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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목 = 사적 제 4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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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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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鐵鋤)는 모두 17점이 출토되었는데 5호와 6호 건물지의 온돌주변에 주로 분포하고 있었다. 그밖에 망치, 도자, 정( ), 보습(犁)등이 1호 건물지와 2호 집수장 주위에서 주로 출토되었다철제용기류의 소유는 매우 한정되어 있는 기물이어서 출토량 보다는 존재 자체가 의미가 있는데 완형은 한 점도 없고 일부 편만 남아있다. 이점은 구의동 보루에서 완형의 철제 항아리(壺와) 솥(釜)아궁이에 걸린 채로 출토된 점과는 크게 대조되는 사실로 아차산 4보루와 구의동 보루의 폐기 사항을 단적으로 설명하는 단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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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광진구]] [[구의동]]에 위치한 [[고구려]] 군사 요새로, 1977년∼1988년에 걸쳐 화양지구택지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조사되었는데, 지금은 파괴되어 남아있지 않다. 한강 북안의 높은 구릉 정상부에 위치한 '''구의동 보루'''는 유적의 입지나, 유구의 성격, 출토 유물의 성격 등을 통해 볼 때 [[백제]]와 대치하고 있던 [[고구려]]의 군사요새로서, 대체로 10여 명의 군사가 주둔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유적과 연결선상에 있는 [[아차산 일대 보루군]]도 [[구의동 보루]]와 같은 성격의 유적임이 밝혀지고 있다. 20세기 전반의 지형도를 보면 [[아차산]]에서 이어지는 능선 끝자락 강변의 소봉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이들 사이에 또 다른 구릉이 존재하고 있어 원래는 [[아차산 고구려 보루군]]과 연결선상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타 각 범주에 속하지 않는 용도미상의 철제품 등이 있으며, 이중 쇳물 등이 굳으면서 형성된 슬래그 등은 2호 온돌과 관련이 있어 간이 대장간으로서의 2호 온돌의 성격을 고려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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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보루의 성격과 주변 관방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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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구의동 보루]]와 [[아차산 일대 보루군]]은 같은 시기로 추정되며, [[장수왕]] 이후 [[고구려]] 남진정책의 일환으로 [[한강]] 이남을 공략하기 위한 군사 전초기지로 사용되다가, 551년 나제연합군이 [[한강]] 유역으로 북상할 무렵에는 방어기지로 사용되었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은 이들 유적이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지점이 [[한성 백제]]의 중심지인 [[몽촌토성]], [[풍납토성]], 석촌동·방이동고분군 일대라는 사실로도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
삼국시대의 군사편제에 대한 문헌기록이 매우 소략하여 그 실상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발굴조사 결과 구의동 보루의 경우 군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무기류와 취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철솥이 그대로 방치된 점으로 보아 적군의 기습으로 주둔군이 전멸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차산 보루는 이와 달리 무기와 철부를 수습하여 철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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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4보루는 구의동보루에서 직선 거리로 5km가량 떨어진 산악지형으로 도보로 약 2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다. 따라서 구의동 보루가 적군에게 기습을 받은 것을 확인하고 무기와 장비를 수습하여 퇴각할 만한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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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적이 축조된 시기의 상한은 [[고구려]]가 [[한강]] 이남을 점령하기 이전인 5세기 중엽경, 폐기 시점은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6세기 중엽으로 볼 수 있다. [[구의동 보루]]에 대한 이러한 연대관은 출토 유물이 대체로 5세기 중엽 ~ 6세기 중엽경의 [[고구려]] 유물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 점에서도 뒷받침된다.
이를 바탕으로 무기의 수에 따라 주둔한 군사의 수를 추정하면 구의동 보루에는 10명 주둔한 것으로 추정할 있다. 무기류는 당시 개인 소지품으로 무기류의 수량이 결국 이곳에 주둔한 군사의 수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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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동 보루''' 출토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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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동 보루'''에서는 1,300여 점에 달하는 쇠화살촉을 제외하고도 15종 50여 점에 달하는 철기가 출토되었다. 한 유적에서 이처럼 많은 종류와 양의 철기가 출토된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철기 가운데 무기류가 많은 점에서 '''구의동 보루'''의 군사적 중요성을 엿볼 있는데, 출토된 무기류는 철도 2자루, 철모 9점, 철부 4점, 철촉 1.300여점이다. 무기류는 당시 개인 소지품으로 무기류의 수량이 결국 이곳에 주둔한 군사의 수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대략 10명 정도의 군사가 주둔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개별 병사는 모두 창을 소지하고 있었고, 이 중 지휘관급 2명은 칼도 함께 소지하고 있었다. 또 병사 1인당 300발 정도의 화살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근접전에서 적의 갑옷과 투구를 격파하는 데 사용된 도끼 4자루는 부대원이 공동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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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군사 수는 『신당서』의 내용과 유사하여 주목된다.『신당서』제50 병지에 보면 고대부대의 최소단위는 10명으로 이를 '화'라 했으며, 다음 '대'는 '화'를 다섯 개 합친 것으로 50명으로 구성되었고, 대의 다음 단위는 단으로 단은 300명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있다.
  
