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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5일 (월) 21:31 판


보컬, 작사·작곡의 서태지와 코러스 및 백보컬과 안무를 맡은 이주노, 양현석 총 세 명으로 구성되었다. 1992년 1집 《서태지와 아이들》로 데뷔하였으며 4집 《SEOTAIJI & BOYS IV》를 끝으로 해체되었다.


개관

시나위의 해체 이후 서태지는 당시 대한민국에 막 도입되기 시작한 미디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 때의 미디 작업으로 〈난 알아요〉, 〈환상속의 그대〉등 서태지와 아이들 1집에 수록될 곡들의 일부가 만들어진다. 새로운 음악 활동을 모색하던 서태지는 1992년 1월에 양현석, 이주노를 만나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하고 1992년 4월에 1집 《Yo! Taiji》를 발표한다. 1992년 4월 11일, MBC특종 TV 연예에 데뷔하게 된 그들은 방송 3사의 가요 순위 프로그램을 모두 석권 하였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노래를 듣고 7.8점이라는 역대 가장 낮은 점수를 주었다.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실제 데뷔는 1992년 3월 14일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였다. 또한 TV저널 올해의 스타상, 서울가요대상 최고 인기상, 스포츠서울 올해의 가수상, 대한민국 영상음악 대상 골든 디스크상, MBC 10대 가수 가요제 최고 인기 가요상과 신인 가수상, KBS 가요대상 15대 가수상등 그해 가요계에 부여된 모든 상을 휩쓸었고 《Yo! Taiji》는 데뷔 음반으로는 최다 판매량인 18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 선정에서 1집과 2집이 각각 24위 30위를 차지했다. [1]

활동

1993년 6월에 발표된 2집은 〈하여가〉로 활동을 시작하여 국내 최초로 220만장 이상 판매고를 기록했다. 또한 다시 한 번 각 방송사 및 언론사의 가요 프로그램 1위를 휩쓸었으며, 각종 상을 수상하게 된다. 음악적인 면에서도 〈하여가〉의 힙합음악에 국악을 접목시킨 음악과 〈수시아〉의 158비트에 달하는 빠른 멜로디는 1990년대 말 테크노 열풍에 한발 앞서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집 발표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은 잠시 일본 공연을 했으며 3집 앨범 제작을 위해 몇 달간의 공백기를 가진다. 그러던 1994년 8월 3집 앨범을 발표하며 〈발해를 꿈꾸며〉를 시작으로 3집 활동을 시작한다. 3집에서는 기존의 댄스 음악의 비중이 약해지고 록의 비중이 늘어났다. 댄스 음악에 열광했던 일부 팬들은 실망하기도 하였으나, 한국의 교육을 비판한 〈교실 이데아〉 등은 당시 청소년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3집은 16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대한민국 100대 명반에 선정되었다.

3집때에는 사탄설 등 서태지와 아이들을 둘러싼 각종 괴소문들이 횡행했는데, 이는 〈교실 이데아〉를 거꾸로 들어보면 사탄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는 괴소문이 PC통신을 통해 전국에 퍼졌고, 언론에까지 보도되면서 생겨난 것이다. 이 외에도 동성애자설, 임신설 등이 퍼졌다. 이러한 괴소문들은 MBC 뉴스데스크, KBS 추적 60분,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교실 이데아〉를 직접 돌려 틀어 사실 무근임을 밝혀내면서 잠잠해졌다.

또한 3집에는 기존 앨범에서는 볼 수 없는 강한 사회적 메시지가 수록되어 있었다. 기존의 앨범은 상업적 색채가 강한 사랑 이야기가 주를 이룬 데 반해, 3집 앨범에는 통일, 교육 현실, 마약 문제 등의 사회 비판적 내용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특히 뉴 메탈 색채를 강하게 드러낸 〈교실 이데아〉는 교육 현실을 직설적으로 꼬집으면서 10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런 사회적인 색채의 음악과 그에 대한 당시 10대 팬 들의 반응 이후 ‘서태지 담론’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1994년 대한민국 학계와 언론계가 뽑은 〈광복 50년 한국을 바꾼 100인〉에 가수로서는 최초로 선정되는 등 다양한 일들이 있었지만, 정작 그가 시도한 음악적 변화 자체는 큰 대중적 주목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훗날 서태지의 음악적 성취가 재평가 되면서 3집 수록곡인 〈발해를 꿈꾸며〉가 고등학교 7차 교육과정의 '음악과 생활'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은 앨범때마다 수십 회 이상의 TV 출연을 하면서도 꾸준히 라이브 공연을 펼쳤다. 1992년, 1994년, 1995년에 각각 1, 2, 3집 활동에 해당하는 라이브 앨범을 발표하였다. 또한 1992년, 1993년, 1994년에는 환경문제를 주제로 당대 아티스트들이 모인 환경 콘서트인 '내일은 늦으리'에 참가하여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더했다. 일본에도 진출하여 1994년에는 일본판 앨범을 발매하였다.[2]

서태지와 아이들은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대규모 콘서트를 연 적도 있다.

의의[3]

* 음악 뿐 아니라 청소년 문화에 큰 영향

빠른 랩, 현란한 몸짓, 그리고 경쾌한 리듬으로 만들어진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은 청소년들에게 깊숙히 파고들어 청소년들의 음악을 대변하는 음악으로 자리 잡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무대에서 입은 형광색 티셔츠와 반바지 그리고 창을 뒤로 한 모자는 청소년들의 유행 패션이 될만큼 서태지와 아이들은 10대들의 우상으로 우뚝 서면서 청소년 문화를 변화시켰다.

