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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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1313번지 외 7필지에 있는 사적지로, 탐라국 시조에 대한 제의가 이루어지는 장소로써 1964년 6월 2일에 ‘사적 제134호’로 지정되었다. 삼성혈에 얽혀 전해 내려오는 삼성신화는 다음과 같다.

삼성신화

“탐라에는 태초에 사람이 없었다. 옛 기록(동문선, 고려사, 영주지)에 이르기를 기이하게 빼어난 산이 있는데 한라산이라 한다. 구름과 바다가 아득한 위에 완연히 있는데 그 주산(主山)인 한라산이 그의 신령한 화기를 내리어 북쪽 기슭에 있는 '모흥(毛興)'이라는 곳에 삼신인(三神人)을 동시에 탄강시켰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4300여 년 전의 일이다. 삼신인(三神人)이 용출(湧出)하였다 하여 이곳을 삼성혈(三姓穴)이라 하며, 3개의 지혈(地穴)이 있다. 이 신인(神人)들을 이름하여 을나(乙那)라 하며 세 성씨의 시조이며 탐라국을 개국하였다.

그들의 모양은 매우 크고 도량이 넓어서 인간사회에는 없는 신선의 모습이었다. 이 삼신인은 가죽옷을 입고 사냥을 하는 원시의 수렵생활을 하며 사이좋게 살았다. 하루는 한라산에 올라가 멀리 동쪽 바다를 보니 자주색 흙으로 봉한 목함(木函)이 파도를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그 목함을 따라 지금의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에 이르러 목함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 알 모양으로 된 둥근 옥함(玉函)이 있었으며, 자줏빛 옷에 관대를 한 사자(使者)가 있었다.

사자가 옥함을 연즉 청의(靑衣)를 입고 자색(姿色)이 출중하고 품질(稟質, 품성)이 단아(端雅)한 공주(公主) 세 사람이 좌석을 정제(整齊, 정돈하여 가지런함)하여 함께 앉았고, 또 우마와 오곡의 종자를 가지고 와서 연혼포의 해안 언덕에 내어놓으니 삼신인이 자축하여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것이다"하여 기뻐하였다.

사자가 두 번 절하고 엎드려 말하기를 "나는 동해 벽량국(碧浪國, 동해에 있다고 하는 상상의 나라)의 사자올시다. 우리 임금님이 세 공주를 낳으시고 나이가 성숙함에도 배필을 정하지 못하여 한탄하던 차에 하루는 자소각(紫宵閣, 하늘에 있다고 하는 자줏빛 누각)에 올라 서쪽 바다를 바라보니 자줏빛 기운이 하늘에 이어지고 상서로운 빛이 영롱한 가운데 명산이 있는데 그 명산에 삼신인(三神人)이 강림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하나 배필이 없으므로 이에 신(臣)에게 명하여 세분 공주를 모시고 오게 하였으니 항려(伉儷, 짝, 남편과 아내)의 예식을 갖추어 큰 국업(國業, 나라를 일으킴)을 성취 하시옵소서"하고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동쪽 하늘로 사라졌다.

이에 삼신인은 제물(祭物)을 정결하게 갖추고 목욕재계하여 하늘에 고하고 각기 세 공주와 혼인하여 연못 옆 동굴에서 신방을 차리고 생활하니 인간으로의 생활이 시작이며 이로써 농경사회로 발전하고 정주의 기초가 됐다 하였다.”삼성혈[三姓穴] (한국민속신앙사전: 마을신앙 편, 2009. 11. 12.)

그래서 자줏빛 함이 올라온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를 연혼포(延婚浦)라 하며, 지금도 세 공주가 도착할 때 함께 온 말의 발자국들이 해안가에 남아 있다. 또한 삼신인이 목욕한 연못을 혼인지(婚姻池)라 부르며, 신방을 꾸몄던 굴을 신방굴(神房窟)이라 하고 그 안에 각기 세 개의 굴이 있어 현재까지 그 자취가 보존되고 있다.

삼신인은 각기 정주할 생활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도읍을 정하기로 하고 한라산 중턱에 올라가서 거주지를 선택하는 활을 쏘아 제주를 삼분하여 제1도와 제2도와 제3도로 정하니 이로부터 비로소 산업을 이룩하여 오곡을 심고 우마를 길러 촌락이 이루어졌으며, 자손이 번성하여 탐라국의 기초를 이룩하였다. 그 활 쏜 지역을 사시장올악(射矢長兀岳)이라 하며, 활이 명중한 돌을 한데 모아 보존하니 제주시 화북경의 삼사석(三射石)이라 한다.

그 후 역사시대에 이르러서는 탐라국 왕손들이 신라에 입조하여 작호(爵號)를 받았다. 또 신라, 백제, 고구려뿐만 아니라 중국·일본·유구왕국과도 독립국가로서 교류하며 해상교역 활동도 하면서 수천 년간 탐라국으로의 왕국을 유지하다가 고려시대에 합병됐다고 한다.

처음 조성될 당시만 해도 개소리, 닭소리가 들리지 않는 인가(人家)와 멀리 떨어진 신성한 곳으로서 탐라국 시조를 모셔 제사를 지내기에 적소였다. 그러나 이제는 주변에 광양성당, 광양초등학교, 보성시장과 주택가가 자리하는 곳으로 변하였다. 사적으로 지정된 지역은 모두 3만 3,833㎡에 이르며 돌담이 둘러쳐진 가운데 전체적으로 원형을 이루고 있다.

원형의 돌담은 각석을 겹담으로 쌓아 둘렀다. 삼성혈은 조선시대 1526년(중종 21) 목사 이수동(李壽童)이 돌 울타리를 쌓고 혈(穴) 북쪽에 홍문(紅門)과 혈비(穴碑)를 세워 후손들에게 혈제(穴祭)를 지내게 함으로써 성역화되었고 1772년(영조 48)에 양세현(梁世絢) 목사가 바깥 담장을 쌓아 소나무를 심게 하고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향청(鄕廳)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삼성혈을 자세히 살펴보면 입구, 제의 준비처, 제의처, 전시관 등으로 4개 지역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입구에는 홍살문(높이 300㎝, 기둥 직경 30㎝)이 세워져 있고, 돌하르방(높이 220㎝)이 함께 놓여 있다. 그 옆에 ‘탐라국발상지’라고 새겨진 자연석과 사적지 표지(길이 77㎝, 폭 28㎝, 두께 13㎝)가 세워져 있어 도심의 다른 지역과 구분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오랜 세월 동안 자란 수목들이 수림을 이루고 있다. 이 홍살문은 조선 중종 21년 목사 이수동에 의한 것으로, 당시 중종이 홍문과 표단을 내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삼성혈에서 이루어지는 제향으로는 매년 4월 10일에 춘기대제를, 10월 10일에는 추기대제를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각각 봉향하고 있다. 12월 10일에는 건시대제라 하여 혈단에서 제를 지내고 있다. 모든 제관은 왕에 대한 예우로 금관제복을 착용하여 사흘 전에 입재하여 목욕재계하고 제향에 임한다. 지금은 조선시대 때 국제로 모신 것과 달리 제주도민제로 봉행되고 있다. 초헌관은 제주도지사, 아헌관과 종헌관은 덕망 있는 사회 지도층 인사가 각각 맡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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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관련 사이트


참고문헌

답사여행의 길잡이 11 - 한려수도와 제주도


출처

  1. 출처 : 답사여행의 길잡이 11 - 한려수도와 제주도

기여

역할 이름 전공
정리 한제이 고전번역학
편집 최여명 한국문화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