구의동에서 출토된 무기류는 철도2자루, 철모9점, 철부(유공부)4점, 철촉 1.300여점이다. 이때 개인 무기로 추정한 것은 철도, 철모, 철부인데 고구려 벽화고분에 그려진 무사들의 경우 칼(鐵刀)를 차고 있으면서 철모(鐵 )를 들고 있으므로 철도는 군사의 수를 세는데서 제외하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철부는 형태상 공구로 사용할 수도 있으며, 아차산 4보루의 경우 40여점의 유공철부(단조철부)가 출토되었으나 횡공부(橫 斧)는 2점만 출토되었고, 유공철부와 횡공부는 비슷한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양상으로 출토되고 있으며 유공부는 근접전을 제외하면 무기로서의 효용이 떨어지므로 제외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구의동 보루에 주둔했던 군사는 9명으로 대략 10명 정도의 군사가 주둔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군사 수는 『신당서』의 내용과 유사하여 주목된다. 즉 『신당서』제50 병지에 보면 고대부대의 최소단위는 10명으로 이를 ‘화’라 했으며, 다음 ‘대’는 ‘화’를 다섯 개 합친 것으로 50명으로 구성되었고, 대의 다음 단위는 단으로 단은 300명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있다.
 
 
또한 『삼국사기 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도 상양왕23년조에 수양제가 113만의 대군으로 고구려에 침입할 때 내린 조서(詔書)의 기사를 참고 할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 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도 상양왕23년조에 수양제가 113만의 대군으로 고구려에 침입할 때 내린 조서(詔書)의 기사를 참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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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帝親授節度. 海軍上將亞將各一人上, 騎兵四十隊長, 隊百人, 十隊爲團. 步卒八十隊, 分爲四團 , 團各有偏將一人.…
  
