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부소산성(扶餘扶蘇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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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s류인태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6년 4월 15일 (금) 21:4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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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부여 부소산성은 부여군 부여읍의 서쪽에 금강을 낀 부소산에 자리하고 있는 산성으로 백제의 마지막 시대인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 둘레는 대략 2.2km, 면적은 약 74만㎡에 달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이 곳의 주변지형[1]을 보면 북쪽인 공주에서 흘러내려오는 금강이 부소산의 동북 모퉁이에 와닿아 감싸듯 돌아 부여 중심지를 거의 안고 흘러 남쪽 하류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러한 지세는 동측을 제외한 3면이 강에 의하여 차단되는 천연적인 요새를 형성하고 있어 외침으로부터 방어하기에 알맞은 지형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부소산은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그 모습이 크게 달라지는데, 서남동측으로는 산의 구릉이 외부를 향해 담을 두르듯 비교적 심한 경사면이 형성되어있고, 내부에는 곳곳에 크고 작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어 내부에서의 외부관찰을 용이하나 외부에서는 쉽게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는 지세를 갖추고 있다.
부소산성 성곽의 형식[2]은 군창지와 사비루 일대를 똬리 모양으로 감싼 테뫼식 산성과 부소산 전체를 감싼 포곡식 산성이 모두 확인되고 있다. 연구 초기에는 산 정상부의 테뫼식산성이 먼저 축조되고, 그것이 점차 확대되어 포곡식산성이 축조된 것으로 이해하였으나, 동문지 발굴에서 ‘大通’이라는 명문이 찍힌 기와편이 발견되면서 사비 천도 이전부터 포곡식 산성의 축조가 시작[3]되었음이 밝혀졌고, 테뫼식산성의 경우 인화문토기편이 발견됨으로써 통일신라시기에 축조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사비시기의 부소산성은 포곡식산성만이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산성은 사비시대의 중심 산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장소로서 역사적인 의의가 있어,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호로 지정되었으며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 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4]를 거쳐 세계 유산으로까지 등재되었다.
현재 부소산성 내부에는 군창터 및 백제 때 건물터와 영일루·사비루·고란사·낙화암 등이 남아있는데 성 안에 군창터와 건물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것으로 추측된다.[5]


형식과 축조기법

현재 부소산성의 성곽 형식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싼 테뫼식과 다시 그 주위를 감싸게 쌓은 포곡식이 혼합된 복합식산성[6]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이, 최근의 발굴조사[7]에서 부소산성은 포곡식산성으로 백제시대에 축조되었고, 군창지 소재 테뫼식산성과 사비루 소재 테뫼식산성은 모두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되었음이 밝혀져 이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거론되고 있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백제시대 포곡식산성에 대해서만 살펴보겠다. 일반적으로 포곡식산성이란 성내에 한 개 또는 그 이상의 계곡을 포용하고 그 주위를 둘러싼 산줄기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구축한 것을 말한다. 따라서 성벽의 통과선은 산 정상부에서 능선을 따라 정상부에 오르게 되고 그 기복에 있어서 보다 변화가 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포곡식산성의 평면형태는 원형 또는 타원형을 띠고 있는 테뫼식 또는 산정식산성과는 달리 불규칙적인 부정형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경우가 많다. 계곡을 흐르는 수류는 한 곳으로 모아져서 평지에 가까운 위치에 시설된 수구를 통하여 성외로 유출하게 되는데, 부소산성의 북문터에도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물을 빼는 수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8] 따라서 포곡식산성의 성내에는 연못이 한 곳 이상 설비되게 된다. 이 형식은 내부에 넓은 평탄지와 계곡 및 수원을 포괄한 축성법인 만큼 기타 형식보다 훨씬 광대한 규모를 이루고 있어 보다 많은 인원이 성 안에서 장기간 주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9]
부소산성의 성벽 축조기법은 기본적으로 판축공법(版築工法)을 이용하고 있다. 1981년 윤무병에 의해 동남쪽 테뫼식산성의 북성벽과 포곡식산성의 동벽에 대한 절개조사가 시작된 이래로 포곡식산성의 축조방식을 확인할 수 있었던 곳은 동성벽의 남편지점, 동문지 주변, 동남쪽 테뫼식산성 동단부의 포곡식산성과 만나는 지점, 남문지 주변, 서성벽 중앙부, 사비루 주변, 북문지 서편과 동편 지점 등이다. 이 중 북문지 서편을 제외한 나머지 지점에서 성벽 축조 시 순수한 점질토와 마사토를 교차하여 다져 올린 순수판축기법을 채용한 것을 확인 할 수 있는데[10]이 때 판축 성벽은 중심부에 體城을 먼저 축조한 다음 내외 측면을 경사지게 補築하였다. 경사가 심하거나 암반을 지반으로 한 곳에는 외측면의 지반에 접하여 자연석을 석축처럼 축조하여 성벽이 밀려나지 않도록 보완한 곳도 있다. 성벽 내측에는 성벽과 접하거나 조금 떨어진 지점에 敷石 시설을 하여 배수 기능을 도모하는 등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흔적도 확인된다.[11]
성벽과 관련된 시설로는 성문과 치(雉)가 있다. 성문으로는 동문과 남문, 북문 등 3곳이 확인되었고 치는 동문지 남쪽과 남문지 서쪽에서 확인되었다. 전자의 치는 폭이 약 3m, 길이 약 7.2m이고, 후자의 경우 폭7.5m, 길이 11m로 동문의 것보다 훨씬 크다. 남문지 일대는 관북리 일대에서 산성 내부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잘 다듬은 판석으로 만든 계단시설이 확인되며 다른 문지에 비해 규모가 큰 점에서 부소산성의 중심 성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12]


