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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무령왕릉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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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실'''==
 
=='''무령왕릉실'''==
  
1층 무령왕릉실은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문화재가 전시되어 있다. 발굴당시, 연도에는 왕과 왕비의 지석(誌石) 2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으며, 그 위에는 오수전 한 꾸러미가 얹혀 있었다. 지석 뒤에는 석수가 남쪽을 향하여 서있었고, 묘실의 관대 위에는 왕과 왕비의 목관재가 가득 놓여 있었다. 목관의 판재들 밑에서는 왕과 왕비가 착장하였던 장신구류와 부장유물이 출토되었다. 중요 장신구류로는 금제관식, 금제이식, 금은제허리띠, 금동제신발, 금제팔찌 등이 있고 왕의 허리에서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용봉문환두대도가 출토되었다. 그 밖에 왕과 왕비의 두침 및 족좌가 목관 안에 놓여 있었고, 그 외의 중요 부장품으로는 청동거울 3면과 동탁은잔 등이 출토되었다. 국립공주박물관은 발굴을 통해 출토된 108종 2,906점의 유물 중 선별하여 묘지석, 왕의 관식, 다리작명 은제팔찌 등이 전시하고 있으며 왕과 왕비의 목관도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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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무령왕릉실은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문화재가 전시되어 있다. 발굴당시, 연도에는 왕과 왕비의 지석(誌石) 2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으며, 그 위에는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8372 오수전] 한 꾸러미가 얹혀 있었다. 지석 뒤에는 석수가 남쪽을 향하여 서있었고, 묘실의 관대 위에는 왕과 왕비의 목관재가 가득 놓여 있었다. 목관의 판재들 밑에서는 왕과 왕비가 착장하였던 장신구류와 부장유물이 출토되었다. 중요 장신구류로는 금제관식, 금제이식, 금은제허리띠, 금동제신발, 금제팔찌 등이 있고 왕의 허리에서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용봉문환두대도가 출토되었다. 그 밖에 왕과 왕비의 두침 및 족좌가 목관 안에 놓여 있었고, 그 외의 중요 부장품으로는 청동거울 3면과 동탁은잔 등이 출토되었다. 국립공주박물관은 발굴을 통해 출토된 108종 2,906점의 유물 중 선별하여 묘지석, 왕의 관식, 다리작명 은제팔찌 등이 전시하고 있으며 왕과 왕비의 목관도 복원하였다.
 
특히 무령왕릉실은 3D영상시스템을 갖추어 관람객들이 출토유물의 모든 면을 직접 관찰할 수 있게 하였고 무령왕릉과 관련된 영상물도 상영하고 있다.
 
특히 무령왕릉실은 3D영상시스템을 갖추어 관람객들이 출토유물의 모든 면을 직접 관찰할 수 있게 하였고 무령왕릉과 관련된 영상물도 상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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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銅製五銖錢)===
 
===동전(銅製五銖錢)===
  
오수전은 지석 위에 꾸러미로 놓여 있었으며 그 숫자는 90여개에 달한다. 매지권에는 이 돈으로 토지신에게서 무덤 터를 산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 철제오수전은 양(梁)나라 무제(武帝)때 만든 것으로 523년 무령왕(武寧王)의 사망에 즈음하여 양나라로부터 백제에 전해진 것이다. 오수전은 백제 초기 왕궁 터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에서도 출토된 바 있어 백제 초기부터 유통되었던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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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전은 지석 위에 꾸러미로 놓여 있었으며 그 숫자는 90여개에 달한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7993 매지권]에는 이 돈으로 토지신에게서 무덤 터를 산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 철제오수전은 양(梁)나라 무제(武帝)때 만든 것으로 523년 무령왕(武寧王)의 사망에 즈음하여 양나라로부터 백제에 전해진 것이다. 오수전은 백제 초기 왕궁 터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에서도 출토된 바 있어 백제 초기부터 유통되었던것으로 보여진다.
  
 
===받침있는 은잔 (銅托銀盞)===
 
===받침있는 은잔 (銅托銀盞)===

2016년 4월 16일 (토) 00:40 판


소개

국립공주박물관은 백제의 문화 유적 및 유물을 조사, 보호할 목적으로 1934년에 만들어진 공주고적보존회를 발족된 것이 시작하여 1939년 5월 5일 충청도 감영청(監營廳)이었던 선화당(宣化堂) 낙성식을 가졌으며, 같은해 9월 1일 공주사적현창회를 조직하여 박물관 개관준비를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1940년 10월에 선화당을 유물전시실로 활용하여 공주박물관을 개관하였다. 1945년 12월 10일 당시 미군정청으로부터 국립박물관을 인수 받은 후 1946년 4월 1일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1972년 12월 5일 국립중앙박물관 공주분관으로 개칭하였고, 1973년 10월 12일에 건물을 신축 개관하였다. 1975년 직제 개편으로 소관 지방 박물관으로 승격되어 국립공주박물관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1999년 11월 22일 신축 기공식을 가진후 2003년 10월 31일 준공후 2004년 5월 14일에 국립공주박물관이 웅진동에 신축이전 개관되었다.[1]

