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의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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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1920년대 서울 북촌 지역 극장에 대한 디지털 큐레이션 

Synopsis

내용

1920년대 서울 북촌 지역 극장 문화에 대한 디지털 큐레이션은 우미관, 단성사, 조선극장 등 근대 극장문화에 대한 체험형 전시로서, 이용자들이 메타버스 내에서 현재의 서울 풍경이나 극장 경험과는 매우 다른 1920년대 서울의 극장 문화를 직접 경험하면서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풍부한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다.

1920년대의 서울은 도시의 여가공간이 확대되고 도시 문화가 형성되면서 극장 문화도 활발하게 만들어지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극장은 3.1운동 이후 조선 사회의 문화적 활력과 검열과 임석경관 등으로 상징되는 정치적 긴장이 공존하던 공간으로, 공연과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는 현재의 극장 문화와 비슷하면서도 매우 다른 문화적 특성을 지니고 있어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높다. 그러나 현재는 이 극장들이 모두 소실되어 이용자들이 극장 공간을 접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극장에 대한 문헌 자료가 남아 있더라도 전문 연구자가 아닌 이상 문헌 자료 데이터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다. 1920년대 북촌의 극장에 대한 디지털 큐레이션은 한국 근대 극장문화와 도시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매력적인 콘텐츠를 제공함으로써 한국의 콘텐츠에 관심을 지닌 국내외 이용자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

주요극장 목록

협률사

광무대

우미관

조선극장


디지털 큐레이션 대상 극장 :우미관, 조선극장

Storyline

우미관

  • episode1: 우미관 전소

1924년 5월 21일 오후 두시 40분 경에 시내 관철동 활동사진 상설관인 우미관에서 불이나 불길이 삽시간에 피어올라 검은 연기가 관철동 일대를 덮었다. 각 처의 소방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미관은 불과 수십분 만에 전소되었고, 불길은 점점 번저 이웃의 두남 이발관과 철남 지물포까지를 모두 태웠다. 불이 난 원인은 기관실에서 사진 실험을 하다가 전깃불에서 발화되었다고 하며 종로부터 탑골 공원 앞까지 대혼잡을 이루었다. 후에 제일 양복점까지도 불이 났는데 이것은 우미관 화재의 영향인지 확실치 않다. 손해는 조사 중이나 우미관은 보험에 가입도 되어 있지 않아 손해가 막심할 것으로 보인다. 해당 일자에 상영 중인 영화는 외화 <秘密의 拾參>이었다.(조선일보 1924.5.22 기사)

  • episode2: 우미관 앞에서의 시위

민중운동대회가 금지되자 그 참가대의원들은 흥분하여 20일 오후에 탑골 동원을 위시하여 밤에는 우미관과 단성사 앞에서 시위 행동을 하였다. 이 같은 사건이 날때마다 각 신문사에서는 보도의 천직을 다하기 위해 기자는 물론 사진반까지 출동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경찰서에서는 각 사의 사진반원에 대하여 무리한 압박과 심지어 구타까지 하는 등 횡보가 만연하였다. 이때 우미관에서 상영 중인 영화는 외화 <雪의 迷路>였다.(조선일보 1925.4.22 기사)

조선극장

  • episode 3: 조선극장의 재개관

조선극장은 1922년 11월 5일 개관한 이후 극장 내 분규에 시달리며 잦은 휴관과 재개관을 거듭했다. 1925년 동경건물주식회사로 소유권이 이전된 후에도 경영난으로 잦은 휴관을 반복하였는데, 1926년 12월 18일 차영호를 경영주로 재개관을 한다. 재개관을 하며 조선극장은 '흥행에 불미한 점'을 혁신하고 '면목일신'할 것임을 강조한다. 이때 선택한 작품이 1926년에 개봉하여 큰 인기를 끌었던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과 역시 나운규가 감독한 <풍운아>로, 조선극장은 이 두 조선 영화를 중심으로 상영할 것이며, 주임변사로 김조성을 영입하였음을 내세운다. (동아일보 1927.2.9 기사)


  • episode 4: 조선극장에서의 삐라 살포 사건

1929년부터 1931년에 걸쳐 경성에 있는 극장들 가운데 조선극장에는 유일하게 삐라가 살포된다. 1929년 12월 13일 밤, 조선극장에서 극단 토월회의 <카츄샤>가 공연되고 있던 중 한 청년이 삐라를 살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는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여론을 환기하면서 전국적인 규모의 시위를 도모하기 위해 민중대회를 계획하고 있던 신간회가 벌인 일이었다.[1] 삐라가 살포되자 관중들은 함성을 치며 소동이 일어났고, 연설을 하던 청년 김무삼은 임석경관에 의해 체포된다. 이 사건 이후에도 조선극장에서는 청년들이 삐라를 뿌리고 만세를 부르는 사건이 반복하여 발생한다. (동아일보 1929.12.28 기사)

네트워크 그래프


Storytelling Network


참고문헌

  1. 이승희, 「조선극장의 스캔들과 극장의 정치경제학」,『대동문화연구』제72집,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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