) 2월에 송시열이 부름에 응하지 않자 효종은 “봄이 와서 날이 풀리면 올라오라고 했는데 송시열이 오지 않는 것이 청나라 사신이 온다는 소식을 들어서인가”라며 걱정했다. 결국 그해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송시열은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2월에는 북벌 때 입으라며 초구(담비로 만든 털옷)를 직접 하사할 정도로 효종은 그를 존경하고 신임했다. 그러나 효종은 그로부터 1년도 되지 않아 급서(急逝)했다. 송시열이 조정의 대신으로 효종과 국사를 의논한 기간은 너무 짧았고, 서인의 영수로서 정치적 부침이 시작되었다.
  
송시열의 나이 83세인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훗날의 경종)을 낳자 원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다. 송시열은 왕세자가 책봉되자 시기상조라며 반대하다가 결국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송시열은 다시 정계로 복귀하지 못하고 서울로 압송되던 중, 사약을 내리려고 오던 금부도사 행렬과 6월 3일 정읍에서 마주쳤다. 송시열은 사약 두 사발을 자진하여 마시고는 영욕이 교차하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이때 자손에게 남긴 친필유서가 아직도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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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의 나이 83세인 송시열은 다시 정계로 복귀하지 못하고 서울로 압송되던 중, 사약을 내리려고 오던 금부도사 행렬과 6월 3일 정읍에서 마주쳤다. 송시열은 사약 두 사발을 자진하여 마시고는 영욕이 교차하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이때 자손에게 남긴 친필유서가 아직도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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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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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12일 (수) 02:07 판


개요

글씐바위는

위치

Virtual Pavilion

이번 답사의 촬영 결과물로 제작해서 넣을 예정.


글씐바위에 새겨진 오언율시

  • 이미지

여름철에 본 보길도 글씐바위
- 이미지출처:날로 새로워라 블로그 '[1]'

  • 원문

八十三歲翁, 蒼波萬里中
一言胡大罪, 三黜亦云窮
北極空瞻日, 南溟但信風
貂喪舊萬思在, 感激泣孤衷



  • 번역문

여든 셋 늙은이가, 멀고 먼 푸른 바다 가운데 있구나
한 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이기로서니, 세 번이나 쫓겨남에 또한 궁한 내 신세여
북녘 하늘 공연히 해를 바라보면서, 남쪽 바다 순풍이 올 것임을 다만 믿노라
담비갖옷 내려주셨던 옛 생각에 만감이 교차하니, 북받치는 감정에 고독한 충정으로 슬피 우노라


  • 해설

이 시를 지을 무렵, 송시열의 나이는 83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의 내용을 통해 연로한 인간의 쓸쓸함이 묻어나옴을 느낄 수 있다.
이 시가 지어진 맥락을 잠깐 살펴보자면,
19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훗날의 경종)을 낳았다.
원자(元子: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인해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재집권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 사건이 곧 기사환국이다.
당시 송시열은 왕세자가 책봉되자, 시기적으로 너무 이르다는 것을 이유로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린다.
결과적으로 송시열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오히려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제주도에 있던 송시열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올라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일생을 마감한다.
이 시는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에 육지에 오르기 전 보길도에 잠시 내려 바위에 새긴 것으로 짐작된다.
시기를 고려하였을 때 계절을 유추해본다면, 아마도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길목이었을 것이다.
햇살에 반짝거리는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서도, 그러한 바다가 아름다워 보였을리 만무하다. 어쩌면 스스로의 정치적 역정이 결말지점에 와있을 것이라는 슬픈 예감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멀고 먼 푸른 바다 가운데 있구나(蒼波萬里中)"라는 표현은 바로 그러한 심정에서 자연스레 표출된 구절일 것이다.

"한 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이기로서니(一言胡大罪)"는 아마도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린 일을 가리키는 것이라 짐작된다. 옳지 않다 판단되는 일에 대해 군주를 향해 상소하는 것은 신하된 자의 당연한 책분이다. 스스로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그러한 언행이 올바로 전달되지 않는 당시 조정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일지도 모른다.

"세 번이나 쫓겨남"은




담비 갖옷(貂喪)은...

효종 9년(1658년) 2월에 송시열이 부름에 응하지 않자 효종은 “봄이 와서 날이 풀리면 올라오라고 했는데 송시열이 오지 않는 것이 청나라 사신이 온다는 소식을 들어서인가”라며 걱정했다. 결국 그해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송시열은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2월에는 북벌 때 입으라며 초구(담비로 만든 털옷)를 직접 하사할 정도로 효종은 그를 존경하고 신임했다. 그러나 효종은 그로부터 1년도 되지 않아 급서(急逝)했다. 송시열이 조정의 대신으로 효종과 국사를 의논한 기간은 너무 짧았고, 서인의 영수로서 정치적 부침이 시작되었다.

송시열의 나이 83세인 송시열은 다시 정계로 복귀하지 못하고 서울로 압송되던 중, 사약을 내리려고 오던 금부도사 행렬과 6월 3일 정읍에서 마주쳤다. 송시열은 사약 두 사발을 자진하여 마시고는 영욕이 교차하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이때 자손에게 남긴 친필유서가 아직도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습니다

1689년 송시열 관련 승정원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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