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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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fs최찬미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6월 18일 (화) 11:0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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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한민국의 가수, 작사가, 작곡가, 뮤지컬 기획자, 뮤지컬 연출가, 뮤지컬 제작자.

내용

인물정보

  • 재동초등학교 졸업. 양희은과 동문. 양희은의 데뷔곡 '아침이슬'부터 30여개 이상의 곡을 함께 했다.
  • 경기중학교 입학. 미술반 활동을 열심히 했다. 이후 대학도 서울대 회화과로 진학하게 되고 이 곳에서 만난 친구와 처음 음악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미술반 활동을 계속했고, 기타를 독학했다. 윤형주와 동문이다.
  • 196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입학하고,당시 대학 동기였던 김영세(디자이너)와 함께'도비두'(도깨비두마리) 라는 포크 팝 보컬 듀오를 결성했다.
  • 1971년 김민기 1집을 시작으로 솔로 가수 겸 작곡가의 삶을 시작했다.
  • 김민기는 노래를 통해 정권에 대한 반발의식을 드러내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는데, 그러한 그의 태도를 보고 그의 모든 노래를 듣고 부르는 것이 원천 금지되었다.
  • 결국 그는 가수에서 손을 떼고 작곡가, 그리고 극작가로 방향을 튼다. 노래극, 연극 등의 각본을 쓰곤 했는데 그 내용은 여전히 정권에 대한 비판의식을 드러내곤 했다.
  • 김민기의 음악이 뛰어난 점은 트윈폴리오를 비롯한 다른 통기타 음악인들이 대학생의 사랑과 낭만을 노래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을 때,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라는 화두를 개인적 심정으로나마 자신의 음악에 반영했기 때문이다.[1]

음반

  • M.net 김민기 음반 검색 결과 중 '정규'앨범 기준

생애 및 활동

  • 애초에 김민기는 사람과 삶에 대한 성찰이 깊었던 인물이었다.고2때 작사한 가사 내용이 "비가 내리누나 나 혼자 가고프나 함께 어울려 같이 간들 어떠하리 가세 산 너머로 비 개인 그곳에 저 군중들의 함성소리 들리잖나"였다고.
  • 김민기의 곡 중 널리 불리는 친구는 그가 고교 3학년 때 작곡했다. 보이스카우트 대원들과 동해안에 야영 갔다가 한 사람이 익사하는 바람에 즉시 서울로 돌아오던 야간열차에서 참혹한 심정을 가사에 담았다.
  • 김민기는 김영세와 함께 '도비두'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했는데, 본인이 작곡한 곡은 부르지 않고 미국의 모던포크 중에서도 프로테스트(protest·저항) 포크의 핵심이라 할 음악인들의 곡[2]을 불렀다.[3]
  • 김민기와 윤형주의 첫 만남은 명동 YWCA 노래모임인 '청개구리'[4]에서 이루어졌다고한다. 당시 의 감상은 이렇다.
느낌도 독특했다. 시골에서 농사지을 법한 얼굴인데, 마치 음악을 다 꿰뚫고 노래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곡 자체도 우리가 부르는 노래와 많이 달랐다. 사랑을 노래하는 낭만주의 팝송이 아니라 인생 전반에 대한 내용의 가사였다. 완전히 매료됐다.[5]


  • 김민기는 양희은과 '청개구리'에서 처음 만났다. 초등 동문이긴 하나 몰랐다. 이 만남이 인연이 되어 양희은의 데뷔곡이자 지금까지 사랑받는 아침이슬이라는 곡을 주게 된다.

김민기에 대한 탄압

에피소드란에서 언급된 윤형주의 감상에도 나와있듯, 그는 사랑을 노래하는 낭만주의 팝송보다는 인생 전반에 대한 내용의 노래를 부르곤 했다. 인생과 사람에 대해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의 노래였기에, 고스란히 그런 성향이 묻어 나왔다. 시인 김지하의 영향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가 생긴다. 1972년에는 서울대학교 문리대의 신입생 환영회 때 자작곡을 포함한 민중가요를 가르치다가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때 가르쳤던 꽃 피우는 아이금지곡으로 지정되면서, 음반 활동에도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군복무를 시작한 이후에도, 유신 반대 운동에서 김민기의 노래들이 불렸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보안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고, 아침이슬이 금지곡으로 지정됨과 동시에 솔로 1집도 판매 금지 조치를 받았다. 이 결정은 1987년 6월 항쟁 이전까지 지속되었고, 이후 전두환 집권기까지 공식적으로 발매된 김민기의 앨범은 전무했다. 보안대 조사가 끝난 뒤에는 영창 살이를 한 뒤 최전방 부대로 재배치되었다. 1977년 5월에 전역한 뒤에도 공연이나 음반 발매 등 공적인 활동에 제재를 받았다.[6] 그는 막노동 등으로 생계를 꾸리면서 양희은의 음반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에 들어갈 노래들을 작곡해 주었다. 하지만 음반 발매 때는 가명을 사용했음에도 수록곡 중 '늙은 군인의 노래'가 장교들의 비위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또 금지곡 판정과 음반 판금 조치를 받았다. 결국 비밀리에 작곡과 연주 활동을 진행했는데, 1978년에는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제작했다. 이 노래극은 당시 대학 노래패들의 노래와 연주로 송창식의 집에서 몰래 녹음되었다. 이에 대한 경찰 조사가 있었으나 금방 풀려나게 되었다. 1984년에는 서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를 비롯한 대학들에서 활동하던 노래패들의 노래를 모아 '노래를 찾는 사람들'[7]이라는 민중가요 음반을 제작했다. 하지만 이 음반도 공윤위에서 김민기의 노래를 모두 삭제하라고 지시했고, 발매 뒤에도 판매가 거의 안되었다.[8]

