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연군묘 도굴 사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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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기록들 가운데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저자와 저서로는 여행가이자 화가이면서 1895년『고요한 아침의 나라 - 조선(Corea or Cho-Se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을 간행한 A. H. 새비지-랜도어(Arnold HenrySavage-Landor, 1865-1924),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을 쓴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 『은자의 나라 조선(The Hermit Nation)』을 출간한 그리피스(William Eliot Griffis, 1843-1948),『대한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을 저술한 메켄지(Frederick A. Mckenzie, 1869-1931) 등이 있다.<ref>이배용, 「서양인이 본 한국 근대사회」,『이화사학연구』28집, 2001, p.107~109 (박재영, 「역사적 스테레오타입 사례연구」,『한․독사회과학논총』17권, 2007에서 재인용). 이외에도 제이콥 로버트 무스(J. R. Moose),『1900, 조선에 살다(Village Life in Korea)』/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내 기억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에밀부르다레(Émile Bourdaret),『대한제국 최후의 숨결(En coree, plon-nourrit)』/ L.H.언더우드(Lillias Horton Underwood),『상투의 나라(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W.F.샌즈(William Franklin Sands),『조선 비망록(Undiplomatic memories)』/ C.W.켄달(Carlton Waldo Kendall), 『한국 독립운동의 진상(The truth about Korea)』등의 많은 책들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책들은 저자들 가운데 짧은 기간 조선을 여행하고 서술하거나 조선 여행은 경험도 없이 자료만 보고 서술한 것들도 있어 유의할 필요가 있다.</ref> 이 외에도 많은 책들이 19세기 조선을 묘사하고 있지만 여기서 남연군 묘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인물과 저서는 E.J.오페르트(Ernst Jacob Oppert,1832-1903)의『금단의 나라 조선(A forbidden land vouages to the Corea)』이다. 왜냐하면 그가 남연군 묘의 도굴을 시도함으로써 조선이 대내외적으로 서양과의 관계를 제한하고 서양을 물리치는 정책[鎖國攘夷政策]이 보다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19세기말 조선의 국내외적 상황을 살펴보며 오페르트 도굴사건을 통해 남연군 묘가 갖는 역사적 의의를 알아보고자 한다.
 