주요기능과 현황

국립공주박물관은 공주를 비롯한 충청 남·북부 지역에서 출토된 많은 발견·발굴 매장 문화재를 체계적인 방법으로 보관 관리하고 있고, 학술적 가치가 높은 중요 유물은 관람객과 전문 연구자들이 쉽게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하고 있다. 이밖에 유적 발굴 조사와 사회 교육 활동도 꾸준히 실시되고 있다. 그간 공주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주요 유적으로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방어 취락인 부여 송국리유적, 원삼국·초기 백제 무덤인 공주 하봉리와 천안 화성리유적, 원삼국시대의 토성인 수촌리유적, 백제시기의 산성인 대전 월평동유적, 백제시기의 제사·취락지인 공주 정지산유적이 있다. 국립공주박물관의 총면적은 1만 4,000㎡(4,200평), 전시관 건물 1,600㎡으로, 현재 상설 전시되고 있는 유물은 무령왕릉 출토 금제관식(국보 제154, 155호)과 석수(국보 제162호) 등을 포함하여 국보 14건 19점, 보물 4건 4점 등 중요 유물 약 1,000점 등이 있다. 전시실은 무령왕릉실, 선사 고대문화실, 야외정원의 3곳의 상설전시공간과 1곳의 특별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매년 5월에는 공주 시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여 ‘어린이 문화재 미술 실기대회’를 열어 미래의 주인공이 될 어린이들이 우리 문화재를 사랑하고 우리 문화유산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있다. 그리고 7월에는 교사와 시민을 대상으로 ‘역사문화 특강’을 개최하여 전 시민이 우리의 역사에 대한 애착심과 자긍심을 가지도록 홍보와 교육 활동을 실시하고 있다.

무령왕릉실

1층 무령왕릉실은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문화재가 전시되어 있다. 발굴당시, 연도에는 왕과 왕비의 지석(誌石) 2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으며, 그 위에는 오수전 한 꾸러미가 얹혀 있었다. 지석 뒤에는 석수가 남쪽을 향하여 서있었고, 묘실의 관대 위에는 왕과 왕비의 목관재가 가득 놓여 있었다. 목관의 판재들 밑에서는 왕과 왕비가 착장하였던 장신구류와 부장유물이 출토되었다. 중요 장신구류로는 금제관식, 금제이식, 금은제허리띠, 금동제신발, 금제팔찌 등이 있고 왕의 허리에서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용봉문환두대도가 출토되었다. 그 밖에 왕과 왕비의 두침 및 족좌가 목관 안에 놓여 있었고, 그 외의 중요 부장품으로는 청동거울 3면과 동탁은잔 등이 출토되었다. 국립공주박물관은 발굴을 통해 출토된 108종 2,906점의 유물 중 선별하여 묘지석, 왕의 관식, 다리작명 은제팔찌 등이 전시하고 있으며 왕과 왕비의 목관도 복원하였다. 특히 무령왕릉실은 3D영상시스템을 갖추어 관람객들이 출토유물의 모든 면을 직접 관찰할 수 있게 하였고 무령왕릉과 관련된 영상물도 상영하고 있다.

금제관장식(金製冠飾)

왕의 머리 부분에서 거의 포개어진 채 발견되었다. 얇은 금판에 인동당초문과 화염문 장식을 투조하였는데 문양의 좌우가 비대칭이다. 줄기와 꽃에 지름이 5mm정도인 영락을 달았다. 영락은 둥글고 작은 원판이며 여기에 작은 구멍을 뚫어 금실로 꿰어 4∼6회 꼬아 달았는데 모두 127개이다.

묘지석(墓誌石)

왕릉의 널길 입구에 2장의 지석이 놓여 있었는데, 비록 내용은 소략하지만 삼국사기 기록의 정확성을 입증해 주었고, 왕릉 출토유물과 관련된 유적·유물의 편년 연구에 기준이 되고 있다. 이 지석은 우리나라 지석 중 가장 오래 된 것이며, 지석이 출토됨으로써 삼국시대의 무덤 중 피장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 되었다.