『… 帝親授節度. 海軍上將亞將各一人上, 騎兵四十隊長, 隊百人, 十隊爲團. 步卒八十隊, 分爲四團 , 團各有偏將一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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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은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입할 때 수의 군대 편제를 적고 있는데 각 군에 상장과 아장이 1명씩 있고, 기병은 40대인데 각 대는 100명이고, 10대가 1단이 되었다. 보졸은 80대 인데 4단을 만들었으며, 단마다 편장 1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이러한 기록이 중국의 경우를 기록한 것이어서 그대로 고구려 군대의 편제에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당시 고구려에도 이러한 부대 편제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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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러한 기록들과 구의동보루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 최소9명, 최대13인으로 즉 대략 10여명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구의동보루는 10명 정도 단위의 부대가 주둔했던 전초기지의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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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보루 발굴을 통해서 고구려군의 편제에 대해서도 새로운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 문헌기록에 따르면 4∼5세기 고구려는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3만∼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였음을 알 수 있으나 더 자세한 편제에 대해서는 알기 어려웠다. 그런데 아차산보루를 발굴함으로써 이에 대한 새로운 분석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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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4보루에는 구의동보루와 같은 규모의 온돌이 있는 건물이 10기 있으므로 100명의 군사가 주둔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이보다 작은 보루에는 50명의 병사가 주둔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고구려군의 부대가 10명, 50명, 100명 단위의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차산 일원에는 20여 기의 보루가 있으므로 대략 2천여 명의 병사들이 상주하고 있었음도 알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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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4보루는 둘레 210여 m, 성벽내부에 모두 7기의 건물지, 13기의 온돌 설치가 되어 있으며, 온돌 하나 또는 두기가 하나의 단위을 이루고 있으며, 온돌 주변에는 할석을 1~2줄 쌓아 방형의 경계를 구획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토기류가 온돌 주변의 방형공간 내부에서 출토된다. 즉 온돌시설 중심으로 하나의 부대단위를 이루며 취사행위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온돌시설을 포함한 방형 구획의 면적은 대체로 15평내외의 규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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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구의동 보루의 온돌을 포함한 실내 면적이 14평 가량되므로 아차산 4보루의 온돌시설을 포함한 방형 공간에도 같은 수의 군사가 생활했다고 할 수 있다. 아차산 4보루에는 모두 10개의 온돌을 포함한 방형공간이 구획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최소부대단위가 10개정도 주둔하고 있었으며, 100여명의 군사가 주둔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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앛산 4보루는  온돌방의 규모는 13~16평으로 구의동보루(九宜洞堡壘)의 경우 14평 정도의 규모에 10가량이 거주했던 것으로 미루어 아차산(峨嵯山) 4보루(堡壘)의 단위 온돌구획 내에도 대략 10명의 군사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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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아차산 4보루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국의 산성),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이 기록은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입할 때 수의 군대 편제를 적고 있는데 각 군에 상장과 아장이 1명씩 있고, 기병은 40대인데 각 대는 100명이고, 10대가 1단이 되었다. 보졸은 80대 인데 4단을 만들었으며, 단마다 편장 1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이러한 기록이 중국의 경우를 기록한 것이어서 그대로 고구려 군대의 편제에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당시 고구려에도 이러한 부대 편제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들과 구의동보루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 최소9명, 최대13인으로 즉 대략 10여명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구의동보루는 10명 정도 단위의 부대가 주둔했던 전초기지의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차산 4보루는 둘레 210여 m, 성벽내부에 모두 7기의 건물지, 13기의 온돌 설치가 되어 있으며, 온돌 하나 또는 두기가 하나의 단위을 이루고 있으며, 온돌 주변에는 할석을 1~2줄 쌓아 방형의 경계를 구획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토기류가 온돌 주변의 방형공간 내부에서 출토된다. 즉 온돌시설 중심으로 하나의 부대단위를 이루며 취사행위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온돌시설을 포함한 방형 구획의 면적은 대체로 15평내외의 규모이다. 그런데 구의동 보루의 온돌을 포함한 실내 면적이 14평 가량되므로 아차산 4보루의 온돌시설을 포함한 방형 공간에도 같은 수의 군사가 생활했다고 할 수 있다. 아차산 4보루에는 모두 10개의 온돌을 포함한 방형공간이 구획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최소부대단위가 10개정도 주둔하고 있었으며, 100여명의 군사가 주둔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최근 까지의 아차산 일원의 조사성과를 통해 보면 이들 각 보루에는 10명(구의동 보루), 50명(홍련봉 1보루), 100명(아차산 4보루, 시루봉 보루)의 단위로 군사들이 주둔하였으며, 아차산 일원에 주둔했던 전체 군사의 수는 2천여 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최근 까지의 아차산 일원의 조사성과를 통해 보면 이들 각 보루에는 10명(구의동 보루), 50명(홍련봉 1보루), 100명(아차산 4보루, 시루봉 보루)의 단위로 군사들이 주둔하였으며, 아차산 일원에 주둔했던 전체 군사의 수는 2천여 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차산 일원은 의정부와 양주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마지막이며 이 산 줄기 좌우에는 중랑천과 왕숙천을 낀 비교적 넓은 평지가 분포하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요인을 고려해 볼때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보루는 3만~5만명 가량의 군사가 이동하기는 어려우며 많은 수의 군사들은 중랑천이나 왕숙천 변의 평지를 따라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앛산 4보루는 건물지(建物址)는 7기가 확인되었으며, 모두 장방형의 평면을 하고 있으며, 일부를 제외하고는 돌과 점토를 섞어 쌓은 담장식 벽채이며, 그 위에 맞배식 지붕이 덮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지(建物址)의 내부(內部)에는 온돌(溫突)과 배수구(排水口) 및 방혈수구유구(方形竪穴遺構) 등이 있는데, 대형 건물의 내부는 온돌을 중심으로 방형의 구획을 하고 있다. 가장 큰 건물인 3호 건물지의 경우 내부에 3기의 온돌과 2기의 방혈수구유구(方形竪穴遺構)가 설치되어 있는데, 각각의 온돌 주변은 다듬어진 석재를 이용하여 방형으로 구획을 하고 있으며, 유물은 주로 방형구획내에서 출토된다. 이들 구획선은 석재를 1~2단 쌓은 것으로 일종의 칸막이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칸막이는 높이가 10~20cm 가량으로 강제적인 칸막이의 기능은 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온돌과 관련된 인원에 대한 개념적인 구획선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온돌방의 규모는 13~16평으로 구의동보루(九宜洞堡壘)의 경우 14평 정도의 규모에 10가량이 거주했던 것으로 미루어 아차산(峨嵯山) 4보루(堡壘)의 단위 온돌구획 내에도 대략 10명의 군사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3호 건물지의 남쪽은 별다른 시설이 없이 빈 공간으로 남아 있는데, 이곳에서는 유물도 거의 출토되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공공장소로 이용되었던 공간으로 추정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차산 4보루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국의 산성),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아차산 보루군이 대형 성곽으로 기능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성곽은 기본적으로 방어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므로 군사적인 성격이 강하다. 화재로 전소된 구의동 보루에서는 철솥을 비롯한 완형 유물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당시 군 부대의 편제 및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기초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10자루의 창이 출토되어 고구려 군 부대는 병사 10인을 기본으로 하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구의동 보루에서는 창 외에도 도끼 4점과 대도 2점 그리고 화살촉이 약 3천여점 출토되어, 고구려 병사들이 전투 상황에 따라 다양한 무기를 사용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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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년 백제군의 기습으로 전멸당한 것으로 파악되는 구의동보루는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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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로 전소된 구의동 보루에서는 철솥을 비롯한 완형 유물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당시 군 부대의 편제 및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기초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림 11| 구의동보루 철솥 출토 상황(왼쪽, 1977) 및 복원된 철솥과 시루(오른쪽)
 