이러한 기록들 가운데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저자와 저서로는 여행가이자 화가이면서 1895년『고요한 아침의 나라 - 조선(Corea or Cho-Se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을 간행한 A. H. 새비지-랜도어(Arnold HenrySavage-Landor, 1865-1924),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을 쓴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 『은자의 나라 조선(The Hermit Nation)』을 출간한 그리피스(William Eliot Griffis, 1843-1948),『대한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을 저술한 메켄지(Frederick A. Mckenzie, 1869-1931) 등이 있다.<ref>이배용, 「서양인이 본 한국 근대사회」,『이화사학연구』28집, 2001, p.107~109 (박재영, 「역사적 스테레오타입 사례연구」,『한․독사회과학논총』17권, 2007에서 재인용). 이외에도 제이콥 로버트 무스(J. R. Moose),『1900, 조선에 살다(Village Life in Korea)』/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내 기억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에밀부르다레(Émile Bourdaret),『대한제국 최후의 숨결(En coree, plon-nourrit)』/ L.H.언더우드(Lillias Horton Underwood),『상투의 나라(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W.F.샌즈(William Franklin Sands),『조선 비망록(Undiplomatic memories)』/ C.W.켄달(Carlton Waldo Kendall), 『한국 독립운동의 진상(The truth about Korea)』등의 많은 책들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책들은 저자들 가운데 짧은 기간 조선을 여행하고 서술하거나 조선 여행은 경험도 없이 자료만 보고 서술한 것들도 있어 유의할 필요가 있다.</ref> 이 외에도 많은 책들이 19세기 조선을 묘사하고 있지만 여기서 남연군 묘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인물과 저서는 E.J.오페르트(Ernst Jacob Oppert,1832-1903)의『금단의 나라 조선(A forbidden land vouages to the Corea)』이다. 왜냐하면 그가 남연군 묘의 도굴을 시도함으로써 조선이 대내외적으로 서양과의 관계를 제한하고 서양을 물리치는 정책[鎖國攘夷政策]이 보다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19세기말 조선의 국내외적 상황을 살펴보며 오페르트 도굴사건을 통해 남연군 묘가 갖는 역사적 의의를 알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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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1866년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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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純祖)의 장자(長子)였던 익종(翼宗)이 대리청정 4년만에 죽고 그의 아내 조대비(趙大妃)는 아들 헌종(憲宗)이 왕위에 올라 왕대비가 되었다. 그 후 1857년 순조비(純祖妃)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죽자 대왕대비(大王大妃)가 된 조대비(趙大妃)는 왕실 최고 어른이 된다.<ref>『고종실록』 27년 8월 30일 기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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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12월 8일 철종(哲宗)이 후사가 없이 사망하자 조대비는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아들 명복(命福)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고 흥선군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으로 봉한다. 하지만 당시 12세였던 명복은 정사를 바로 맡아 볼 수 없었고 조대비(趙大妃)는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ref>『고종실록』 1권, 즉위년 12월 8일 기사</ref> 그러나 대왕대비는 나랏일이 많고 어려우며 새로운 왕은 어려 대원군에게 명하여 정사를 섭행(攝行)하도록 하였다.<ref>박은식 저/김태웅 역해, 『한국통사』,아카넷, 2012. 조선은 종친(宗親)이 국정에 관여할 수 없다. 그래서 실록에서 직접적으로 대원군(大院君)에게 국정 참여를 지시하는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실록에서 대원군 궁을 수축하고(『고종실록』1권, 1월 7일), 대원궁 궁과 금위영을 가로막은 담장에 문을 세워 동가(動駕)하는 길을 편리하게 하라는 기사(『고종실록』1권, 즉위년 6월 6일)를 시작으로 신정왕후가 경복궁 재건에 관한 사항을 대원군에게 맡긴다는 기사(『고종실록』2년, 4월 3일)와 고종이 대원군에게 품정(稟定),품의(稟議),품처(稟處)하라는 기사등에서 대원군이 국정운영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고종 10년 윤6월 20일 대원군을 존대하여 대로로 부르기로 한 기사에서 고종즉위 후 10년 동안 대원군이 조선 정치의 중심에 서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위의 박은식과 같이 흥선대원군의 정치 참여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내용은 현채(玄采)의 『동국사략(東國史略)』 4권, 근세사(近世史)에 “趙后詔命을 下하조선 기행문야 嗣王이 年幼하고 國事가 多難하니 大院君이 大政을 協贊하고...百官有司로 하여금 大院君의 指揮를 聽하라하고...政權이 全혀 大院君에게 歸하야..”에서도 발견할 수 있고. 특히 황현(黃玹)의 『매천야록』에서는 “운현(대원군)이 국정을 맡아보던 1864년에서 1873년에 이르는 10년 동안....교령(敎令)을 내릴 때 반드시 ‘왕약왈(王若曰)’로 첫 머리를 삼는데, 그 10년 동안 ‘대원위분부(大院位分付)라는 다섯 자로 내외에 온통 행해졌다...’”는 언급등 대원군의 정치 참여와 그 영향력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ref> 고종 즉위 후 10년간 흥선대원군은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 ‘국태공(國太公)’, ‘대로(大老)’  등으로 불리며 정치에 중심에 서게 된다.<ref>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37권, 탐구당, 200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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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은 오랜 세도정치(勢道政治)<ref>세도정치(勢道政治): 조선후기 특히 19세기에 한 명 혹은 극소수의 권세가를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던 정치형태.</ref>로 인한 정치질서 붕괴, 삼정(三政)의 문란<ref>삼정(三政)의 문란: 조선 재정의 주류를 이루던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 세가지 수취체제가 변질되어 부정부패로 나타난 현상.</ref>에 의한 전국적 규모의 농민 봉기, 천주교와 동학(東學)의 유행, 자본주의 열강들의 국제적 통상 요구등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특히 여기서는 천주교의 유행<ref>조선은 신해박해(1791), 신유사옥(1801), 기해사옥(1839)등 세 차례의 대금압령에 의해 천주교를 거의 발본색원 하였다. 