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황룡사의 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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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자현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3년 9월 20일 (수) 14:4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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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 「황룡사 조영-신라 건축가들의 활동-」 1977]


작품

신라의 황룡사를 세우고 있는 모습을 그린 민족화이다. 경주의 황룡사의 9층 목탑은 몽골의 침입 때 불에 타서 사라졌다. 지금은 석조 일부와 터만 남아 있다.

  • 황룡사: 황룡사는 신라 24대 임금임 진흥왕 14년(553)에 세운 절로,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황룡(黃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금 3만분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5m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바램의 9층 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
  • 황룡사 9층 목탑: 황룡사 9층 목탑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 대사의 요청으로 세워졌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자장 대사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당나라에서 수행하던 중에 한 신인을 만났는데, 그 신인이 신라로 돌아가 9층의 불탑을 세우면 나라가 편안해질 것이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이에 자장 대사가 선덕 여왕에게 청하여 탑을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탑은 80미터에 달하는 매우 거대한 규모로 지었다. 모두 9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9개의 층은 신라 주변의 아홉 나라를 상징했다. 이는 신라가 동북아시아에서 중심 나라로 발돋움하게 하려는 염원을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황룡사 9층 목탑은 여러 차례 손질하여 고쳐가며 보전되었지만, 고려 고종 때인 1238년 몽골이 침입하여 황룡사가 불타 사라질 때 함께 없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황룡사 9층 목탑 - 신라 발전의 꿈을 담아 만들었던 웅장한 불탑 (한국사 사전 1 - 유물과 유적·법과 제도, 2015. 2. 10., 김한종, 이성호, 문여경, 송인영, 이희근, 최혜경, 박승범)

(출처: 경주 황룡사지, 문화재청) (출처: 황룡사 9층 목탑, 네이버 지식백과)


작가

김태(金泰):1931년 함경남도에서 출생하여 1955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회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3,4,5,7회 국전에 입선하였고, 10여 회의 개인전과 '예술의 전당' 개관 기념전 초대 출품. 한국수채화작가회전 회원 출품 등을 하였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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