동전(銅製五銖錢)

오수전은 지석 위에 꾸러미로 놓여 있었으며 그 숫자는 90여개에 달한다. 매지권에는 이 돈으로 토지신에게서 무덤 터를 산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 철제오수전은 양(梁)나라 무제(武帝)때 만든 것으로 523년 무령왕(武寧王)의 사망에 즈음하여 양나라로부터 백제에 전해진 것이다. 오수전은 백제 초기 왕궁 터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에서도 출토된 바 있어 백제 초기부터 유통되었던것으로 보여진다.

받침있는 은잔 (銅托銀盞)

동탁은잔은 청동제 받침(동탁)과 은으로 만든 잔(은잔)을 합친 것이다. 받침은 낮은 대각이 달린 접시 모양인데 정 중앙에는 은잔을 받치기 위한 속이 빈 원통형의 받침이 솟아 있다. 여기에 은잔의 굽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걸치게 고안되어 있다.

상상의 동물 진묘수 (鎭墓獸)

진묘수는 기괴한 신수를 표현한 공상적인 동물을 무덤 안이나 앞에 놓아서 악귀를 쫓아 사자(死者)를 수호한다는 중국의 묘장풍습에서 나온 것이다. 출토당시 무령왕릉 널길 중앙에 밖을 향하여 놓여 있었다. 진묘수는 뭉뚝한 입을 벌리고 있고 코는 크지만 콧구멍이 없다. 등에는 네 개의 융기(隆起)가 있고 머리 위 융기 상면의 패어진 홈에는 나뭇가지 모양의 철제 뿔이 꽂혀 있다. 몸통 좌우에는 앞뒤로 날개 모양의 갈기가 도안처럼 부조되었다. 네 개의 짧은 다리가 있으며 발톱이 표현되어 있는데 뚜렷하지는 않다.

선사 고대문화실

2층 선사 고대문화실은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 철기시대를 거쳐 마한과 백제(기원전 18∼660)의 웅진, 사비시대 중심지로 역할을 한 뒤 통일신라시대로 이어지는 충청남도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공간으로, 천안 용원리유적, 공주 송산리고분, 공산성 출토품 등 총 13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최근 높은 관심 속에 발굴되어 4∼5세기 무렵 공주지역 지방 세력의 존재를 밝혀준 공주 수촌리 백제고분 출토품들도 공개되어 있다. 이와 함께 통일신라 이후 이 지역의 백제적 전통을 보여주는 계유명삼존천불비상 등 불교미술품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웅진문화 관련 영상물도 상영하고 있다.

찍개(單面器)

자갈돌의 한쪽 면을 떼어낸 찍개돌의 한쪽 면을 떼어내어 물건을 찍는 데 쓴 도구이다.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

대좌와 불신부(佛身部)는 별도제작 후 결합시켰다. 통일신라 불입상 형식의 2대 주류 중 한 형식을 반영하고 있으나 두 다리 사이에서 파상선을 이루는 옷 모양, 목주위에서 반전시킨 옷깃의 표현 등에서 변형된 요소를 느낄 수 있다. 머리 뒤 중앙부와 신체상, 하부에는 주조시 주물을 빼내기 위한 타원형의 구멍이 확인된다.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

충남지역의 신석기시대 토기는 바닥이 계란모양처럼 뾰족한 빗살무늬토기와 바닥이 평평하고 몸이 구형이며 능형의 무늬를 연속적으로 시문한 "금강식토기(錦江式土器)" 가 대표적이다.

한국식동검(세형동검)

철기시대에 사용된 청동검으로 몸통의 검이 좁아 "세형동검", 혹은 주요 분포권이 한반도이기 때문에 "한국식동검"으로 불린다. 한국 철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 몸통과 손잡이를 따로 만들어 부착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 돌덧널무덤, 널무덤에서 발견되며, 덧띠무늬토기, 검은간토기, 잔무늬거울, 꺽창과 투겁창 등이 함께 출토된다.

세발토기(三足土器)

세발토기는 백제에서만 출토되는 특징적인 형태의 그릇으로 접시의 그릇에 다리가 세 개 달린 형태의 그릇을 말하며 뚜껑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이 토기는 백제의 수도 변천에 따라 모양이 변하는 특징이 있으며, 형태가 특이해서 제사와 같은 행사나 무덤에 매납하는 용도로 알려졌으나 최근 집 자리에서 출토되는 예가 증가하여 일반적으로 이용되었던 그릇으로 생각된다. 이 토기는 백제 웅진시대에 만들어진 세발토기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것으로 접시부분은 약간 둥글면서 편평하고, 세 개의 다리가 접시바닥의 가장자리에 붙어 있다. 접시에는 뚜껑 받침턱이 있고, 다리의 끝은 바깥쪽을 향하고 있다.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공주시 웅진동 망월산 동쪽 서혈사지에서 발견된 불상이다. 앉은 자세는 양 발을 무릎 위로 올리고 발바닥이 위를 향하고 있으며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가락을 아래로 폈으며 왼손은 손바닥이 위로 향하고 있다. 불상을 받치는 대좌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를 받치는 지대석에는 극락의 천사인 천인(天人)과 새의 몸에 인간의 얼굴을 한 상상의 새인 가릉빈가(迦陵頻伽)를 새겼다. 이 불상은 각 부분의 세부표현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기증문화재실

