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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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 Choi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5월 16일 (목) 11:0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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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한국어

강화도의 세번째 개신교 교회다. 홍의교회에 출석하던 주선일, 박성일, 허진일, 김봉일 등 몇몇 교인이 강화읍 천교하(현 강화읍 신문리. 신문리 144번지, 초가 6칸 반)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오늘날 강화중앙교회의 모체(잠두교회)가 되었다.1900년 9월 1일의 일이었다. 강화지역 복음 전파 8년만에 수도 강화읍에 드디어 교회가 세워졌다. 다음해 4월 존스 (G.H.Jones, 趙元時) 목사의 협조로 기와집 25칸, 초가집 16칸을 구입하여 교회를 현 위치로 옮겼다. 이 교회는 설립 8개월 만에 강화에서 가장 넓고 큰 예배당을 마련하게 되었으며, 강화 선교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04년 '월곶교회' 개척을 시작으로 26개 교회를 직접 개척하거나 설립에 도움을 주었고, 잠두의숙을 지어 교육운동에 앞장섰으며 강화지역의 항일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하와이 이민에도 김우제 전도사를 비롯한 강화교회 출신들이 참여하여 하와이 현지에 한인감리교회를 세우고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았다. 교회명은 1914년‘잠두교회’에서‘강화읍교회’로 변경. 1975년 11월 ‘강화읍교회’에서 ‘강화중앙교회’로 변경되었다.

영어

위치


교육선교

합일초등학교

강화중앙교회는 교육선교를 위해 1901년 4월 1일에 존스 목사와 박능일 전도사가 신교육 기관인 교회부설로 “잠두의숙(蠶頭義塾)”을 설립하였으며, 1902년에 또 여학교인 “합일여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민중교육을 시작하였다. 이후 두 학교는 하나의 학교로 통합되었는데, 오늘의 합일초등학교로 발전되었다. 이 학교는 일제치하에 저항하는 민족운동과 한국 개화의 산실이 되어 왔다. 이 학교의 이름은 강화양명학과 강화감리교를 동시에 떠오르게 한다. 양명학에서의 '지행합일'이 학교 이름으로 발전했다는 주장과 개신교의 '하나님'에서 합일이라는 이름이 기원한다는 주장이 모두 공존한다.

항일독립운동

1907년 일본군의 강화기독교인 탄압에 저항하고, 1919년 3월 18일 잠두교회 청년교인 7명이 독립유인물을 인쇄·배포했다. 1905년 3월 3일 강화진위대장을 사임한 이동휘(李東輝)는 1907년 군대 해산이 되자, 이동휘는 7월 24일 강화로 내려와 강화읍내 연무당에서 기독교도인 김동수·김남수 형제, 허성경·김광천·김기약 등과 군중집회를 열고 격렬한 배일연설을 하였다. 7월 26일에는 연무당에서 대한자강회총회를 열고, 30일에는 전등사에서 김동수·허성경 등 기독교도와 해산된 군인 400명을 모아 합성친목회라는 대규모 반일집회를 열었다. 이후 8월 9일 강화군민의 봉기가 일어나자 수원의 일본군은 8월 11일 강화에 도착하여 진압을 시작하였다. 갑곶진 전투에서 50여 명이 사살되는 등 의병측 피해가 속출하는 한편, 강화잠두교회가 반일운동의 준동지로 지목되어 일본군이 포위를 하였다. 그리고 일진회 회원들은 주모자 이동휘 등을 체포한다는 명목으로 전 강화진위대 대원이었던 김동수 권사 3형제를 유인하여 압송하는 중 선원면 더리미에서 살해하였다. 1919년 3월 18일의 강화읍 만세운동이 있은 후 조구원을 비롯한 강화잠두교회에 출석하는 조봉암과 청년교인 6명이 강화읍교회에서 비밀조직을 결성한 후 독립운동 격문을 부착하고, 자유민보 등 10여 종류의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읍내 상인들에게 철시를 종용하고, 경찰로 근무하는 한국인의 각성을 촉구하다 4월 20일 체포되었다.