그러나 1845년 다블뤼 주교가 김대건의 안내로 해로를 통해 밀입국한 것을 시작으로 1866년까지 프랑스 예수회 소속 선교사는 주교 2명, 신부 10명 등 총 12명이 조선에서 포교활동을 벌이고 있었고 전국적 신자수는 대략 2만 3천명에 이르고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37권, 탐구당, 2000.)</ref>과 제국주의 국가들의 통상 요구와 관련된 부분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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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남하와 천주교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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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부터 그 다음해인 1865년까지 러시아는 네 차례나 조선의 국경을 넘나들며 통상을 요청하였다. 당시 조선 정부는 러시아의 한반도 침략위협에 대한 방어대책 수립이 당면과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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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지도자였던 홍봉주(洪鳳周), 김면호(金冕浩), 이유일(李惟一), 남종삼(南鍾三)등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정치개입으로 러시아세력을 막아줌으로써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 최선이라 결론 내리고 대원군과 교섭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당초 프랑스 세력만 끌어들이려 했으나, 애로호사건 때 영국과 프랑스가 북경침공을 벌인 사실을 감안, 영국세력까지 끌어들인 <한․영․불 3국 동맹안>을 바탕으로 <방아책 건의문>을 작성, 대원군에게 전달하기로 결의 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흥선대원군은 이 방아책에 부정적 반응을 보였고, 여흥부대부인민씨(驪興府大夫人閔氏)<ref>여흥부대부인민씨(驪興府大夫人閔氏):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부인. 민치구(閔致久)의 딸. 일찍이 가톨릭을 믿어 일과문(日課文)을 읽었다. 1863년 둘째아들 명복(命福: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운현궁(雲峴宮)에서 감사 미사를 올렸으며, 그 해 12월 여흥부대부인으로 봉작되었다. 1866년 고종비(妃)를 간택할 때는 친정의 일족인 여성부원군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천거, 왕비로 책봉하게 하였다. 1896년 10월 주교(主敎) 뮈텔로부터 영세를 받았다.</ref>의 격려를 받은 남종삼은 <새 건의문>을 가지고 대원군을 만나 긍정적 반응을 이끌어 내어 베르뇌, 다블뤼 주교를 서울로 불러 오게 하였으나 베르뇌 주교는 “선교사가 정치에 관여할 수 없다”는 소극적 반응을 보여 대원군의 격노를 샀다.<ref>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37권, 탐구당, 200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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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조선에서는 천주교를 반대하는 기운이 높아져 고종 3년(1866) 초부터 천주교 금압령이 내려져 몇 개월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을 비롯하여 한국인 천주교도 8,000명이 죽는 병인사옥(丙寅邪獄)이 일어난다.<ref>이주천/김진환, 「병인양요의 재조명」,『열린정신 인문학연구』8집, 200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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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사옥의 발생은 프랑스 선교사의 정치개입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시되고 있다. 그 이유는 주교와의 만남까지 허용했음에도 주교들이 소극적으로 대응하여 대원이은 선교사들이 단순히 포교만이 아니라 정치적 불안을 조성하는 것으로 의심하게 되었고 당시 상해(上海) 프랑스 영사도 선교사의 조선 정치간여를 시인하고 있기 때문이다.<ref>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37권, 탐구당, 200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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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사옥의 화를 면한 리델(Felix-Clair Ridel, 1830~1884)신부는 중국으로 탈출해 주중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Roze, P.G, 魯勢)에게 박해 소식을 알리면서 보복 원정을 촉구했다. 이에 로즈가 대함대를 이끌고 내침, 한불간의 군사적 충돌이 야기되었다. 이것이 곧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이다. 이 사건은 같은 해 일어난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함께 조선의 대외정책에 있어 분수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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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丙寅洋擾)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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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한 리델신부로부터 조선에서의 프랑스 선교사 처형 소식을 전해들은 북경주재 프랑스 공사 벨로네(Claude M.Henri de Bellone, ?~1881)는 청의 공친왕(1833~1898)에게 서한을 보내, 가까운 시일 내에 함대를 파견하여 조선을 원정할 것임을 공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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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소왕국에서 저지른 무시무시한 폭행을 전하에게 공식적으로 알려드림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프랑스 황제는 이렇게 잔인한 폭행이 처벌되지 않는 것을 허락할 수 없을 것입니다. 조선의 국왕이 우리의 불행한 동포들을 체포한 바로 그 날은 그가 통치하는 최후의 날이며, 조선 국왕은 그의 멸망을 스스로 선언하였다고 본인은 오늘 엄숙하게 선언하는 바입니다. 며칠 후 우리의 군대는 조선을 정복하러 진군할 것이며 우리의 존엄한 (프랑스) 황제만이 이제 조선과 주인 없는 공석의 왕위를 규정할 권리와 권한을 갖습니다. 중국정부는 조선에 대해 권한도 권리도 없음을 본인에게 수차 선언한 바 있으니,…이제 조선왕국에 대한 중국 정부의 아무런 권위도 인정하지 않음을 분명히 해두는 바입니다(1866년 7월 13일자=음 6월3일 서한)<ref>󰡔淸季中日韓關系史料󰡕2권, 27쪽; 󰡔籌辦夷務始末󰡕6권, 1012쪽; “Bellonet à Prince de Kung”(13 Jeuillet 1866),Correspondance politique, Chine, no. 41, pp. 293~294; 최석우(역), 「한불관계자료」, 󰡔교회사연구󰡕,2집(1979), 205쪽; “Bellonet to Prince Kung”(July 13. 1866), U.S. Department of State,Diplomatic Correspondence, China⋅Japan(Washington: Government Printing Office, 1866~1882), pp. 420~423. (강상규,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정치학적 고찰」,『정신문화연구』30집, 2007.에서 재인용)</ref>
  
