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삼국시대 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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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제주도(濟州島)는 한반도 서남해 쪽에 위치한 우리나라의 가장 큰 화산섬으로, 예로부터 도이(島夷), 동영주(東瀛洲), 섭라(涉羅), 탐모라(耽牟羅), 탁라(乇羅)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어 왔다. 이중 '동영주'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섬나라' 라는 뜻이다.

설문대 할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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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독특한 지형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창조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바로 ‘설문대 할망’ 이야기다. 설문대 할망은 본래 옥황상제의 셋째 딸로 굉장한 덩치를 가졌는데 그녀가 제주도에 내려와 흙을 몇 번 날라 만든 게 한라산이며, 그때 터진 치마 사이로 떨어져 굳은 흙덩이가 오름이고 걸터앉아 엉덩이 자국을 낸 곳이 바로 고군산 정상에 패인 분화구이다. 성산 일출봉은 할망의 빨래 바구니였으며 일출봉 등지로 겹쳐진 기암괴석은 그녀가 길쌈할 때 불을 밝혔던 등경돌이었고 우도와 제주도가 분리된 이유는 할망이 그 사이로 눈 오줌발이 너무 세서라고 한다. 할망의 죽음에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데 하나는 큰 키를 자랑하다가 밑이 터진 물장올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또 하나는 오백 명의 아들들을 위해 죽을 쑤다가 실수로 솥에 빠진 것을 아들들이 고기인 줄 알고 먹어버렸다는 이야기이다. 뒤늦게 솥에 남은 해골을 보고 아들들이 울다 못해 굳어진 모습이 오늘날 한라도 영실의 기암괴석이며 홀로 죽을 먹지 않은 막내 아들은 형들과 멀리 떨어져 차귀도(혹은 비양도)가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제주신화 속에서의 ‘할망’은 ‘여신’에게 붙이는 신격 존칭으도 이해된다.

구석기 시대

제주도에 대한 최초 역사는 대략 7~8만년 전인 중기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근거로 제주시 애월읍 어음리의 ‘빌레못굴’ 유적을 들 수 있다. 1971년 발굴 당시 그 옆에는 대형 석기와 박편 석기 등 총 84점의 유물과 함께 순록과 황곰의 뼈가 발견되었다. 특히 오늘날 시베리아나 알래스카 지방에만 있다는 순록과 황곰의 흔적은 한때 제주도와 그 지역과 연결되었을 수도 있다는 고대 대륙의 연결설을 반영한다. 다른 한편 굴에서 발견된 너무도 허술한 구멍투성이 현무암 재질 석기가 과연 도구가 맞는지에 대한 의구심, 6만년의 세월을 버텼다고 하기에는 너무 얕은 퇴적층, 깊이가 900m 이상 되어 사람이 주거하기에 너무 어두운 동굴내부 등 여러 요소들에 다양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현재로서는 학계에서도 다소 유보하는 듯한 입장이다. 다행히 화산활동이 많이 가라앉은 후기 구석기 시대 유물들은 비교적 논란이 없는 편이다. 그 예로는 1975년 발견된 생수궤 구석기 바위그늘 유물들을 들 수 있는데 긁개, 밀개, 톱니날 석기, 홈날 석기, 뚜르개, 새기개, 등칼, 복합 석기 등의 잔손질 석기와 돌날과 돌날몸돌, 좀돌날과 좀돌날몸돌, 격지 등이 발견되었다.

신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의 유물들은 기원전 1만년까지 내다보며 양적으로도 훨씬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특히 북제주군 한경면 고산리 선사유적(사적 제412호)에서만 석기 99,000여 점(성형 석기 5,000여 점, 박편 94,000여 점)과 토기 조각 1,000여 점 등이 집중 출토되었다. 그 중 1,700점이 넘는 화살촉은 구석기 시대의 돌도끼와는 확연히 다른 사냥무기의 변천을 잘 대표하고 있다. 한때 맘모스와 같은 큰 동물을 사냥하려면 둔탁한 돌도끼가 적절했지만 생태가 변하여 큰 동물들이 멸종하고 여우, 토끼, 노루 같은 작은 동물들이 활개를 치고부터는 잽싸고 날카로운 무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남제주군 대정읍 상모리와 하모리, 인덕면 사계리 일대에는 당시 사람의 발자국 화석까지 정교하게 남아 있다.

