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동 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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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s김지선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6년 6월 26일 (일) 01:0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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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서울시 광진구 구의동에 위치한 고구려 군사 요새로, 1977년∼1988년에 걸쳐 화양지구택지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조사되었는데, 지금은 파괴되어 남아있지 않다. 한강 북안의 높은 구릉 정상부에 위치한 구의동 보루는 유적의 입지나, 유구의 성격, 출토 유물의 성격 등을 통해 볼 때 백제와 대치하고 있던 고구려의 군사요새로서, 대체로 10여 명의 군사가 주둔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유적과 연결선상에 있는 아차산 일대 보루군구의동 보루와 같은 성격의 유적임이 밝혀지고 있다. 20세기 전반의 지형도를 보면 아차산에서 이어지는 능선 끝자락 강변의 소봉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이들 사이에 또 다른 구릉이 존재하고 있어 원래는 아차산 고구려 보루군과 연결선상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구의동 보루아차산 일대 보루군은 같은 시기로 추정되며, 장수왕 이후 고구려 남진정책의 일환으로 한강 이남을 공략하기 위한 군사 전초기지로 사용되다가, 551년 나제연합군이 한강 유역으로 북상할 무렵에는 방어기지로 사용되었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은 이들 유적이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지점이 한성 백제의 중심지인 몽촌토성, 풍납토성, 석촌동·방이동고분군 일대라는 사실로도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

이 유적이 축조된 시기의 상한은 고구려한강 이남을 점령하기 이전인 5세기 중엽경, 폐기 시점은 신라한강 유역을 차지한 6세기 중엽으로 볼 수 있다. 구의동 보루에 대한 이러한 연대관은 출토 유물이 대체로 5세기 중엽 ~ 6세기 중엽경의 고구려 유물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 점에서도 뒷받침된다.


구의동 보루 출토 무기를 통한 고구려군의 편제 파악

구의동 보루에서는 1,300여 점에 달하는 쇠화살촉을 제외하고도 15종 50여 점에 달하는 철기가 출토되었다. 한 유적에서 이처럼 많은 종류와 양의 철기가 출토된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철기 가운데 무기류가 많은 점에서 구의동 보루의 군사적 중요성을 엿볼 수 있는데, 출토된 무기류는 철도 2자루, 철모 10점, 철부 4점, 철촉 1.300여점이다. 무기류는 당시 개인 소지품으로, 4세기 이후 고구려의 주력무기가 창으로 일원화되는 점을 감안하면 철모의 수량이 결국 이곳에 주둔한 군사의 수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구의동 보루에는 대략 10명 정도의 군사가 주둔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개별 병사는 모두 창을 소지하고 있었고, 이 중 지휘관급 2명은 칼도 함께 소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병사 1인당 300발 정도의 화살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근접전에서 적의 갑옷과 투구를 격파하는 데 사용된 도끼 4자루는 부대원이 공동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군사 수는 중국 문헌인 『신당서(新唐書)』의 내용과 유사하여 주목된다.『신당서』제50 병지에 보면 고대부대의 최소단위는 10명으로 이를 '화'라 했으며, 다음 '대'는 '화'를 다섯 개 합친 것으로 50명으로 구성되었고, '대'의 다음 단위는 '단'으로 '단'은 300명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도 상양왕23년조에 수양제가 113만의 대군으로 고구려에 침입할 때 내린 조서(詔書)의 기사를 참고 할 수 있다.

… 帝親授節度. 海軍上將亞將各一人上, 騎兵四十隊長, 隊百人, 十隊爲團. 步卒八十隊, 分爲四團 , 團各有偏將一人.…

이 기록은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입할 때 수의 군대 편제를 적고 있는데, 각 군에 상장과 아장이 1명씩 있고, 기병은 40대인데 각 대는 100명이고, 10대가 1단이 되었다. 보졸은 80대 인데 4단을 만들었으며, 단마다 편장 1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이러한 기록이 중국의 경우를 기록한 것이어서 그대로 고구려 군대의 편제에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당시 고구려에도 이러한 부대 편제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들과 구의동 보루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 대략 10여명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구의동 보루는 10명 정도 단위의 부대가 주둔했던 전초기지의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구의동 보루 출토 무기와 온돌을 통한 아차산 일대 보루군 병력 추산

구의동 보루는 온돌시설을 포함한 방형 구획의 면적이 14평 정도로 확인되었고, 대부분의 토기류가 온돌 주변의 방형공간 내부에서 출토되었다. 즉, 온돌시설 중심으로 하나의 부대단위를 이루며 취사행위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기준으로 10개의 온돌을 포함한 방형공간이 구획되어 있는 아차산 4보루에 적용하면 최소부대단위가 10개정도 주둔하고 있었으며, 100여명의 군사가 주둔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앞서 『신당서(新唐書)』의 기록과 같이 고구려군의 부대가 10명, 50명, 100명 단위의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최근 까지의 아차산 일대 보루군의 조사성과를 통해 보면 이들 각 보루에는 10명(구의동 보루), 50명(홍련봉 1보루), 100명(아차산 4보루, 시루봉 보루)의 단위로 군사들이 주둔하였으며, 아차산 일대 보루군에 주둔했던 전체 군사의 수는 2천여 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551년 백제군의 기습으로 전멸당한 것으로 파악되는 구의동보루는 여 화재로 전소된 구의동 보루에서는 철솥을 비롯한 완형 유물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당시 군 부대의 편제 및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기초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림 11| 구의동보루 철솥 출토 상황(왼쪽, 1977) 및 복원된 철솥과 시루(오른쪽) 구의동보루는 불에 타서 폐기되었는데, 온돌 아궁이에 철솥과 철호가 걸려 있었으며 많은 양의 토기와 철제 무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는 다른 보루에서는 완전한 형태의 철솥이 한 점도 출토되지 않는 점과 대조적이다. 구의동보루를 제외하고는 불에 타서 폐기된 유적도 없다. 이런 상황으로 미루어 한강변에 인접한 작은 초소의 성격인 구의동보루에 있던 병사들은 551년 가을 백제군의 기습으로 전멸하였으며, 아차산보루의 병사들은 철솥과 무기를 거두고 철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서울대학교박물관

삼국시대의 군사편제에 대한 문헌기록이 매우 소략하여 그 실상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발굴조사 결과 구의동 보루의 경우 군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무기류와 취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철솥이 그대로 방치된 점으로 보아 적군의 기습으로 주둔군이 전멸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차산 보루는 이와 달리 무기와 철부를 수습하여 철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차산 4보루는 구의동보루에서 직선 거리로 5km가량 떨어진 산악지형으로 도보로 약 2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다. 따라서 구의동 보루가 적군에게 기습을 받은 것을 확인하고 무기와 장비를 수습하여 퇴각할 만한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37793&cid=43065&categoryId=43065 구의동 보루, 고고학 사전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9&cp_code=cp0424&index_id=cp04240032&content_id=cp042400320001&search_left_menu=2 아차산 4보루, 문화콘텐츠닷컴

지도

클래스

  •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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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주석

  1. 아래 사진출처: 서울대학교박물관
  2. 그림출처: '구의동 보루유적의 고구려 무기', 한국 미의 재발견-고분미술
  3. 그림출처: '구의동 보루유적의 고구려 무기', 한국 미의 재발견-고분미술

참고

  • 아차산 내 아차산 3보루 안내판

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