기능과 역할

많은 연구자들은 부소산성을 왕궁의 待避城으로 파악하는데 동의하고 있다. 관북리 추정왕궁지의 배후에 연접해 있는 것은 당초부터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았을 때 이곳에서 마지막까지 籠城한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부소산성은 단순히 왕성의 방어뿐 아니라 왕궁의 배후지로서 후원의 기능 역시 겸한 것으로 보인다. 부소산성은 입지상 관북리 추정왕궁지와 연접해 있으면서 부여 시가지 전체를 조망할 수 있고 배후에는 백마강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백마강의 對岸에는 왕흥사가 위치하고 그 북쪽에는 왕과 신하들이 宴遊를 즐겼다는 大王浦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13], 이것을 『삼국사기』 무왕 37년(636) 3월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백제 무왕이 기암괴석이 착립(錯立)하고 기화이초가 간간이 끼어있어 그림처럼 아름다운 부소산성 북쪽의 대왕포에서 술을 마시고 북과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자 신료들이 같이 춤을 추었다고 전해진다.[14] 따라서 부소산성 일대는 왕과 귀족의 연유 공간이자 왕의 신변을 지키는 기능도 함께 가진 후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관련 건축물

부소산에는 현존하는 건축유형으로 관아건축, 사찰건축, 사묘건축, 루정건축, 기타 현대건축물이 있다. 관아건축으로는 부여동헌, 내아(내동헌), 객사가 있고, 사찰건축으로는 백제절터, 고란사가 있다. 사묘로는 삼충사, 궁녀사, 도강영당, 충령사, 하동정씨정려가 있고, 루정건축으로는 영일루, 사자루, 반월루, 백화정 사비문이 있고, 이밖에 근현대 건축물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구 국립부여박물관), 매표소, 간이효게소, 매점 등이 있다. 부소산성 내에는 백제시대 이래 수많은 건축물이 있었으나 모두 없어지고 남아 있는 것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조선시대의 관아건물이며, 이를 비롯한 몇 개의 건물이 남아있다. 부소산성이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현대에 들어와 지속적으로 건물이 이건되거나 신축되면서 현재와 같은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었다.[15]


