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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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민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6월 17일 (월) 22:0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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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온수리성공회성당 [江華溫水里聖公會聖堂 ]



개관

1906년 영국인 주교 트롤로프(Mark N. Trollope)가 지은 성당 건물로 우리나라의 초기 서양 기독교 교회양식의 목조건물이다. 성당건축 방법과 공간 구성이 동서 절충식 강당형의 모습을 하고 있어 종교사 및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2003년 10월 27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었다.이 성당은 강화읍의 강화성당(1900, 사적424호)과 달리 선교본부의 지원이나 선교사들의 주도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신도들 스스로가 땅을 헌납하고, 자금을 마련하고 스스로의 노력봉사로 지은 성당이다. 강화읍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 자락의 야트막한 언덕에 위치하여 눈앞에는 초지(草芝)들판이 펼쳐지고 염하 물줄기와 서해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영국 성공회의 전래

영국 성공회의 강화 선교는 1893년에 시작되었다. 1890년 9월에 내한한 코프(C.J.Corfe) 주교는 제물포에서 병원사업을 시작하여 서울 정동 등에서 교회와 병원사업을 준비하였다. 1893년 7월 성공회 워너(L.O. Warner) 신부는 갑곶진에 집을 마련하고 왕래하는 강화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선교를 했으나 외국인에 대한 조선인들의 경계가 심하여 선교 초기 어려움을 겪었다. 워너는 고아들을 모아 영국식 기숙사제도를 도입하여 양육하면서 교리를 가르쳐 1896년 에 5명의 고아들에게 세례를 하였는데 그의 헌신적인 양육화동에 감명받은 주민들도 성공회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인 김희준(金熙俊)은 1897년 11월 제물포에 세례를 받고 이후 성공회 선교활동에 참여하다가 1915년 12월 한국인 최초 성공회 사제로 서품을 받기도 하였다. 워너가 건강문제로 귀국하자 트롤로프(M.N.Trollope) 신부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영국이 강화도를 선교의 거점으로 삼았던 동기는 강화도가 영국 성공회의 뿌리가 되었던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 서안에 있는‘아이오나(Iona)섬’과 유사한 입지인데다 병인·신미양요를 경험한 강화도민들이 프랑스나 미국에는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수군양성을 위해 강화도에 들어갔었던 영국인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점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강화도는 유배지로 역사적으로 많은 소외와 압박을 받았고, 그전까지는 교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지역으로 파악되었다. [1]

트롤로프의 선교활동

1911년 대한성공회 제 3대 주교로 부임하였다. 트롤로프는 1900년 11월 '성바우로봐 성베드로 회당'으로 봉헌된 강화읍성당을 건축한 인물이기도 하다. 강화읍성당은 한국 토착화에 대한 성공회의 관심을 그대로 드러낸 것ㅇ로서 건물 외형은 전통 한옥으로 꾸몄고, 내부는 전통 한옥 자재를 쓰되 배치는 중세 서양 성당 건축 양식인 바실리카 로마네스크 혼합 양식을 사용하였다. 이후 트로로프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의 필요서을 절감하고, 1914년 1월 강화에 '성미가엘수도원'을 설립하였다. 이 신학원은 1921년 인천으로 이전할 때까지 성공회의 유일한 신학교육기관으로 초기 성직자와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1916년 트롤로프 주교는 전국 성공회 조직을 정비하면서 전국을 6개 전도구로 나누었는데 강화전도구에만 14개 교회가 소속되어 전도구 65개 교회 가운데 20%가 강화에 집중되었다.

건축

본채인 예배당 건물과 2층 종탑 건물로 구성되어있다. 초기 서양 기독교 양식의 2고주(高柱) 5량가(梁架)의 합각지붕 건물로, 성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중앙 1칸을 2층 종루로 삼은 문루와 정면 9칸 측면 3칸의 본당으로 이루어져있다. 원래 본채 건물의 외벽은 목조기둥이었다고 하나 현재는 조적조로 변형되어 있는데, 서도의 중앙교회 건물 구조 및 양식과 매우 흡사하다. 성당 정면은 건물의 서면으로 출입구이고, 중앙 칸에는 두 짝의 양식 판문(板門)의 문비(門扉)를 달았다. 양측 칸은 중앙에 유리창문을 설치했고 중방 밑은 벽돌을 쌓아 벽체로 하였다. 기둥 위 창방과 납도리 사이에는 접시받침을 배치하여 건물의 격을 높였다. 건물의 동면은 중앙 칸에 양식 판문 한 짝을 설치하여 본당 뒷문으로 삼았고, 양측 칸은 중방 위에 작은 유리창을 달았다. 건물의 남면은 양단 한 칸만 기둥위 창방과 납도리 사이에 접시받침을 설치하였다. 강화읍 성당과 유사하게 외삼문형식의 종루를 통해 진입하나 당시 무덤이 많았던 주변의 대지조건 때문에 종루와 성당, 그리고 사제관이 일직선 축이 아니다.

본당

성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중앙 1칸을 2층 종루로 삼은 문루와 정면 9칸 측면 3칸의 본당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본당 내부는 중앙에 두 줄의 고주(高柱)를 세우고 비교적 가는 부재(部材)로 된 보를 걸었으며, 고주 머리에서 보 밑을 초공으로 받쳤다. 보 위 중앙에는 판대공(板臺工)으로 마루도리를 받쳤으며, 마루도리 밑에는 직접 장혀[長舌]을 붙이지 않고 접시받침을 배치하고 접시받침 밑에 장혀형 장재(長材)를 걸었다. 본당의 중방 밑 벽돌벽은 20년 전에 기둥하부 부식이 심하여 절단하고 중방 밑 전체를 벽돌벽으로 보수한 것이다. 원래는 입방체 화강석 기초 위에 세워진 2조 호형(弧形)으로 귀깍음한 각주(角柱)의 벽체는 전통기법의 회벽처리로 마감하였다. 현재 화강암 초석은 부근에 보존되고 있다.

종루

종루 건물은 원래 모두 전통 목재건축기법으로 축조한 것으로 현존 건물과 같은 모습의 건물이었으나, 본당 보수시 부식이 심했던 기둥과 벽체를 모두 해체하고 시멘트 블록으로 축조하고, 지붕만 목조건축으로 꾸민 것이다.

지붕

지붕은 전통기와로 덮었으며, 처마는 홑처마로서 팔작지붕이다. 용마루 양끝에는 연꽃 모양으로 된 곡선미를 살린 돌십자가가 달려 있고, 합각 중앙에는 십자가 모양으로 붉은 벽돌을 쌓았다.

사제관

성당과 거의 돌아앉은 사제관(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은 트롤로프신부가 1896년 강화도에 부임하여 선교를 시작하면서 2년 후인 1898년에 건축한 건물이다. 이후 사제관이 퇴락하자 1933년 원형 그대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사제관은 영국 성공회가 선교를 시작하면서 영국인 사제가 한국 전통 주거문화 속에 어떻게 적응하여 왔는가를 짐작하게 할 수 있는 주거공간이다.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바실리카양식

온수리성당 내부는 강화성당과 마찬가지로 '바실리카' 양식으로 열두 사도를 상징하는 열두 개 기둥으로 지성소와 회중석을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강화성당의 구조와 달리 회중석 가운데 복도가 남녀석을 구분하고, 후진이나 고창(Clear story) 같은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은 생략되었다.

사진

위치

관련 사이트

출처

  1. 『신편 강화사』상편, 강화군 군사편찬위원회, 2003.

기여

일자 역할 이름 전공
2019.4. 편집 이수민 인문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