* 새로운 음악 시도

서태지와 아이들은 매 앨범마다 새로운 시도를 한다. 전자 악기와 한국의 전통 악기인 태평소를 조화시킨 2집 타이틀곡 ‘하여가’는 대중 음악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210만장이 팔리며 평론가들이 선정한 100대 명반에 오른다. 1994년에 발표한 3집 앨범에 실린 ‘발해를 꿈꾸며’는 한반도 분단의 아픔을 담아 통일을 염원한다. 또 ‘교실 이데아’를 통해 획일적인 교육 풍토를 비판한다. 1995년에는 4집 앨범 ‘컴백홈’을 발표한다. 가출 청소년들의 심정을 담아 청소년들의 공감을 얻으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다. 240만 장이 팔리며 한국 가요 사상 세 번째 더블 밀리언셀러를 기록한다.

은퇴

훗날 서태지는 4집 발표 전에 이미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가 예정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1~3집 활동 기간 동안 큰 인기를 누린 그들이지만, 너무나 바쁜 일정, 시간에 쫓겨 앨범을 만드는 데 대한 부담이 너무나 컸다고 그 후 당시를 떠올리며 심경을 밝혔다.

3집에서 댄스적인 색채를 없애고 , 메탈 등을 선보인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5년 10월에 4집을 발매함과 동시에 갱스터 랩 스타일의 〈Come Back Home〉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갱스터 랩은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생소한 장르로, 기존의 인기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일부의 관측도 있었다. 그러나 4집 음반은 발매 첫날 30만장이 팔리는 등 총 240만장 이상이 팔려 당시까지 대한민국 가요계 역사상 세 번째 더블 밀리언 셀러를 기록했다. 앨범 발매때마다 그러하듯, 서태지와 아이들은 각 방송사 가요순위 1위를 휩쓸었고, 〈컴백홈〉을 듣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학생의 이야기가 각 방송사 뉴스를 통해 전파를 타는 기현상도 벌어졌다. 또한 `컴백홈` 방송 출연 당시 립싱크 공연에 반발하여 마이크를 아예 소지하지 않는 등의 파격 행위도 이어졌다.

1995년 연말에 큰 활약을 펼친 후에도 그들은 길거리에서 게릴라 콘서트를 펼쳐 〈필승〉의 뮤직 비디오를 만드는 등 인기몰이를 계속하였으나, 1996년 1월 19일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에서 방송된 공연을 끝으로 활동을 중단하였다. 1월 31일에는 성균관대학교 유림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새로움에 대한 부담과 이에 따라 창작의 고통이 컸으며 화려할 때 미련없이 떠난다"라는 말을 남기고 돌연 그룹 해체와 은퇴를 선언[4]하며 미국으로 떠났다. 이날 서태지와 아이들의 갑작스러운 은퇴 소식은 전 사회적인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각 방송사 9시 뉴스의 메인 뉴스가 되었고, 각 일간지의 일면을 장식했다. 2월에는 베스트 앨범을 발표하였다.

3달 여의 활동 끝에 그룹은 은퇴했지만 4집의 여파는 은퇴 이후에도 남았다. 4집 수록곡인 〈시대유감〉은 공연윤리위원회의 검열에서 가사를 지적받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이 곡을 가사가 삭제된 상태에서 그대로 4집에 수록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진 이후 공연윤리위원회의 검열 제도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어졌으며, 포크가수 정태춘의 심의 철폐 운동과 시너지를 일으켜 현재 공윤의 사전심의 철폐에 공을 세웠다고 평가된다.[5] 실제로 공연윤리위원회는 1996년 6월 7일에 폐지되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7월 10일에 〈시대유감〉 싱글 앨범이 발표되어 가사가 삭제되지 않은 원곡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은퇴 선언 이후 미국으로 떠난 서태지는 1년여간 아무런 음악적 활동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6]

평가

수상[9]

가요 프로그램 1위

연도 수상 내역
1992년
1993년
1995년

앨범

클래스

관련 문서

이 문서 관계 관련 문서
《서태지와 아이들》 은~에 속한 앨범을 가지고 있다.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 선정
《서태지와 아이들》 은 ~를 포함한다. 서태지와 아이들 II
《서태지와 아이들》 은 ~로 구성된다. 서태지
《서태지와 아이들》 은 ~로 구성된다. 양현석
《서태지와 아이들》 은 ~로 구성된다. 이주노
《서태지와 아이들》 은 ~에서 언급되었다. 응답하라 1994
《서태지와 아이들》 은 ~에서 언급되었다. 두근두근 내 인생
《서태지와 아이들》 은 ~에서 공연했다.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
《서태지와 아이들》 은 ~에서 데뷔했다.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서태지와 아이들》 은 ~에서 수상했다. 가요톱텐

참고 자료

  1. <출처> 위키피디아-서태지와 아이들
  2. <출처> 위키피디아-서태지와 아이들
  3. 제 32부-문화 대통령 ‘서태지와 아이들’ 등장, KBSWORLD, 2015. 08. 18.
  4. <초점>「서태지와 아이들」은퇴와 그들이 남긴 것, 연합뉴스, 1996. 01. 31
  5. '동백 아가씨'가 금지곡 된 진짜 이유, 오마이뉴스, 2005. 01. 30
  6. <출처> 위키피디아-서태지와 아이들
  7. 김동률이 극찬한 서태지의 발라드 - 서태지와 아이들 ‘영원’, 미디어스, 2013. 01. 25
  8. 서태지에 대한 이문세의 막말, 유라준
  9. <출처> 위키피디아-서태지와 아이들
  10. '컴백홈'아시아권서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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