  

2016년 4월 15일 (금) 23:16 판

들어가며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위치한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 남연군 묘의 주인인 남연군(南延君, 1788~1836)[1]의 이름은 이채중(李寀重)이다. 그는 인조(仁祖)의 3남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의 5대손 병원(秉源)의 둘째 아들이다. 그런데 장헌세자(莊獻世子)[2]의 서자인 이복동생 은신군(恩信君)[3] 진(禛)에게 후손이 없어 순조(純祖) 때 이채중으로 하여금 후사를 잇게 하며 이름을 구(救)로 고치고 남연군의 칭호가 하사되었다.[4]

처음 마전 백자동에 있던 남연군 묘[5]는 연천 남송정으로 이장되고 1845년에 덕산 가야산 북쪽 기슭에 옮겨졌다가 1846년 3월18일에 지금의 위치로 완전히 이장되게 된다.[6] 그리고 이 묘를 이장하며 이용된 남은들 상여[7]가 아직도 전해진다. 그런데 남연군은 그 아들과 손자 때문에 더 유명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 아들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 ~ 1898)이며 손자는 조선 26대 왕 고종(高宗,1852-1919)이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조선은 국내외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서양 제국주의의 물결 속에서 조선은 동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접촉하고 부딪히고 있었고 그 가운데 이하응이 국내 정치의 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조선에서의 체험을 기록한 서양인들은 그 모습을 다양하게 책으로 소개한다.

이러한 기록들 가운데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저자와 저서로는 여행가이자 화가이면서 1895년『고요한 아침의 나라 - 조선(Corea or Cho-Se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을 간행한 A. H. 새비지-랜도어(Arnold HenrySavage-Landor, 1865-1924),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을 쓴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 『은자의 나라 조선(The Hermit Nation)』을 출간한 그리피스(William Eliot Griffis, 1843-1948),『대한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을 저술한 메켄지(Frederick A. Mckenzie, 1869-1931) 등이 있다.[8] 이 외에도 많은 책들이 19세기 조선을 묘사하고 있지만 여기서 남연군 묘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인물과 저서는 E.J.오페르트(Ernst Jacob Oppert,1832-1903)의『금단의 나라 조선(A forbidden land vouages to the Corea)』이다. 왜냐하면 그가 남연군 묘의 도굴을 시도함으로써 조선이 대내외적으로 서양과의 관계를 제한하고 서양을 물리치는 정책[鎖國攘夷政策]이 보다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19세기말 조선의 국내외적 상황을 살펴보며 오페르트 도굴사건을 통해 남연군 묘가 갖는 역사적 의의를 알아보고자 한다.

1864-1866년 조선

순조(純祖)의 장자(長子)였던 익종(翼宗)이 대리청정 4년만에 죽고 그의 아내 조대비(趙大妃)는 아들 헌종(憲宗)이 왕위에 올라 왕대비가 되었다. 그 후 1857년 순조비(純祖妃)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죽자 대왕대비(大王大妃)가 된 조대비(趙大妃)는 왕실 최고 어른이 된다.[9]

1863년 12월 8일 철종(哲宗)이 후사가 없이 사망하자 조대비는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아들 명복(命福)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고 흥선군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으로 봉한다. 하지만 당시 12세였던 명복은 정사를 바로 맡아 볼 수 없었고 조대비(趙大妃)는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10] 그러나 대왕대비는 나랏일이 많고 어려우며 새로운 왕은 어려 대원군에게 명하여 정사를 섭행(攝行)하도록 하였다.[11] 고종 즉위 후 10년간 흥선대원군은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 ‘국태공(國太公)’, ‘대로(大老)’ 등으로 불리며 정치에 중심에 서게 된다.[12]

당시 조선은 오랜 세도정치(勢道政治)[13]로 인한 정치질서 붕괴, 삼정(三政)의 문란[14]에 의한 전국적 규모의 농민 봉기, 천주교와 동학(東學)의 유행, 자본주의 열강들의 국제적 통상 요구등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특히 여기서는 천주교의 유행[15]과 제국주의 국가들의 통상 요구와 관련된 부분을 살펴보자.

러시아 남하와 천주교 박해

1864년부터 그 다음해인 1865년까지 러시아는 네 차례나 조선의 국경을 넘나들며 통상을 요청하였다. 당시 조선 정부는 러시아의 한반도 침략위협에 대한 방어대책 수립이 당면과제가 되었다.

천주교 지도자였던 홍봉주(洪鳳周), 김면호(金冕浩), 이유일(李惟一), 남종삼(南鍾三)등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정치개입으로 러시아세력을 막아줌으로써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 최선이라 결론 내리고 대원군과 교섭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당초 프랑스 세력만 끌어들이려 했으나, 애로호사건 때 영국과 프랑스가 북경침공을 벌인 사실을 감안, 영국세력까지 끌어들인 <한․영․불 3국 동맹안>을 바탕으로 <방아책 건의문>을 작성, 대원군에게 전달하기로 결의 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흥선대원군은 이 방아책에 부정적 반응을 보였고, 여흥부대부인민씨(驪興府大夫人閔氏)[16]의 격려를 받은 남종삼은 <새 건의문>을 가지고 대원군을 만나 긍정적 반응을 이끌어 내어 베르뇌, 다블뤼 주교를 서울로 불러 오게 하였으나 베르뇌 주교는 “선교사가 정치에 관여할 수 없다”는 소극적 반응을 보여 대원군의 격노를 샀다.[17]

