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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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부산에서 출생. 4세이후 서울에서 살았다. 성장기는 우리나라의 압축 경제성장과 정치변혁의 시기였고 성인기는 모든 자원이 부족하고 급변하는 시기여서 역설적으로 기회의 시기이기도 했다.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대부분 일자리를 찾아 자기 몫의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성장기

부산의 외가와 경남 양산군 물금면의 친가에서 도시 생활과 전형적 농업국의 시골생활을 이해했다. 어른이 된 후 4년간의 유럽 생활은 넓은 세계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다.

학교생활

충정유치원 수송국민학교 경기여고 연세대학교 서울대학교사회과학대학원 한국외대통역대학원 등 여러 학교를 두루 다녔다. IDAS(디자인대학원)CEO 과정도 재미있었다. 90분 강의하러 외국서 비행기 타고 왔던 비싼 연사들의 강의 내용이 인상깊었다.

사회생활

Korea Times 신문기자 동시통역사 번역가 칼럼기고가 등 항상 일을 하며 바쁘게 지냈다. 신문기자를 하면서 동시에 서울대학교에서 저널리즘 석사공부를 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어느 교수님은 그 당시 서울대는 학사관리가 "헐렁했다" 고 했다. 옳은 말이다. 아마도 그랬으니까 신문기자를 하면서 석사학위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외대 통역대학원 졸업후 동시통역사 활동을 했다. 유럽에서 지낸 기간이 내 생애 가장 한가로운 시간이었는데 여행을 많이 하고 책을 2권 썼다.

기업활동

세상 좋은 장면을 두루 많이 보았으니 그 안목으로 우리나라의 국제행사를 제대로 기획해 보라는 관광공사의 권유로 소위 컨벤션기획회사를 10년간 운영했다. 나보다 유능한 좋은 직원들이 모여있어서 나는 아이디어만 내고 일은 그들이 다 해 냈다. 지금도 문화계에서는 당시 우리 회사가 진행했던 "세계박물관대회" "세계도서관대회" 같은 역사적 문화행사를 가장 성공적인 행사로 회고한다. 당시에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보람을 느낀다.

다시 학교로

2014년에 다시 [1]한국학중앙연구원 학생이 되었다. 과거에 4년동안 외대 신문방송학과에서 강의도 했었지만 나는 역시 학생노릇이 더 좋다.

개인생활

남들이 갖고 있는것은 다 있다. 남편,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집, 시골집, 자전거, 자동차, 게다가 손녀까지 둘 이나 있다. 꽃, 나무, 시골 좋아하는 식구들이 옛날 옛날에 아파트 평수를 늘리는 대신 적은 돈으로 시골에 싼 농가를 사 두었다가 나중에 집을 지었다. 이 집은 평생동안 우리 가족과 주위 친구들의 "꿈"이 되었다. "앞으로 지을 집"에 대해 수많은 계획을 세우며 다 들 행복했었다. 나중에 집을 짓고 나서는 더욱 행복하다.

그래서 요즘 사도삼촌 (四都三村) 생활이다. 시골집에서 금토일 3박이다. 다만 주인노릇 뿐 아니라 머슴노릇까지 해야 하는 집주인은 사실 일년 내내 힘든다. 나는 잡초뽑기 담당, 먹걸이 수확 담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