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서도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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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민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6월 17일 (월) 22:0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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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서도중앙교회 [江華西島中央敎會]



개관

강화 서도 중앙교회 건물은 1923년 교인들의 헌금으로 지은 한옥 예배당이다. 1902년 감리교 전도사 윤정일이 복음을 전도하기 위해 이곳 주문도리에 들어왔고, 1905년에는 교회와 신도가 마음을 모아 영생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1923년 교인들의 헌금으로 이 교회를 새로 지었다. 강화도는 19세기 말 우리 나라가 서양에 문호를 개방할 때 그 전진적 기지 역할을 했던 곳이고, 따라서 서양인들의 선교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진 곳이다. 이들 선교사에 의해 세워졌거나 그들의 영향에 의해 당시에 세워진 교회 중 지금까지 강화도에 남아있는 것만 3곳에 이른다. 1900년에 세운 성공회 강화 성당, 1906년에 세워진 강화 온수리 성공회교회 그리고 서도 중앙 교회가 현존하고 있는 당시의 교회들이다. 그 중 서도 중앙 교회는 1923년 2월 교인들의 건축 헌금으로 지어지기 시작해 같은 해 7월에 한옥 예배당으로 완공되었으며, 1978년 주문 교회에서 서도 중앙 교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현재 대한 기독교 감리회 소속이다.

강화 감리교 전래

감리교는 1887년부터 인천에 선교를 시작하였는데 선교사와 한국인 교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1892년 존스(G.H.Jones) 목사가 인천에 정착하여 조력자들의 협조로 점차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고 인천은 감리교 서부선교기지로 자리 잡았다. 1893년 성공회와 마찬가지로 감리교의 강화 선교가 시작되었다. 인천 내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이승환이 존스 목사를 고향인 강화 서사면 시루미에 초빙하여 그 모친과 지역 양반 유지인 김상임에게 전도한 결과 교산교회가 태동활 수있었다. 1900년대에는 각 면마다 교회가 설립되었고 전체 강화주민의 약 10%가 감리교 신자가 되는 급속한 성장을 보였다. 더욱이 강화의 기독교인들은 선교 초기부터 신앙교육과 계몽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1]

주문도

강화군 서도면 면소재지이며 주문도 외의 부속섬은 볼음도, 아차도, 말도 등이 있다. 주문도의 이름은 예사롭지 않다. 조선 후기에 임경업(林慶業) 장군으로부터 유래했다고 한다. 장군이 중국의 명나라 사신으로 갈 때 임금에게 하직하는 글을 이 섬에서 올렸다 하여 아뢸 주(奏), 글월 문(文)을 써서 주문도(奏文島)라 하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주문도(注文島)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비슷하게 임경업 장군과 관련하여 물가를 뜻하는 삼 수 변에 임금 주(主)자를 합한 주(注)자와 글월 문(文)자를 써서 주문도라 부른다고 전해져오고 있다. 이 외에도 옛날에 사신단이 중국을 왕래할 때 한양의 국왕에게 기나긴 여정을 보고하는 글을 올렸다는 유래를 갖고 있다.

건축

건축형식은 2고주(高柱), 5량가(梁架)의 가구구조를 가졌다. 평면 구성은 중세 초기 서양교회 형식이나 매우 단순하며 예배실로 쓰이는 좁은 신랑(身廊:Nave)과 측랑(側廊:Aisle), 그리고 전면 중앙 강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강단 뒤에는 사제석(司祭席)이 마련되어 있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며, 홑처마집이다. 건물 안은 중세 전기의 서양교회 양식을 하고 있으나 매우 단순하여, 예배실로 쓰이는 좁은 신랑(身廊)과 측랑(側廊), 중앙의 강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 전통 목조건물의 가구형식을 바탕으로 서양교회를 지었다는데 큰 의미를 지닌다.

사진

위치

관련 사이트

출처

  1. 『신편 강화사』, 강화군:강화군 편찬위원회, 2003

기여

일자 역할 이름 전공
2019.4. 편집 이수민 인문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