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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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해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고려 인종 23년(1145)경 김부식이 신라·고구려·백제 3국의 정치적인 흥망과 변천을 중심으로 편찬한 역사서이다.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의 주도하에 11명이 참여하여 편찬되었다. 이 책이 만들어진 12세기 전반의 상황은 고려 건국 후 200여년이 흘렀고 문벌귀족문화가 절정기에 이르렀으며, 유교와 불교가 서로 어우러져 고려 왕조가 안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자기 역사의 확인 작업으로 전 시대의 역사정리가 필요하였다. 조정에서는 거란을 물리친 후 자신감에 차 있었고 여진의 위협에 대한 강렬한 국가의식이 고조되어 있었다. 또 한편 문벌귀족간의 갈등과 대립이 심각했는데, 분열과 갈등을 국가가 망할 수 있는 원인으로 강조함으로써 현실비판의 뜻과 역사의 교훈을 후세에 알리려 하였다.

『삼국사기』는 사료가 가장 미약한 부분인 삼국시대를 다루었으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관찬사서이다. 또한 후대에 편찬된 역사서의 모범이 되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이 책은 통일신라시대를 포함한 한국고대사를 연구함에 있어 일연의 『삼국유사』와 더불어 최고의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된다.[1]

아차산과의 관련성

삼국사기 제24권 백제본기 제2에는 "임금은 고구려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아차성(阿旦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여 대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제25권 백제본기 제3에는 개로왕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임금을 발견하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더니, 임금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 죄를 헤아린 다음 묶어서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고 한다. 또한 삼국사기 온달열전에서 "온달은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의 '아단성(阿旦城)'또한 '아차산성'이라는 설이 유력하나, 단양의 온달산성을 이른다는 주장도 있다.

'阿旦', 혹은 '阿且'이 '峨嵯' 표기로 정착된 경위는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고려사가 조선시대 세종 때부터 편찬되기 시작하여 문종 원년에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아차산(峨嵯山)이라는 표기는 조선시대부터 쓰였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며 오랑캐[阿]라는 뜻을 피하고, 태조 이성계의 이름인 ‘旦’과 혼동하지 않기 위해 ‘阿且山’을 ‘아차산(峨嵯山)’으로 쓰고 읽었다는 주장이 이를 뒷받침한다.

관련 항목

이 문서 관계 관련 문서
삼국사기 A에 B가 기록되어 있다 아차산, 아차산성, 개로왕, 온달, 온달산성
삼국사기 A는 B에 만들어졌다 고려시대

주석

  1. 출처: 문화재청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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