2층 기증문화재실에서는 1947년부터 현재까지 국립공주박물관에 기증된 문화재를 선별하여 정기적으로 교체 전시하고 있다. 국립공주박물관이 수증한 문화재는 토기, 도자기, 고문서, 금속공예품 등 다양한 분야에 달한다.

특별전시

충청감영

기획전시실에서는 국립공주박물관 개관 70주년을 맞아 기획특별전 ‘충청감영’을 개최한다. 전시는 공주에 위치했던 충청감영의 역사를 알리고자 기획되었으며, ‘충청감영과 공주’, ‘충청감영과 사람들’, ‘충청감영과 사건들’이라는 세부 주제를 통해 충청감영의 역사를 다각적으로 조망한다. 특히 전시에서는 충청감영에서 사용했던 금영 측우기(보물561호, 한정전시 4.2.~4.14.)가 100여년 만에 귀향하여 전시되며, 옛 선화당 건물에서 보관되었던 가구를 최초로 공개한다.

국립공주박물관 사계(四季)

전시동 1층 복도에서는 봄꽃 사진 공모전 수상작을 비롯하여 공주박물관의 아름다운 사계절 사진 27점을 전시 한다


옥외전시

옥외전시장은 본관 앞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공주 일원에서 출토된 많은 석조유물(石造遺物)을 전시하고 있다. 공주시 반죽동에서 출토되어 보물로 지정된 석조(돌을 깎아서 물을 담아 쓰도록 만든 큰 그릇) 2기를 비롯하여, 웅진동서혈사지(西穴寺地)의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등 공주 일원에서 출토된 70여점의 석조미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대통사지출토 석조(大通寺址出土 石槽)

석조란 돌을 파서 물을 담아 쓰도록 만든 큰 물통으로, 절에서 큰 행사가 끝난 뒤 그릇을 씻을 때, 또는 물을 담아두거나 연꽃 등을 기르는데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석조는 백제 성왕(聖王) 5년(527)년에 세워진 대통사지에 있었던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사각형 석조와는 달리 연꽃무늬가 조각된 둥근 받침돌 위에 올려져 있고, 가장자리에는 한 가닥 띠를 돌리고 몸 중앙에는 약간 가는 두 줄의 띠가 새겨져 있다. 백제문화의 특유의 우아한 조형미를 지닌 이 석조는 발견된 장소의 이름을 따서 각각 반죽동 석조(보물 149호)와 중동석조(보물 148호)로 불리고 있다.

서혈사지 출토 석불좌상(西穴寺址 出土 石佛坐像)

공주시 웅진동 서혈사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물 제979호 불상과 비로자나불과 함께 발견되었다. 서혈사(충청남도 기념물 제37호)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등장하는데, 1929년 이후 몇 차례의 조사를 통해 통일신라시대 사찰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항마촉지인과 양 무릎 사이에 부채꼴 옷주름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석굴암 본존불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항마촉지인을 맺고 있다. 항마촉지인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을 때 맺었다는 손갖춤으로, 지신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하라 했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로써 이 불상은 석가모니불임을 알 수 있다. 보물 제979호 불상은 둥근 얼굴, 아담한 신체, 대좌에 별도의 중대석받침을 끼워 넣은 것으로 볼 때 9세기 중엽 이후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불상이다. 이 석불은 머리가 없고, 대좌의 일부가 없긴 하지만 전체적인 조각 수법 등이 보물 제979호 불상과 유사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불상 역시 9세기 중엽 이후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및 도면

사진

도면

관련 사이트

참고문헌

  • 『국립공주박물관』(통천문화사, 2007)
  • 상기 유물들에 대한 사진 및 소개는 국립공주박물관 홈페이지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답사 후기

  • 답사 중/후에 느낀 것. 보완되어야 할 부분이 있으면 적어주세요!


출처

  1. 국립공주박물관 홈페이지의 박물관 소개 부분의 연혁과, [네이버 지식백과] 국립공주박물관 [Gongju National Museum, 國立公州博物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참조

기여

역할 이름 전공
정리 장원석, 김지선, 김누리 인문정보학
편집 장동룡 인문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