때마침 조선에서는 천주교를 반대하는 기운이 높아져 고종 3년(1866) 초부터 천주교 금압령이 내려져 몇 개월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을 비롯하여 한국인 천주교도 8,000명이 죽는 병인사옥(丙寅邪獄)이 일어난다.[18]

병인사옥의 발생은 프랑스 선교사의 정치개입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시되고 있다. 그 이유는 주교와의 만남까지 허용했음에도 주교들이 소극적으로 대응하여 대원이은 선교사들이 단순히 포교만이 아니라 정치적 불안을 조성하는 것으로 의심하게 되었고 당시 상해(上海) 프랑스 영사도 선교사의 조선 정치간여를 시인하고 있기 때문이다.[19]

병인사옥의 화를 면한 리델(Felix-Clair Ridel, 1830~1884)신부는 중국으로 탈출해 주중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Roze, P.G, 魯勢)에게 박해 소식을 알리면서 보복 원정을 촉구했다. 이에 로즈가 대함대를 이끌고 내침, 한불간의 군사적 충돌이 야기되었다. 이것이 곧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이다. 이 사건은 같은 해 일어난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함께 조선의 대외정책에 있어 분수령이 된다.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전개

조선을 탈출한 리델신부로부터 조선에서의 프랑스 선교사 처형 소식을 전해들은 북경주재 프랑스 공사 벨로네(Claude M.Henri de Bellone, ?~1881)는 청의 공친왕(1833~1898)에게 서한을 보내, 가까운 시일 내에 함대를 파견하여 조선을 원정할 것임을 공언한다.

조선의 소왕국에서 저지른 무시무시한 폭행을 전하에게 공식적으로 알려드림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프랑스 황제는 이렇게 잔인한 폭행이 처벌되지 않는 것을 허락할 수 없을 것입니다. 조선의 국왕이 우리의 불행한 동포들을 체포한 바로 그 날은 그가 통치하는 최후의 날이며, 조선 국왕은 그의 멸망을 스스로 선언하였다고 본인은 오늘 엄숙하게 선언하는 바입니다. 며칠 후 우리의 군대는 조선을 정복하러 진군할 것이며 우리의 존엄한 (프랑스) 황제만이 이제 조선과 주인 없는 공석의 왕위를 규정할 권리와 권한을 갖습니다. 중국정부는 조선에 대해 권한도 권리도 없음을 본인에게 수차 선언한 바 있으니,…이제 조선왕국에 대한 중국 정부의 아무런 권위도 인정하지 않음을 분명히 해두는 바입니다(1866년 7월 13일자=음 6월3일 서한)[20]



개관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에 있는 조선 중기 파평 윤씨 문중에서 운영해 오던 서당으로, 종학당의 전신은 현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약 50m 거리에 있는 정수루이다. 정수루는 누각과 서재가 있어 선비들이 학문을 토론하며 시문을 짓던 장소였다. 정수루 정면 중앙에는 정수루(淨水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좌우로 향원익청(香遠益淸), 오가백록(吾家白鹿)이란 현판이 각각 걸려 있다. 호암산을 배산(背山)으로 두고 앞쪽에 종학당을, 뒤쪽에 정수루와 숙사를 두고 있다.

종학당은 파평 윤씨 문중에서 수백 년간 운영해 오던 서당으로, 종중의 자제와 문중의 내외척, 처가의 자제들까지 합숙, 교육시키기 위해 1643년(인조 21) 윤순거[21]가 건립한 교육 도장이다. 건립 당시 윤순거는 파평 윤씨 문중 자제의 교육 기틀을 마련하기 위하여 종제 윤원거, 아우 윤선거와 함께 종약 및 가훈을 제정하고, 파평 윤씨 종학당을 건립했다. 또한 책, 기물, 재산 등을 마련하고 윤순거 자신이 초대 당장이 되어 초창기 학사 운영의 기반을 닦았다. 1910년 한일 합병 전까지 교육이 이루어졌으나 신교육의 도입으로 폐쇄되고 말았다.[22] 이후 화재로 인해 없어졌다가 1970년 윤정규가 지금의 종학당을 다시 지었다.

화재로 인해 없어졌다가 1970년 윤정규가 지금의 종학당을 다시 지었는데, 앞면 4칸·옆면 2칸으로 가운데 2x2칸은 대청을 겸한 트인 마루를 두었고 양쪽 칸은 방을 설치하였다. 또한 1999~2003년에 4년여에 걸쳐 원형을 복원하고 주변정비를 하였다.[23]

종학당의 형태

종학당은 동향에 가까운 동남향으로 서 있으며 주변은 담을 둘러 구획하였다. (그림 1) 과 같이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그림 2)와 같이 평면은 가운데 1칸은 대청마루로 삼고, 양쪽에는 각각 온돌방을 두었다. 양 측면의 온돌방 앞마루는 가운데 대청마루보다 1자 정도 높였다. 앞면의 기단(基壇)은 자연석 바른층쌓기로 3자 정도로 높였고, 가운데에 계단을 두었다. 초석은 커다란 막돌 덤벙주초를 놓았고, 기둥은 방주를 썼으며, 기둥 부재는 약 6치 각으로 그리 견실하지는 않다. 대청마루 앞면에는 창호를 달지 않았고, 대청과 온돌방 사이에는 3분합 문 열개를 달아 필요에 따라 방과 대청을 터서 큰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24]

