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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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해설

고려사는 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 등이 세종의 교지를 받아 기전체(紀傳體)로 만든 고려의 정사(正史)로서, 조선시대에 고려시대사를 정리하면서 일정한 주관과 제약이 가해진 2차적인 성격을 지닌 사료이다.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고려사는 총 139권 75책으로 된 완질본으로 보존 상태는 완벽에 가까운 매우 좋은 상태이다. 이 판본은 1482년(성종 13)에 인출 된 것으로 추정되는 을해자본(乙亥字本)을 1613년(광해군 5)에 번각한 목판본 이다. 인출 시기는 동일한 판본의 초쇄본으로 추정되는 규장각 소장의 태백산사고본과 대조해 본 결과, 자면(字面)이나 계선(界線)에서 나뭇결이나 터짐 현상 혹은 탈락 현상이 더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규장각 소장본보다 후쇄본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총 75책 139권의 거질(巨帙)임에도 불구하고 낙질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상태도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전래본 중 가장 일찍 인출된 것은 1482년(성종 13)에 인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을해자본이나, 을해자본은 완질본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 을해자본 다음으로 간인된 이 판본의 완질본이 현재 4질 밖에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 그 내용이 전해지는 사료가 부족하여 연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正史)로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는 점에서 학술적, 문화재적으로 가치가 높은 자료이다.[1]

아차산과의 관련성

아차산(峨嵯山)은 민간에서 아끼산·액끼산·에께산·액계산·액개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 왔다. 『삼국사기』제45권 <온달>과 제25권 <개로왕전설>에는 "‘아차성(아단성)阿且城(阿旦城)’아래에서 전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峨嵯'라는 표기 전에는 '阿且', '阿旦'등 다양한 표기 방식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차(峨嵯)'라는 명칭은 『고려사』제112권 열전 조운흘(趙雲仡) 조에서 처음 등장한다.[2] 고려사가 조선시대 세종 때부터 편찬되기 시작하여 문종 원년에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아차산(峨嵯山)이라는 표기는 조선시대부터 쓰였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며 오랑캐[阿]라는 뜻을 피하고, 태조 이성계의 이름인 ‘旦’과 혼동하지 않기 위해 ‘阿且山’을 ‘아차산(峨嵯山)’으로 쓰고 읽었다는 주장이 이를 뒷받침한다.

관련 항목

이 문서 관계 관련 문서
고려사 A에 B가 기록되어 있다 아차산, 장수왕, 장한성
고려사 A는 B에 만들어졌다 조선시대

주석

  1. 출처: 문화재청 '고려사'
  2. 일흔셋에 병이 들어 광주 고원성(古垣城)에서 죽었는데 후사는 없다. 해와 달을 사자(死者)의 입에 물리는 구슬로 삼고 청풍명월(淸風明月)을 제상에 올릴 제물로 삼아 옛 양주(楊州 : 지금의 경기도 양주군) 아차산(峩嵯山) 남쪽 마하야(摩訶耶)에 장사지냈다. 출처: 네이버 '국역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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