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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출신이었던 그는 육척 장신이었다. 장대 걸레를 팔목 힘으로 드는 사람이었다.  
 
평안도 출신이었던 그는 육척 장신이었다. 장대 걸레를 팔목 힘으로 드는 사람이었다.  
 
간혹 술 취한 이가 입장하려 하거나 난동을 피우려는 사람이 있다. 그럴 때 이흥원씨가 "메야? 술 먹었어? 나가라우"라고 말하면 상황 종료였다.
 
간혹 술 취한 이가 입장하려 하거나 난동을 피우려는 사람이 있다. 그럴 때 이흥원씨가 "메야? 술 먹었어? 나가라우"라고 말하면 상황 종료였다.
 
 
===참조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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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문서에서 다루는 세시봉의 경우, [[시절을 노래하다. 세시봉|스토리기사]]에서 다루는 내용과 전반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에,  
 
현 문서에서 다루는 세시봉의 경우, [[시절을 노래하다. 세시봉|스토리기사]]에서 다루는 내용과 전반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에,  

2019년 6월 20일 (목) 23:47 판

종로구 서린동에서 전성기를 맞이했던 세시봉 입구

정의

1953년~1969년 종로일대에 있었던 음악감상실.

내용

세시봉의 시작[1]

세시봉은 1953년 서울 명동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최초 주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육군 준장 김모씨. 그 후 이흥원씨가 인수해 충무로 1가와 소공동을 거쳐 서린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세시봉 시대'를 열게 된다. 세시봉이 대학생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주인 이흥원씨의 역할이 컸다. 세시봉을 운영하는 그의 철학은 확고했다. 술은 절대 반입 금지였다. 술 취한 사람도, 주먹 쓰는 사람도 출입 금지였다. 평안도 출신이었던 그는 육척 장신이었다. 장대 걸레를 팔목 힘으로 드는 사람이었다. 간혹 술 취한 이가 입장하려 하거나 난동을 피우려는 사람이 있다. 그럴 때 이흥원씨가 "메야? 술 먹었어? 나가라우"라고 말하면 상황 종료였다.

참조링크

현 문서에서 다루는 세시봉의 경우, 스토리기사에서 다루는 내용과 전반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에, 텍스트는 참고할만한 링크로 대신한다.

  • 세시봉의 문화적 의미에 대해서는 클릭
  • 세시봉에 대한 여러 사람의 회고는 클릭
  • 세시봉의 전반적인 역사와 미래에 대한 좋은 칼럼은 클릭

멀티미디어

이미지

동영상

세시봉과 같은 음악감상실을 소개하는 영상

전자지도

포인트 설명
자료상 세시봉의 위치였다고 하는 곳은 다 표시함.
세시봉 첫번째 자리 명동이라는 자료와 충무로에서 시작되었다는 자료밖에 없어서 명동 및 충무로 부근을 임의로 표시
세시봉 두번째 자리 종로 2가 YMCA빌딩 뒷골목이라는 자료밖에 나오지 않아서 추측해서 찍은 위치 정확한 건물은 알 수 없다.
소공동 세시봉 종로 2가를 거쳐 잠시 머물던 자리. 마찬가지로 위치는 알 수 없어 소공동 중 명동 부근을 임의로 표시.
충무로 1가 세시봉 인수자인 이흥원이 인수 후에 옮겼다는 자료는 있으나, 종로2가 이전인지, 종로 2가와 소공동 사이인지 알 수 없음. 마찬가지로 임의 표시
세시봉 마지막 자리 무교동, 세시봉의 전성기이자 마지막을 맞이했던 곳. 서울 종로구 서린동. 현 SK서린빌딩

네트워크 그래프

참고문헌

기여

주석

  1. 윤형주 칼럼,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 #13 한국 초유 누드 퍼포먼스 하던 날… 관객들 입이 떡, 박수도 잊어 : 청년문화 집결소 세시봉
  2. 사진출처
  3.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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