청동기 시대

청동기 시기의 제주도에서는 정작 청동으로 만든 유물이 극히 적다. 대신 공렬토기, 각형토기, 구순각목토기, 홍도토기 등 다양한 토기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특히 구멍무늬토기가 퍼진 경로를 보면 초기 제주도민들이 어떻게 낙동강과 진주 남강을 거쳐 제주도 서남부 지역에 정착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또 그물추 같은 어로 도구의 출토로 고대들이 제주의 척박한 토지로 인해 농사보다는 주로 수렵과 어로로 생계를 유지했음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기원전 300년-200년경부터 제주시 용담고 삼양 그리고 북제주군 곽지리 등에서 마을들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거기서부터 제주도의 첫 정식 국가 형태인 ‘탐라국’이 서서히 건국되었다. 이 당시 대표적인 대단위 마을 유적으로는 제주 용담동 유적 (사적 제522호)가 있다. 탐라는 일찍이 중국과 일본, 동남아 지역을 잇는 해상교통의 요충지로서 무역로상의 중간항구 역할을 톡톡히 했다. 1928년 탐사에 발견된 중국 한(漢)나라 시대의 화폐인 오수전(五銖錢)ㆍ화천(貨泉)ㆍ대천오십(大泉五十) 이를 잘 뒷받침한다. 삼국사기에도 백제, 고구려, 신라와도 각각 교역을 한 것으로 기록됐는데 특히 일본과 오랜 사신 왕래가 있어 백제의 부흥운동 때에는 탐라국에서도 군사를 파견하여 일본과 함께 백강(지금의 금강) 전투에서 싸우기도 했다.

삼국 시대

탐라국에 대한 정식 첫 기록은 기원후 3세기 중국 삼국시대의 기록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나오는 ‘주호(州胡)’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는 탐라를 주호로 불렀으며 서쪽 바다 한 가운데의 큰 섬이라고 소개했다. 다만 사람들이 키도 작은 편이고 언어도 다르게 들렸으며 소나 돼지 기르길 좋아하며 하의를 입지 않았고 배를 타면서 물건을 사고 팔았다고 다소 미개한 식으로 묘사했다. 중국의 《신당서》에서는 “이 나라는 처음에 백제에 복속하였다가 인덕 연간(663∼664)에 그 나라 추장이 당나라에 들어가 황제를 따라 태산에 이르렀는데, 그 뒤로는 신라에 복속되었다.”고 적었다. 또 “그 나라 왕인 유리도라(儒李都羅)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황제를 뵙게 하였다”라고 하여 훗날 탐라가 당나라와도 직접적인 관계를 맺었음을 알 수가 있다. 탐라의 통치자로는 성주(星主, 탐라국왕)와 왕자(王子)가 있었는데 그 호칭은 신라왕이 그들에게 성주ㆍ왕자ㆍ도내(徒內)의 작위를 주면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비록 한반도의 복잡한 정세에 따라 백제에 이어 신라에게 계속 조공을 바치면서 예속적인 관계를 맺었지만 그 와중에도 자체적으로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고려 때 국가 행정구역의 하나인 ‘탐라군’으로 지칭될 때도 성주가 여전히 실질적인 통치를 하는 등 오랫동안 나름의 자치권을 누렸다. 그 외 간간이 역사에 비치는 기록을 보면 신문왕 4년(684)에는 탐라에서 고지창(髙支昌)을 보내 설총의 이두문자를 배워오게 했으며, 김헌창의 난 (822)때는 신라 귀족들 일부가 탐라 땅으로 대피했다고도 한다.

사진

출처


참고문헌

이영권, 2005. 『(새로 쓰는) 제주사』 서울: 휴머니스트. (p18-34.)

국립제주박물관, 2003. 『한국문화와 제주』 서울: 서경. (이기길, 조선대 「선사대의 질그릇과 만든 기술의 발달」 p9-28)

관련 사이트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24740&cid=51955&categoryId=55497 (향토문화전자대전: ①구석기 시대, 제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56930&cid=51954&categoryId=55467 (향토문화전자대사전: ②생수궤 구석기 바위그늘유적)

https://www.jeju.go.kr/culture/history/history/overview.htm (제주특별자치도 홈페이지: 제주 역사 부분)

https://www.jeju.go.kr/culture/history/period/period01.htm 고창석 교수(제주대학교 사학과)

https://www.jeju.go.kr/culture/history/person.htm?historyTypeP=CUCHWC01&personTypeP=&searchType=name&searchText=&act=view&seq=670 박찬식 (제주대학교 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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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김희성 고전번역학
편집 최여명 한국문화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