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묄렌도르프의 저택"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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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던 해에 묄렌도르프가 자신의 집을 보호하기 위해 보초까지 세웠지만 결국 크게 손상되었으며 한 건물은 완전히 불타버리기까지 하였다. 언더우드가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1885년 4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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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던 해에 묄렌도르프가 자신의 집을 보호하기 위해 보초까지 세웠지만 결국 크게 손상되었으며 한 건물은 완전히 불타버리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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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편지1 : [[Letter From Underwood To Ellinwood (18850426)|1885년 04월 26일 언더우드가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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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9일 (화) 22:17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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묄렌도르프의 저택
[[file:|270px|thumb|center|]]
한글명 묄렌도르프의 저택
영문명 Site of Möllendorff, P. G. von's House
한자명 穆麟德邸宅
유형 건축물
형태 부존
위도 37.573934
경도 126.981112


기본 정보

  • 서울시 수송동 수송공원 일대로 추정되는 묄렌도르프의 저택.
  • 독일 출신의 묄렌도르프는 목인덕(穆麟德)으로도 불리며 조선 말에 통리아문의 참의(參議)·협판(協辦)을 역임하면서 외교와 세관업무를 맡았다.
  • 조선 정부에서 마련해준 집은 당대의 척신(戚臣) 민겸호가 살던 저택이었다.
  • 묄렌도르프가 떠난 뒤 독일공사관으로 쓰이다가 육영공원의 두 번째 교사가 되었고, 경운궁이 대한제국의 새 황궁이 된 뒤에는 왕후가 관할하던 궁집인 용동궁이 옮겨왔다. 1906년에는 황귀비 엄씨가 이 궁에 숙명여자대학교의 전신인 명신여학교를 세웠으며, 1910년에는 조계사의 전신인 각황사가 자리를 잡았다. 서울 최초의 한양(韓洋) 절충 가옥이던 묄렌도르프의 저택은 이 과정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상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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