|그림 11| 구의동보루 철솥 출토 상황(왼쪽, 1977) 및 복원된 철솥과 시루(오른쪽)
구의동보루는 불에 타서 폐기되었는데, 온돌 아궁이에 철솥과 철호가 걸려 있었으며 많은 양의 토기와 철제 무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는 다른 보루에서는 완전한 형태의 철솥이 한 점도 출토되지 않는 점과 대조적이다. 구의동보루를 제외하고는 불에 타서 폐기된 유적도 없다. 이런 상황으로 미루어 한강변에 인접한 작은 초소의 성격인 구의동보루에 있던 병사들은 551년 가을 백제군의 기습으로 전멸하였으며, 아차산보루의 병사들은 철솥과 무기를 거두고 철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구의동보루에서 출토된 무기류의 수를 통해 10여 명의 병사가 주둔했던 것도 알게 되었다. ⓒ서울대학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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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동보루는 불에 타서 폐기되었는데, 온돌 아궁이에 철솥과 철호가 걸려 있었으며 많은 양의 토기와 철제 무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는 다른 보루에서는 완전한 형태의 철솥이 한 점도 출토되지 않는 점과 대조적이다. 구의동보루를 제외하고는 불에 타서 폐기된 유적도 없다. 이런 상황으로 미루어 한강변에 인접한 작은 초소의 성격인 구의동보루에 있던 병사들은 551년 가을 백제군의 기습으로 전멸하였으며, 아차산보루의 병사들은 철솥과 무기를 거두고 철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서울대학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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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의 군사편제에 대한 문헌기록이 매우 소략하여 그 실상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발굴조사 결과 구의동 보루의 경우 군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무기류와 취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철솥이 그대로 방치된 점으로 보아 적군의 기습으로 주둔군이 전멸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차산 보루는 이와 달리 무기와 철부를 수습하여 철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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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4보루는 구의동보루에서 직선 거리로 5km가량 떨어진 산악지형으로 도보로 약 2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다. 따라서 구의동 보루가 적군에게 기습을 받은 것을 확인하고 무기와 장비를 수습하여 퇴각할 만한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다.
  
  
아차산보루 발굴을 통해서 고구려군의 편제에 대해서도 새로운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 문헌기록에 따르면 4∼5세기 고구려는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3만∼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였음을 알 수 있으나 더 자세한 편제에 대해서는 알기 어려웠다. 그런데 아차산보루를 발굴함으로써 이에 대한 새로운 분석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551년 백제군의 기습으로 전멸당한 것으로 파악되는 구의동보루는 여기서 발굴된 유물 분석에 따르면 10여 명의 군사가 주둔하고 있었다. 개별 병사는 모두 창을 소지하고 있었는데, 이 중 지휘관급 2명은 칼도 함께 소지하고 있었다. 또 병사 1인당 300발 정도의 화살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근접전에서 적의 갑옷과 투구를 격파하는 데 사용된 도끼 4자루는 부대원이 공동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아차산 4보루에는 구의동보루와 같은 규모의 온돌이 있는 건물이 10기 있으므로 100명의 군사가 주둔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이보다 작은 보루에는 50명의 병사가 주둔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고구려군의 부대가 10명, 50명, 100명 단
 