피해다녀야했던 삶, 그곳에서 만난

공장의 불빛을 만든 뒤에는 비공식 활동마저 힘들게 되었고, 결국 음악 활동을 일시적으로 중단한 뒤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민기를 받아준 농가에서 정기적으로 김민기의 행적을 경찰서에 보고해야 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치게 되었고, 멀지 않은 김제로 옮겨가 계속 농사를 지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국풍81 개최를 앞두고 정부의 회유가 있었으나, 끝까지 참가를 거절했다. 농사를 지으며 구체적인 사회 운동에도 참가하기 시작했다. 1989년에는 농촌 운동 경험을 살려 장일순, 박재일, 김지하, 최해성 등과 함께 생태운동 단체인 '한살림 모임'이라는 NGO를 만들어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했다.이듬해에는 한겨레에서 발족시킨 '겨레의 노래 사업단'에서 그 동안 군사정권의 탄압 등으로 가창이 금지되어 있던 대한민국과 해외 동포들의 노래를 엮은 음반 '겨레의 노래'를 제작했고, 음반 발매 기념으로 순회 공연을 하면서 오랜만에 아침 이슬을 공개적으로 불러 화제가 되었다.[9]

극으로의 방향 전환

음악활동에 대한 국가적 탄압이 극심해져 더이상 관련 활동을 이어나갈 수 없었던 김민기는, 줄곧 시인 김지하를 도와 해왔던 '극' 분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1973년 초에는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의 극음악을 작곡해 무대 공연 경험을 쌓기 시작했고, 1974년 4월에는 소리굿 아구의 대본을 쓴 뒤 작곡가 이종구가 곡을 붙여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했다. 이 소리굿은 공연윤리위원회의 제재를 받고 상연 금지 처분을 당했지만,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체포 위협을 무릅쓰고 재공연하는 등 화제를 모았다.농사를 지으러 숨어들어갔던 상황에도 익명으로 연출을 해왔다. 이후 소리극 '아구'를 함께 썼던 김석만이 극활동을 재개할 것을 제안했고, 농부생활을 청산, 서울로 돌아와 어린이 뮤지컬을 만들고자 했으나, 공연윤리심의위원회에서 김민기가 참가한다는 것을 알아채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1987년에는 6월 항쟁으로 본격적인 민주화 열풍이 불자 6년 전 충청남도 보령시의 탄광에서 잠시 광부 생활을 했을 때의 경험을 살려 탄광촌 아이들을 다룬 노래극 '아빠 얼굴 예쁘네요'를 만들었다. 하지만 공윤위의 영향으로 여러 대목의 가사를 고쳐서 출반해야 했다.[10]

극단 학전

1991년 김민기는 사비를 들여 대학로에 학전 소극장을 개관했다. 같은 해 독일의 뮤지컬인 지하철 1호선의 한국어 번안과 연출을 담당하며, 학전 극장에 공연을 올렸다. 2001년에는 독일과 중국, 일본에서 해외 순회 공연도 진행했고, 이 공로로 2007년에 독일문화원에서 수여하는 괴테 메달을 받아 한국인으로서는 윤이상과 백남준 이래 세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 1994년 학전 소극장을 중심으로 하는 극단 학전을 창단했고, 지하철 1호선 외에 록 오페라 '개똥이'의 작사/작곡/연출과 록 뮤지컬 '모스키토', 뮤지컬 '의형제'의 번안/연출을 담당했다. 솔로 4집까지 낸 뒤에는 뮤지컬 등 공연예술 분야의 활동에만 주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민기가 창단한 극단인 학전으로부터 배출된 배우들이 꽤 유명하다. 황정민, 설경구, 조승우 등 모두 대학로의 학전을 한 번씩 거쳐간 인물들이다. 노래로 유명한 학전 출신 가수는 김광석, 유재하, 김민기 본인 등이 있다.[11] 시대적인 탄압으로 인해 틀게된 방향이었으나, 그 물꼬가 가지고 온 문화적 영향력은 어마어마 했다. 노래에서 그치지 않고, 뮤지컬, 연기계에서 권위있는 극단을 만드는 일까지 이어졌다

멀티미디어

이미지

동영상

네트워크 그래프

참고문헌

기여

주석

  1. [국제일보, 김형찬의 대중음악 이야기 (45) 김민기, 한국 통기타 음악의 자아를 만들다 (하)]
  2.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 피터 폴 앤 메리의 'Weep for Jamie' 'Three Wavens' 'Old Coat' 'It's Raining', 존 바에즈의 'Portland Town'.
  3. [국제일보, 김형찬의 대중음악 이야기 (43) 김민기, 한국 통기타 음악의 자아를 만들다 (상)]
  4. 1969년 세시봉이 문을 닫고 나서 1970년 6월 서울 YWCA에 '청개구리'라는 요일별 프로그램이 개설됐다. 김민기,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서유석, 투코리언스 등이 때때로 여기에 들러 청중과 호흡했다. 이제까지 외국 팝송을 그대로 부르던 단계에서 벗어나 가사를 한국어로 번안해 부르거나 스스로 노래를 창작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5. 윤형주 칼럼,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 #7 익사한 후배에 바친 '친구'
  6. 김민기 나무위키 2.2 가수가 되기까지
  7. 대표곡 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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