고란사

부소산 북쪽 백마강 왼쪽 암벽 위에 위치하고 있는 고란사는 창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 때 왕들이 노닐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라는 설이 전해진다. 이후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중창하여 고란사(高蘭寺)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사찰 후면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생하기 때문에 고란사라 불리게 되었다고도 알려져 있다. 고란사는 1028년(현종 19)에 중창하였고, 1629년(인조 7)과 1797년(정조 21) 각각 중수, 1900년 은산면에 있던 숭각사(崇角寺)를 옮겨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31년에 지은 것을 1959년 보수, 단장한 정면 7칸, 측면 5칸의 법당과 종각인 영종각 뿐이다. 절의 뒤뜰 커다란 바위틈에는 고란초가 촘촘히 돋아나 있고, 왕이 마셨다는 고란수의 고란샘터가 있고, 주위에는 낙화암·조룡대(釣龍臺)·사비성(泗沘城) 등이 있다. 고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며 현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16]

사비루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1824년(순조24)에 세운 임천면(林川面)의 관아 정문이던 것을 일제 때인 1919년 옛날 송월대(送月臺)가 있었던 부소산성(扶蘇山城)에서 가장 높은 곳인 위치에 옮겨짓고 이름을 개산루(皆山樓)에서 사비루로 바꾸었다. 이곳으로 옮기면서 터를 다듬을 때 지하에서 정지원(鄭智遠)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백제시대의 금동석가여래입상(金銅釋迦如來立像:보물196)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사비루는 2층 문루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2층에는 누각을 설치하였으며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건물 정면에 한말 고종의 아들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이 쓴 〈泗(水+此)疵樓(사자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백마강쪽으로는 조선말기 명필인 해강 김규진(金圭鎭)이 쓴 〈白馬長江(백마장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17]

백화정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08호로 지정된 백화정은 백제 멸망과 함께 죽은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낙화암[18]에 1929년 처음 세워졌다. 1982년 부분보수가 있었고, 1984년도에는 백화정 주위에 보호책을 설치하였으며 1991년에도 부분보수가 있었다. 백화정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소동파가 혜주에 귀양갔을 때 성 밖의 호수 풍호를 보고 지은 「강금수사백화주(江錦水射百花州」 라는 시에서 따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백제가 멸망하자 궁녀들이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마치 하얀 꽃이 떨어지는 것과 같았던 그 모습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것이다.[19]