위의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차산 일원에는 20여 기의 보루가 있으므로 대략 2천여 명의 병사들이 상주하고 있었음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지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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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6일 (일) 00:38 판

개관

서울시 광진구 구의동에 위치한 고구려 군사 요새로, 1977년∼1988년에 걸쳐 화양지구택지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조사되었는데, 지금은 파괴되어 남아있지 않다. 한강 북안의 높은 구릉 정상부에 위치한 구의동 보루는 유적의 입지나, 유구의 성격, 출토 유물의 성격 등을 통해 볼 때 백제와 대치하고 있던 고구려의 군사요새로서, 대체로 10여 명의 군사가 주둔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유적과 연결선상에 있는 아차산 일대 보루군구의동 보루와 같은 성격의 유적임이 밝혀지고 있다. 20세기 전반의 지형도를 보면 아차산에서 이어지는 능선 끝자락 강변의 소봉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이들 사이에 또 다른 구릉이 존재하고 있어 원래는 아차산 고구려 보루군과 연결선상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구의동 보루아차산 일대 보루군은 같은 시기로 추정되며, 장수왕 이후 고구려 남진정책의 일환으로 한강 이남을 공략하기 위한 군사 전초기지로 사용되다가, 551년 나제연합군이 한강 유역으로 북상할 무렵에는 방어기지로 사용되었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은 이들 유적이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지점이 한성 백제의 중심지인 몽촌토성, 풍납토성, 석촌동·방이동고분군 일대라는 사실로도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

이 유적이 축조된 시기의 상한은 고구려한강 이남을 점령하기 이전인 5세기 중엽경, 폐기 시점은 신라한강 유역을 차지한 6세기 중엽으로 볼 수 있다. 구의동 보루에 대한 이러한 연대관은 출토 유물이 대체로 5세기 중엽 ~ 6세기 중엽경의 고구려 유물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 점에서도 뒷받침된다.

구의동 보루 출토 무기

구의동 보루에서는 1,300여 점에 달하는 쇠화살촉을 제외하고도 15종 50여 점에 달하는 철기가 출토되었다. 한 유적에서 이처럼 많은 종류와 양의 철기가 출토된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철기 가운데 무기류가 많은 점에서 구의동 보루의 군사적 중요성을 엿볼 수 있는데, 출토된 무기류는 철도 2자루, 철모 9점, 철부 4점, 철촉 1.300여점이다. 무기류는 당시 개인 소지품으로 무기류의 수량이 결국 이곳에 주둔한 군사의 수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대략 10명 정도의 군사가 주둔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개별 병사는 모두 창을 소지하고 있었고, 이 중 지휘관급 2명은 칼도 함께 소지하고 있었다. 또 병사 1인당 300발 정도의 화살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근접전에서 적의 갑옷과 투구를 격파하는 데 사용된 도끼 4자루는 부대원이 공동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군사 수는 『신당서』의 내용과 유사하여 주목된다.『신당서』제50 병지에 보면 고대부대의 최소단위는 10명으로 이를 '화'라 했으며, 다음 '대'는 '화'를 다섯 개 합친 것으로 50명으로 구성되었고, 대의 다음 단위는 단으로 단은 300명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있다.

또한 『삼국사기 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도 상양왕23년조에 수양제가 113만의 대군으로 고구려에 침입할 때 내린 조서(詔書)의 기사를 참고 할 수 있다.