사진 및 도면

사진

도면

관련 사이트

참고문헌

  • 李南奭, 「公州 宋山里 古墳群과 百濟 王陵」, 『百濟硏究』27, 1997.
  • 이남석, 「공주지역 백제문화유적의 유산적 가치-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검토-」, 『백제문화』40, 2009.
  • ‘공주 송산리 고분군’, 국가문화유산포털(http://www.heritage.go.kr/), 문화재청, (검색일자 2016.4.6.).
  • ‘공주송산리고분군(公州宋山里古墳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한국학중앙연구원, (검색일자 2016.4.6.).
  • ‘무령왕릉(武零王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한국학중앙연구원, (검색일자 2016.4.7.).

답사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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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 남연군의 몰년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나 전주이씨대종향약원의 인물 소개에 따르면 모두 생년 미상, 몰년 1822년으로 표시되고 있다. 하지만 남연군의 신도비에 생년을 정종 무신 8월22일, 몰년을 헌종 병신 3월 19일로 표시하고 있다.
  2. 장헌세자((莊獻世子, 1735~1762): 조선 21대 왕 영조의 둘째 아들. 이름은 선(愃). 부인은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惠慶宮) 홍씨. 이복형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일찍 죽자 2세 때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10세 때 소론이 일으켰던 신임사화를 비판했으며, 사대부의 의리와 절개를 중시하는 청류(淸流)에 호응함으로써 노론과 갈등을 빚었다. 1749년 왕을 대신해 정치를 행하기 시작했으나 노론과의 갈등은 심해졌다. 세자의 서정(庶政)으로 장인인 영의정 홍봉한 등의 세력이 커지자 노론과 계비 김씨, 숙의 문씨 등은 세자에 대한 무고를 계속했으며,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金漢耈)와 그 일파인 윤급(尹汲) 등은 세자의 폐위를 꾀했다. 이에 세자는 곧 정치에 싫증을 느꼈으며 또한 악질에 걸려 고통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비행 10여 조를 적은 상소를 올리자 노한 영조는 나경언을 사형에 처하는 한편, 세자에게도 자결을 명했으나, 세자가 이를 듣지 않자 뒤주 속에 가두어 8일 만에 굶어죽게 했다. 영조는 곧 후회, 위호(位號)를 복귀시키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한국사사전편찬회 지음,『한국고중세사사전』,가람기획, 2007.)
  3. 은신군(恩信君, 1755~1771): 이름은 진(禛).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서자. 정조의 이복동생.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조부. 어머니는 숙빈(肅嬪) 임씨(林氏). 1771년(영조 47) 앞서 영조를 충동질하여 장헌세자를 굶어죽게 한 김구주(金龜柱) 일당의 무고로, 형 은언군(恩彦君)과 함께 관작을 박탈, 제주로 유배되어 죽었다.
  4. 순조실록 15년(1815년) 12월 19일 기사 / 김윤식,『운양집(雲養集)』9卷, 「興宣獻懿大院王園誌銘」
  5. 남연군 묘는 다음과 같은 풍수 설화가 있다. 정만인(鄭萬仁)이라는 지관이 흥선군을 찾아와, “덕산 가야산 동쪽에 이대(二代)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오는 자리가 있는데 여기다 묘를 쓰면 10여년 안에 틀림없이 한 명의 제왕이 날 것입니다. 그리고 광천 오서산에는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릴 수 있는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가 있습니다. 이 두 자리 중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고 묻자 흥선군은 망설이지 않고 가야산의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를 선택했다. 그런데 흥선군이 지관을 따라 그 자리에 도착해보니 이미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들어서 있었고 더구나 묘를 쓸 자리에는 5층 석탑이 우뚝 서 있었다. 흥선군은 우선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의 묘를 임시로 탑 뒤의 영조 때 판서를 지낸 윤봉구의 사패지를 그 후손에게서 빌려 옮겼다. 상여는 연천에서 가야산까지 왕손을 운구하는 일이었으므로 한 지방을 지날 때마다 그 지방민이 동원되어 메었다. 조선 왕릉은 한양 백리를 한계로 하여 그 주위에 한해 썼으므로 이곳 덕산사람들은 왕릉 장사 때 사용하는 대여(大轝)의 격식을 따랐던 남연군의 꽃상여가 말로만 들었던 볼거리였다. 왕릉 천장시 대여 행렬로 모여든 백성들에게 상주인 왕은 쌀도 나누어주고 천장한 그 지역의 그해 세금을 면하여 주는 등 선심을 썼다. 대원군 역시 덕산사람들에게 꽃상여를 기증하는 선심을 썼다. 이것이 곧 ‘남은들 상여’다.다음 일은 가야사를 폐사(廢寺)하는 일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흥선군이 전 재산을 처분한 2만 냥의 절반을 가야사 중들에게 주고 절에 불을 지르게 했다고 하기도 하고, 당시의 충청감사에게 중국산 명품 단계벼루를 뇌물로 선사하여 가야사 중들을 불러다가 강압하여 불을 지르게 했다고도 한다. 