독립운동관련인물

초기 개척인물로는 박능일을 비롯하여 김봉일과 권신일, 윤정일, 정천일 등이 있다. 소위 말하는 ‘일자(一字)’ 돌림신앙의 장본인들이었다. 유경근도 이 교회와 함께 독립운동을 펼쳤다. 강화진위대장 출신 민족주의자이자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성재 이동휘가 3대 담임인 김우제(김이제) 목사와의 인연으로 개신교에 입문했고 권사로 시무했다. 4대 담임이었던 홍승하는 후에 신민회를 조직한다. 5대 담임이었던 손승용은 독립신문 기자출신 목사였다. 죽산 조봉암이 신자로 출석했다.

인물관계


더리미 순국지

갑곶 순교지에서 남쪽으로 1.5Km 정도 위치한 더리미 순국지에서 4명의 기독교인이 학살을 당했다. 1907년 대한 제국의 군대가 해산되던 날 강화도의 군인들과 주민들은 의병이 되었다. 일본군과의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었고 읍내까지 들어와 30여명의 주민을 무차별 학살했으며 많은 이들이 체포되었다. 그중에 김동수, 김영구, 김남수, 김근식은 강화 중앙 교회에 다니는 독실한 신자였고 강화지역 반일 사상을 이끈 민족의 지도자였다. 일본군은 이들을 칼로 머리를 쳐 죽였고 강화도 감리교회에 큰 박해가 시작이 되었다. 1년 후 데밍 선교사는“이곳(강화)은 피의 세례를 통과 했습니다.”라는 말을 남겼고 이들의 순교의 피는 강화도에 오늘의 감리교회를 이룬 큰 부흥의 씨앗이 되었다.

예수교도 8인조사건

보성중학교, 연희전문학교, 인천상업학교에 다니는 나이 어린 학생 몇몇과 강화읍내의 젊은 청년들 8명이 비밀리에 독립만세운동을 조직했다. 이들은 조봉암 등 8명으로 일제는 '공범 8인조'라고 이름을 붙였다. 조봉암 등은 밤마다 벽모문을 써서 서울 등 여러 곳에서 일어난 민중 봉기 소식을 강화민들에게 알리며 민족자각에 앞장섰고 경고문, 팸플릿 등을 돌려 동지를 모으면서 거사를 계획하다가 4월20일 검거됐다. 이때 고제몽, 조구원, 오영섭 등 3명의 학생은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및 소요죄로 그해 9월30일에 서울서 열린 공판에서 6개월 징역을 구형받았다가 태형 90대를 선고받았다.

"3.1운동이 터졌습니다. 그때 우리 교회(강화중앙교회) 목사님은 김광국씨였습니다. 그분은 매우 애국정신이 높은 분으로 우리교회 청년들에게 항상 좋은 말씀을 들려 주셨는데, 3.1운동이 터지자 교회 중심의 청년들이 그 운동의 선두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전 강화가 한 부락도 빠지지 않고 독립만세를 불렀고 수 천 명이 볼기를 맞았습니다. 그중 유봉진 씨 외에 20며 명은 서대문 감옥에서 1년으로 부터 5년까지 고생살이를 했는데, 나는 그중 1년 측에 들어서 난생 처음으로 감옥살이를 해보았습니다."[조봉암, ‘나의 정치백서’(<신태양>, 1957.5), 정태영, <조봉암과 진보당>, 한길사, 1991, 364-365쪽.]

독립선언서 운반

강화에서의 만세 시위 날짜는 3월 18일 강화 장날이었다.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시위 현장까지 무사히 운반하는 것이 문제였다. 황도문이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는 황유부의 집에 있는 등사기로 인쇄해서 각 교회로 배포했다. 인쇄물을 나르는 것은 강화중앙교회 전도부인 김유니스를 비롯한 여자 교인들이 주축이 되었다. 일설에는 일본 경찰의 검문을 피하기 위해서 인쇄물을 치마 속에 감추었다고 한다.

해외선교

디아스포라

강화, 인천 지역의 한인들이 하와이로 이주하게 되었다. 강화중앙교회 김우제 전도사는 하와이에서 한인감리교회를 세우는 데 앞장섰고 하와이 현지 한인들의 첫 예배를 이끌었다. 이들은 이후 미주 독립운동의 주축 세력이 된다.

시각자료

관련 사이트


참고문헌

『강화중앙교회100년사』이은용

출처


기여

일자 역할 이름 전공
2019년 4월 편집 및 정리 최원재 교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