… 帝親授節度. 海軍上將亞將各一人上, 騎兵四十隊長, 隊百人, 十隊爲團. 步卒八十隊, 分爲四團 , 團各有偏將一人.…

이 기록은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입할 때 수의 군대 편제를 적고 있는데 각 군에 상장과 아장이 1명씩 있고, 기병은 40대인데 각 대는 100명이고, 10대가 1단이 되었다. 보졸은 80대 인데 4단을 만들었으며, 단마다 편장 1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이러한 기록이 중국의 경우를 기록한 것이어서 그대로 고구려 군대의 편제에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당시 고구려에도 이러한 부대 편제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들과 구의동보루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 최소9명, 최대13인으로 즉 대략 10여명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구의동보루는 10명 정도 단위의 부대가 주둔했던 전초기지의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차산보루 발굴을 통해서 고구려군의 편제에 대해서도 새로운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 문헌기록에 따르면 4∼5세기 고구려는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3만∼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였음을 알 수 있으나 더 자세한 편제에 대해서는 알기 어려웠다. 그런데 아차산보루를 발굴함으로써 이에 대한 새로운 분석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아차산 4보루에는 구의동보루와 같은 규모의 온돌이 있는 건물이 10기 있으므로 100명의 군사가 주둔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이보다 작은 보루에는 50명의 병사가 주둔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고구려군의 부대가 10명, 50명, 100명 단위의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차산 일원에는 20여 기의 보루가 있으므로 대략 2천여 명의 병사들이 상주하고 있었음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아차산 4보루는 둘레 210여 m, 성벽내부에 모두 7기의 건물지, 13기의 온돌 설치가 되어 있으며, 온돌 하나 또는 두기가 하나의 단위을 이루고 있으며, 온돌 주변에는 할석을 1~2줄 쌓아 방형의 경계를 구획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토기류가 온돌 주변의 방형공간 내부에서 출토된다. 즉 온돌시설 중심으로 하나의 부대단위를 이루며 취사행위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온돌시설을 포함한 방형 구획의 면적은 대체로 15평내외의 규모이다. 그런데 구의동 보루의 온돌을 포함한 실내 면적이 14평 가량되므로 아차산 4보루의 온돌시설을 포함한 방형 공간에도 같은 수의 군사가 생활했다고 할 수 있다. 아차산 4보루에는 모두 10개의 온돌을 포함한 방형공간이 구획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최소부대단위가 10개정도 주둔하고 있었으며, 100여명의 군사가 주둔했음을 알 수 있다. 앛산 4보루는 온돌방의 규모는 13~16평으로 구의동보루(九宜洞堡壘)의 경우 14평 정도의 규모에 10가량이 거주했던 것으로 미루어 아차산(峨嵯山) 4보루(堡壘)의 단위 온돌구획 내에도 대략 10명의 군사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차산 4보루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국의 산성),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따라서 최근 까지의 아차산 일원의 조사성과를 통해 보면 이들 각 보루에는 10명(구의동 보루), 50명(홍련봉 1보루), 100명(아차산 4보루, 시루봉 보루)의 단위로 군사들이 주둔하였으며, 아차산 일원에 주둔했던 전체 군사의 수는 2천여 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551년 백제군의 기습으로 전멸당한 것으로 파악되는 구의동보루는 여 화재로 전소된 구의동 보루에서는 철솥을 비롯한 완형 유물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당시 군 부대의 편제 및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기초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림 11| 구의동보루 철솥 출토 상황(왼쪽, 1977) 및 복원된 철솥과 시루(오른쪽) 구의동보루는 불에 타서 폐기되었는데, 온돌 아궁이에 철솥과 철호가 걸려 있었으며 많은 양의 토기와 철제 무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는 다른 보루에서는 완전한 형태의 철솥이 한 점도 출토되지 않는 점과 대조적이다. 구의동보루를 제외하고는 불에 타서 폐기된 유적도 없다. 이런 상황으로 미루어 한강변에 인접한 작은 초소의 성격인 구의동보루에 있던 병사들은 551년 가을 백제군의 기습으로 전멸하였으며, 아차산보루의 병사들은 철솥과 무기를 거두고 철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서울대학교박물관

삼국시대의 군사편제에 대한 문헌기록이 매우 소략하여 그 실상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발굴조사 결과 구의동 보루의 경우 군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무기류와 취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철솥이 그대로 방치된 점으로 보아 적군의 기습으로 주둔군이 전멸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차산 보루는 이와 달리 무기와 철부를 수습하여 철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차산 4보루는 구의동보루에서 직선 거리로 5km가량 떨어진 산악지형으로 도보로 약 2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다. 따라서 구의동 보루가 적군에게 기습을 받은 것을 확인하고 무기와 장비를 수습하여 퇴각할 만한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다.


지도

클래스

  •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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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동 보루 A는 B에 위치한다 광진구
구의동 보루 A는 B에 위치한다 구의동
구의동 보루 A는 B시대에 만들어졌다 고구려
구의동 보루 A는 B의 발견지이다 구의동 보루 철솥
구의동 보루 A는 B와 관련된다 아차산 4보루

갤러리

주석

  1. 아래 사진출처: 서울대학교박물관
  2. 그림출처: '구의동 보루유적의 고구려 무기', 한국 미의 재발견-고분미술
  3. 그림출처: '구의동 보루유적의 고구려 무기', 한국 미의 재발견-고분미술

참고

  • 아차산 내 아차산 3보루 안내판

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