그 절이 모두 타버리자 흥선군은 상여를 뫼시고 가서 재를 쓸고 그곳에 머물렀다. 한밤중에 그의 형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각기 꿈 이야기를 하였다. 흰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꾸짖기를, “나는 탑신인데 너희들이 어찌 나의 사는 곳을 앗아가느냐? 만일 이곳에 장사를 하면 우제(虞祭)가 끝나기 전에 너회 4형제가 폭사할 것이니 속히 가거라” 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3형제의 꿈이 모두 동일하였다. 이 말을 들은 흥선군은 분통을 터뜨리며 “과연 그렇다면 참으로 길지입니다. 운명이란 주관한 자가 따로 있는 것이니 신(神)이 어찌 해를 끼치겠습니까? 그리고 종실(宗室)이 날로 몰락하여 우리 형제들이 옷자락을 끌고 날마다 壯金의 문전을 찾아다니며 구차히 사느니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쾌하지 않겠습니까? 형님들은 모두 자식이 있지만 혈육 하나도 두지 못한 것은 저 혼자뿐이니 죽어도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형님들은 아무 말씀 마시고 계십시오”라고 하였다. 그가 이른 아침에 탑을 무너뜨리고 보니 탑터가 모두 암석으로 되어 있었다. 도끼로 팠지만 도끼도 튀기만 하여, 그는 도끼를 어깨에 메고 공중을 향하여 크게 꾸짖었다. 그런 후 다시 도끼질을 하자 다시 튀지 않고 암석이 잘 파졌다. 이렇게 하여 하관을 한 후 혹 훗날 누가 옮길까 염려되어 수만 근의 철을 녹여 지어 붓고 그 위에 사토를 하였다. 그리고 그는 스님을 데리고 경성으로 가던 중 수원의 대포진을 건널 무럽, 배에 탔던 스님이 갑자기 고함을 치며 불을 끄라고 말한 후 머리를 움켜쥐고 불에 탄 모습을 하더니 잠시 후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남정군의 묘가 복치형(伏雉形, 풍수 명당)이라고 하였다. 그 일이 있은 후 14년 만에 고종이 탄생하였다. (황현(黃玹),『매천야록(梅泉野錄)』 / 장영훈, 『대원군과 2대 천자지지 남연군 묘』, 대원사, 2011.)
  6. 남연군신도비(南延君神道碑)
  7. 남은들 상여: 남은들 상여는 1847년 흥선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묘 이장 시 사용되었던 조선 궁중식 상여로 조선 황실의 의례 풍습 연구에 유일한 민속문화재다. '남은들'이란 명칭은 현 덕산면 광천리로 당시 남연군의 묘를 이장한 후 상여를 남은들 마을에 보관한 데서 유래했다. 지난 2005년 도난됐다가 이듬해 범인이 잡혀 회수된 남은들상여는 훼손방지 및 보존을 위해 2006년 3월서울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중부매일 2013년 7월 11일 “망자의 호사 ‘남은들상여’되살렸다”)
  8. 이배용, 「서양인이 본 한국 근대사회」,『이화사학연구』28집, 2001, p.107~109 (박재영, 「역사적 스테레오타입 사례연구」,『한․독사회과학논총』17권, 2007에서 재인용). 이외에도 제이콥 로버트 무스(J. R. Moose),『1900, 조선에 살다(Village Life in Korea)』/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내 기억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에밀부르다레(Émile Bourdaret),『대한제국 최후의 숨결(En coree, plon-nourrit)』/ L.H.언더우드(Lillias Horton Underwood),『상투의 나라(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W.F.샌즈(William Franklin Sands),『조선 비망록(Undiplomatic memories)』/ C.W.켄달(Carlton Waldo Kendall), 『한국 독립운동의 진상(The truth about Korea)』등의 많은 책들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책들은 저자들 가운데 짧은 기간 조선을 여행하고 서술하거나 조선 여행은 경험도 없이 자료만 보고 서술한 것들도 있어 유의할 필요가 있다.
  9. 『고종실록』 27년 8월 30일 기사
  10. 『고종실록』 1권, 즉위년 12월 8일 기사
  11. 박은식 저/김태웅 역해, 『한국통사』,아카넷, 2012. 조선은 종친(宗親)이 국정에 관여할 수 없다. 그래서 실록에서 직접적으로 대원군(大院君)에게 국정 참여를 지시하는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실록에서 대원군 궁을 수축하고(『고종실록』1권, 1월 7일), 대원궁 궁과 금위영을 가로막은 담장에 문을 세워 동가(動駕)하는 길을 편리하게 하라는 기사(『고종실록』1권, 즉위년 6월 6일)를 시작으로 신정왕후가 경복궁 재건에 관한 사항을 대원군에게 맡긴다는 기사(『고종실록』2년, 4월 3일)와 고종이 대원군에게 품정(稟定),품의(稟議),품처(稟處)하라는 기사등에서 대원군이 국정운영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고종 10년 윤6월 20일 대원군을 존대하여 대로로 부르기로 한 기사에서 고종즉위 후 10년 동안 대원군이 조선 정치의 중심에 서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위의 박은식과 같이 흥선대원군의 정치 참여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내용은 현채(玄采)의 『동국사략(東國史略)』 4권, 근세사(近世史)에 “趙后詔命을 下하조선 기행문야 嗣王이 年幼하고 國事가 多難하니 大院君이 大政을 協贊하고...百官有司로 하여금 大院君의 指揮를 聽하라하고...政權이 全혀 大院君에게 歸하야..”에서도 발견할 수 있고. 특히 황현(黃玹)의 『매천야록』에서는 “운현(대원군)이 국정을 맡아보던 1864년에서 1873년에 이르는 10년 동안....교령(敎令)을 내릴 때 반드시 ‘왕약왈(王若曰)’로 첫 머리를 삼는데, 그 10년 동안 ‘대원위분부(大院位分付)라는 다섯 자로 내외에 온통 행해졌다...’”는 언급등 대원군의 정치 참여와 그 영향력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1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37권, 탐구당, 2000.