관련 유물

사진 및 도면

사진

도면

관련 사이트

참고문헌

답사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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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 최맹직 외, 『扶蘇山城 發掘調査中間報告』, 扶餘文化財硏究所, 1995, 1쪽.
  2. 박순발 외, 『백제의 건축과 토목』,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07, 114쪽.
  3. 부소산성의 초축연대는 동성왕 8년인 486년으로 추측된다. 이는 부소산성 유적 목탄시료 4점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교정연대가 3점은 AD230~595AD로서 삼국시대 중기에 해당되며, 1점이 조금 늦은 AD330~635AD를 나태내고 있어 목탄시료 대부분이 부소산성으로 추측되는 문헌상의 牛頭城 축성 시기 및 사실과 일치하고 있어 더욱더 그 시기가 확실시되고 있다. 이도학 외, 『부소산성을 다시 본다』, 주류성출판사, 2006, 147,148쪽.
  4. 5일 도에 따르면 지난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세계유산 등재 심사를 최종 통과했다. 충청권에서는 이번 세계 유산 등재가 최초다. 백제역사유적지구 총 8개의 유적지들 중 공주지역에 2곳(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부여 4곳(관북리유적 및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나성)이 속해 있다. “충청·백제 유적 최초로 세계반열 올라…공주 2곳, 부여 4곳”, 〈뉴스1〉, 2015년 07월 05일 11:51:43.
  5. 네이버 지식백과, 부소산성(扶餘扶蘇山城)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대백제이야기), 2007., 한국콘텐츠진흥원)
  6. 산정식과 포곡식의 두 형식이 결합해서 성립된 유형을 복합식산성이라고 한다. 이 산성은 규모에 있어서 협소할 수 밖에 없는 산정식산성에, 어떠한 목적에 의해서 그것을 크게 확충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산정식산성과 바로 인접된 지형에 포곡식산성을 접속하여 개축함으로써 만들어진 새로운 형식의 산성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조사 결과 밝혀진 유적으로는 직산 사산성· 서천 건지산성· 남양 당성 등을 들 수 있다. 심정보, 『백제 산성의 이해』, 주류성출판사, 2009, 92쪽.
  7. 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한 결과 군창지소재 테뫼식산성은 통일신라시대의 축성으로 밝혀졌으며, 이 군창지 소재 테뫼식산성을 2구로 구분하기 위하여 남~북으로 축조된 성벽은 조선시대의 축성으로 보고되고 있고, 1996년에 조사된 사비루 소재 테뫼식산성도 통일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어 백제시대에 축조된 성체는 포곡식산성 뿐이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 포곡식산성 토루의 전체 길이는 토루 외곽선을 기준으로 하여 2,495m로 나타났고, 통일신라시대에 초축 또는 보완된 테뫼식산성 토루는 1,576m, 군창지를 둘러싼 테뫼식산성 토루는 840m로 확인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소산성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국의 산성),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8. 네이버 지식백과, 부여부소산성(扶餘扶蘇山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9. 심정보, 『백제 산성의 이해』, 주류성출판사, 2009, 90,91,92쪽.
  10. 이도학 외, 『부소산성을 다시 본다』, 주류성출판사, 2006, 123쪽.
  11. 박순발 외, 『백제의 건축과 토목』,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07, 115쪽.
  12. 위의책, 115,116쪽.
  13. 위의책, 115,116쪽.
  14. 이도학 외, 『부소산성을 다시 본다』, 주류성출판사, 2006, 112쪽.
  15. 위의책, 197쪽.
  16. [네이버 지식백과] 고란사 [皐蘭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7. [네이버 지식백과] 사자루 [泗(水+此)樓] (두산백과)
  18. <삼국유사>에 인용된 백제고기(百濟古記)에 의하면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는 강물에 임하는데, 모든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고 하고, 서로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에 빠져 죽었으므로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巖)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낙화암의 본래 명칭은 타사암이었는데, 뒷날에 와서 궁녀, 즉 여자를 꽃에 비유하고 이를 미화하여 붙인 이름이 분명하다. 이 바위와 관련되어 전해오는 전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용담(勇談)이 많은 영주(英主)였는데, 여러 차례 신라의 여러 고을을 쳐서 천하에 그 성세(聲勢)를 높인 뒤로는 정사는 돌보지 않고 날마다 궁성 남쪽의 망해정(望海亭)에서 궁녀들을 데리고 가무주연(歌舞酒宴)의 향락을 일삼았다....(중략) 이러할 때 일찍이 백제의 침략을 받아온 신라는 무열왕 및 김유신(金庾信) 등의 영주와 명신(名臣)이 나타나서 나라의 힘을 크게 길러 복수를 하고자 당나라 군사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치게 되었다. 이에 백제의 용장 계백(階伯)은 4천의 적은 군사로써 황산(黃山)벌에서 신라 군사와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나당연합군의 수많은 군사가 일시에 수륙 양면에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해오자 왕은 그제야 성충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음을 후회하였다. 왕은 하는 수 없이 해질 때를 기다려 왕자 효(孝)를 데리고 웅진성(熊津城)으로 달아나서 싸웠으나 성문은 부서져 열리고 말았다. 수많은 궁녀들이 슬피 울면서 흉악한 적군에게 굴욕을 당하는 것보다 깨끗하게 죽는 것이 옳다 하여 대왕포(大王浦) 물가 높은 바위 위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사비수 깊은 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이 바위를 낙화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나당연합군의 수많은 군사가 일시에 수륙 양면에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해오자 왕은 그제야 성충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음을 후회하였다. 왕은 하는 수 없이 해질 때를 기다려 왕자 효(孝)를 데리고 웅진성(熊津城)으로 달아나서 싸웠으나 성문은 부서져 열리고 말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낙화암 [落花巖]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 이도학 외, 『부소산성을 다시 본다』, 주류성출판사, 2006, 252,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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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류인태 인문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