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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선은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로서 [[외규장각 의궤]]를 발견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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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를 졸업 후, 1955년 대한민국 여성으로서 최초로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서른 세 살의 나이에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던 것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이 약탈해 간 외규장각 의궤를 꼭 찾아보라는 대학교 시절 스승 이병도의 당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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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근무할 당시의 박병선 박사. 사진은 직지심체요절을 발견한 사실이 보도된 신문기사이다. <ref>[http://snueaa.or.kr/index.php?mid=news&document_srl=55924&listStyle=viewer&page=4 서울대학교 동문소식-故 박병선 박사-프랑스는 해고, 한국 냉대에도...평생 독신으로 약탈 문화재 찾아 2011-11-25(조선일보 1972년 5월 28일자 신문)]</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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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박병선장학금.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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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50주년 기념 폐막미사에서 박병선 박사의 뜻에 따라 도서와 장학금이 인천가톨릭대학교 측에 전달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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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268 2011.11.28 고 박병선 박사 도서 및 장학금 인천가대 기증, 카톨릭뉴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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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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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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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joins.com/article/6737746 이상언. 외규장각 145년 만의 귀환 일등공신 박병선 박사. 중앙일보. 2011년 1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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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5008619 “<인터뷰> 외규장각 도서 첫 발견 박병선박사”. 연합뉴스. 2011년 4월 13일. 2011년 4월 16일에 확인함.]
  
외규장각 의궤는 프랑스에 있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 존재 여부조차 확인할 길이 없어 박병선은 프랑스 전역의 도서관, 고서점 등을 다니며 발품을 팔아야 했다. 그러던 중, 1975년에 외규장각 의궤의 행적을 밝혀 내었다. 20년 동안 찾아 헤매던 이 의궤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베르사유 분관 폐지 창고에 버려지다시피 방치돼 있었다. 이 사실을 한국에 알리자 프랑스는 외규장각 의궤의 존재를 한국에 알렸다는 이유로 그를 권고 사직시키고 ‘한국의 스파이’라는 오명을 씌우기까지 했다. 박병선의 적극적인 노력 끝에 2011년 5월 27일 297책의 외규장각 의궤가 145년 만에 대한민국 땅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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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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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래:최초작성
  
박병선은 벨기에 루뱅에서 동양사학을 전공한 후 파리 제7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7년부터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근무하였고 1967년부터 13년 동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근무하면서 직지심체요절과 외규장각 도서를 발견했다. 직지심체요절의 존재를 처음 발견하여 1972년에 이 사실을 세상에 알렸고, 1975년에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약탈해 간 외규장각 도서를 발견해 대한민국 내 '외규장각 도서 반환 운동'에 불을 지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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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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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박병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가 있던 청사를 찾아내기도 했고, 파리 근교에서 살면서 한국 관련 각종 고서 연구와 프랑스에서 본 한국의 3·1운동 등에 관한 독립운동사를 정리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의 인쇄사’(프랑스어·스페인어·영어·한국어)가 있고, ‘한국의 무속사’, ‘한국의 역사’ 등을 프랑스어로 펴냈다.
 
  
2009년 9월에 병인양요에 대한 한국 사료를 찾으러 방한했다. 이 방한 기간 중에 심한 복통을 일으켜 병원을 찾았는데, 이 때 직장암 4기 선고를 받았고 2009년 12월 7일에 대한민국에서 수술을 하였다. 이후 프랑스로 돌아가 병인양요에 대한 정리 작업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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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인물]] [[분류:오미래]]

2019년 6월 25일 (화) 20:22 기준 최신판

[1]

정의

박병선은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로서 외규장각 의궤를 발견한 인물이다.

내용

1950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를 졸업 후, 1955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이 약탈해 간 외규장각 의궤를 꼭 찾아보라는 대학교 시절 스승 이병도의 당부로 인해 대한민국 여성 최초로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외규장각 의궤는 프랑스에 있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 존재 여부조차 확인할 길이 없어 박병선은 프랑스 전역의 도서관, 고서점 등을 다니며 발품을 팔아야 했다. 1975년이 되어서야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베르사유 분관 폐지 창고에 버려지다시피 방치돼 있던 외규장각 의궤의 행적을 밝혀 내었다. 의궤를 찾기 위해 20년 동안을 찾아 헤매었지만 돌아온 것은 1967년부터 근무하던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서의 권고 사직이었다. 외규장각 의궤의 존재를 한국에 알렸다는 것이 이유였다.심지어는‘한국의 스파이’라는 오명을 씌우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병선은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2]의 도움을 받아 『조선조의 의궤』를 펴내 프랑스국립도서관의 의궤도서들의 서지사항을 제시하고 국내 기관에 수장된 의궤도서들과 비교하였다. 그리고 1989년에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의궤도서들에 대한 해제 작업을 더 발전시켜 『왕실의궤』 해제서를 내는 작업을 진행했다. 아울러 프랑스어로 원고를 작성하여 이를 출판하고자 하였다. 의궤도서의 중요성을 프랑스 학계에 알리기 위한 작업이었다. 1980년부터 시작된 해제 작업은 10년이 걸려 1990년이 되어서야 끝났다. 그러나 상업성이 없어 프랑스에서 출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고 1992년이 되어서야 불어판 해제서가 세상에 나왔다.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박병선이 일하고 있던 프랑스의 학술원에 해당하는 콜레주 드 프랑스 두 기관이 공동 출판으로 하여 의궤도서의 중요성을 프랑스 석학들에게 알리는 기회가 되도록 배려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열정은 대한민국 내 '외규장각 도서 반환 운동'에 불을 지폈다. 결국 2011년 5월 27일, 297책의 외규장각 의궤가 145년 만에 대한민국 땅으로 돌아왔다.

[3]

멀티미디어

이미지

박병선.jpg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근무할 당시의 박병선 박사. 사진은 직지심체요절을 발견한 사실이 보도된 신문기사이다. [4]

박병선장학금.jpg

인천교구 50주년 기념 폐막미사에서 박병선 박사의 뜻에 따라 도서와 장학금이 인천가톨릭대학교 측에 전달되는 모습이다. [5]

동영상

참고문헌

이상언. 외규장각 145년 만의 귀환 일등공신 박병선 박사. 중앙일보. 2011년 11월 24일.
“<인터뷰> 외규장각 도서 첫 발견 박병선박사”. 연합뉴스. 2011년 4월 13일. 2011년 4월 16일에 확인함.

기여

오미래:최초작성

주석

  1. ‘직지의 대모’ 고 박병선 박사의 일생, 여성신문
  2. 현재의 한국학중앙연구원
  3. 박병선(역사학자),위키백과
  4. 서울대학교 동문소식-故 박병선 박사-프랑스는 해고, 한국 냉대에도...평생 독신으로 약탈 문화재 찾아 2011-11-25(조선일보 1972년 5월 28일자 신문)
  5. 2011.11.28 고 박병선 박사 도서 및 장학금 인천가대 기증, 카톨릭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