  13. 세도정치(勢道政治): 조선후기 특히 19세기에 한 명 혹은 극소수의 권세가를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던 정치형태.
  14. 삼정(三政)의 문란: 조선 재정의 주류를 이루던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 세가지 수취체제가 변질되어 부정부패로 나타난 현상.
  15. 조선은 신해박해(1791), 신유사옥(1801), 기해사옥(1839)등 세 차례의 대금압령에 의해 천주교를 거의 발본색원 하였다. 그러나 1845년 다블뤼 주교가 김대건의 안내로 해로를 통해 밀입국한 것을 시작으로 1866년까지 프랑스 예수회 소속 선교사는 주교 2명, 신부 10명 등 총 12명이 조선에서 포교활동을 벌이고 있었고 전국적 신자수는 대략 2만 3천명에 이르고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37권, 탐구당, 2000.)
  16. 여흥부대부인민씨(驪興府大夫人閔氏):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부인. 민치구(閔致久)의 딸. 일찍이 가톨릭을 믿어 일과문(日課文)을 읽었다. 1863년 둘째아들 명복(命福: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운현궁(雲峴宮)에서 감사 미사를 올렸으며, 그 해 12월 여흥부대부인으로 봉작되었다. 1866년 고종비(妃)를 간택할 때는 친정의 일족인 여성부원군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천거, 왕비로 책봉하게 하였다. 1896년 10월 주교(主敎) 뮈텔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17.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37권, 탐구당, 2000.
  18. 이주천/김진환, 「병인양요의 재조명」,『열린정신 인문학연구』8집, 2007.
  1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37권, 탐구당, 2000.
  20. 󰡔淸季中日韓關系史料󰡕2권, 27쪽; 󰡔籌辦夷務始末󰡕6권, 1012쪽; “Bellonet à Prince de Kung”(13 Jeuillet 1866),Correspondance politique, Chine, no. 41, pp. 293~294; 최석우(역), 「한불관계자료」, 󰡔교회사연구󰡕,2집(1979), 205쪽; “Bellonet to Prince Kung”(July 13. 1866), U.S. Department of State,Diplomatic Correspondence, China⋅Japan(Washington: Government Printing Office, 1866~1882), pp. 420~423. (강상규,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정치학적 고찰」,『정신문화연구』30집, 2007.에서 재인용)
  21.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노직(魯直), 호는 동토(童土). 아버지는 대사간 윤황(尹煌)이며, 어머니는 당대의 명유인 성혼(成渾)의 딸이다. 죽산부사를 지낸 큰아버지 윤수(尹燧)에게 입양되었으며 외삼촌인 성문준(成文濬)에게서 학문을, 강항(姜沆)에게서 시를,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예를 배웠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윤순거 [尹舜擧]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2. [네이버 지식백과] 종학당 [宗學堂]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3. 출처: [문화재청] 종학당 [宗學堂] (문화재청, 문화재검색)
  24.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종학당 [宗學堂]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내용 참삭 및 오류 내용 수정을 가하였음
  25. 문화재청 문화재검색,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1,01520000,34
  26. 문화재청 문화재검색,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1,015200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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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이명종 고문헌관리학
편집 김지선 인문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