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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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 Choi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5월 8일 (수) 01:1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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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강화 세번째 개신교 교회. 홍의교회에 출석하던 주선일, 박성일, 허진일, 김봉일 등 몇몇 교인이 강화읍 천교하(현 강화읍 신문리. 신문리 144번지, 초가 6칸 반)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오늘날 강화중앙교회의 모체(잠두교회)가 되었다.1900년 9월 1일의 일이었다. 강화지역 복음 전파 8년 만인 1900년에 수도 강화읍에 드디어 교회가 세워졌다. 다음해 4월 존스 (G.H.Jones, 趙元時) 목사의 협조로 기와집 25칸, 초가집 16칸을 구입하여 교회를 현 위치로 옮겼다. 이때 소요된 상당한 금액은 존스 목사의 주선으로 미국 오하이오주 매리에타(Marietta)에 살고 있던 교인, 찰스 오토(Charles Otto)가 보내 준 기금으로 충당되었다. 이로써 8년 전 존스가 강화성에 입성하려던 꿈을 강화토착인들에 의해 이루게 되었다. 이 교회는 설립 8개월 만에 강화에서 가장 넓고 큰 예배당을 마련하게 되었으며, 강화 선교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교회명은 1914년‘잠두교회’에서‘강화읍교회’로 변경. 1975년 11월 ‘강화읍교회’에서 ‘강화중앙교회’로 변경되었다. 1904년 '월곶교회' 개척을 시작으로 26개 교회를 직접 개척하거나 설립에 도움을 주었다.

1907년 일본군의 강화기독교인 탄압에 저항하고, 1919년 3월 18일 잠두교회 청년교인 7명이 독립유인물을 인쇄·배포했던 곳이다. 1905년 3월 3일 강화진위대장을 사임한 이동휘(李東輝)는 지방전도사인 김우제를 통하여 감리교에 입교하고 강화잠두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이후 1907년 군대 해산이 되자, 이동휘는 7월 24일 강화로 내려와 강화읍내 연무당에서 기독교도인 김동수·김남수 형제, 허성경·김광천·김기약 등과 군중집회를 열고 격렬한 배일연설을 하였다. 7월 26일에는 연무당에서 대한자강회총회를 열고, 30일에는 전등사에서 김동수·허성경 등 기독교도와 해산된 군인 400명을 모아 합성친목회라는 대규모 반일집회를 열었다. 이후 8월 9일 강화군민의 봉기가 일어나자 수원의 일본군은 8월 11일 강화에 도착하여 진압을 시작하였다. 갑곶진 전투에서 50여 명이 사살되는 등 의병측 피해가 속출하는 한편, 강화잠두교회가 반일운동의 준동지로 지목되어 일본군이 포위를 하였다. 그리고 일진회 회원들은 주모자 이동휘 등을 체포한다는 명목으로 전 강화진위대 대원이었던 김동수 권사 3형제를 유인하여 압송하는 중 선원면 더리미에서 살해하였다. 1919년 3월 18일의 강화읍 만세운동이 있은 후 조구원을 비롯한 강화잠두교회에 출석하는 조봉암과 청년교인 6명이 강화읍교회에서 비밀조직을 결성한 후 독립운동 격문을 부착하고, 자유민보 등 10여 종류의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읍내 상인들에게 철시를 종용하고, 경찰로 근무하는 한국인의 각성을 촉구하다 4월 20일 체포되었다.

인물

초기 개척인물로는 박능일을 비롯하여 김봉일과 권신일, 윤정일, 정천일 등이 있었다. 소위 말하는 ‘일자(一字)’ 돌림신앙의 장본인들이었다. 유경근도 이 교회와 함께 독립운동을 펼쳤다. 강화진위대장 출신 민족주의자이자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성재 이동휘가 3대 담임인 김우제(김이제) 전도사와의 인연으로 개신교에 입문했고 권사로 시무했다. 4대 담임이었던 홍승하는 후에 신민회를 조직한다. 5대 담임이었던 손승용은 독립신문 기자출신 목사였다. 죽산 조봉암이 신자로 출석했다.

더리미 순국지

갑곶 순교지에서 남쪽으로 1.5Km 정도 위치한 더리미 순국지에서 4명의 기독교인이 학살을 당했다. 1907년 대한 제국의 군대가 해산되던 날 강화도의 군인들과 주민들은 의병이 되었다. 일본군과의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었고 읍내까지 들어와 30여명의 주민을 무차별 학살했으며 많은 이들이 체포되었다. 그중에 김동수, 김영구, 김남수, 김근식은 강화 중앙 교회에 다니는 독실한 신자였고 강화지역 반일 사상을 이끈 민족의 지도자였다. 일본군은 이들을 칼로 머리를 쳐 죽였고 강화도 감리교회에 큰 박해가 시작이 되었다. 1년 후 데밍 선교사는“이곳(강화)은 피의 세례를 통과 했습니다.”라는 말을 남겼고 이들의 순교의 피는 강화도에 오늘의 감리교회를 이룬 큰 부흥의 씨앗이 되었다.

다음은 현순 목사의 자사(自史)에서 발췌한 육필증언이다.

1907년 당시에 나는 배재학당 총교사와 정동회당(정동제일교회) 부목사의 직을 맡고 있었다. 8월 중순 경 강화도에서 해산을 당한 진위대 병사들이 궐기하여 군수 정경수와 일본순사를 사살하고 갑곶포에서 일병과 접전하여 일병 십여 명을 사살하였으나 중과부족으로 강화읍내로 패주, 민가로 숨어들었다. 강화읍내로 진임한 일병은 진위대와 함께 궐기한 민중을 총검으로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난민병 수십 명이 미 감리교회당내에 은복하였다고 하여 일 순사가 회당 사방을 포위하고 방화하겠다고 하였다. 그 시에 강화교회 목사 손승용(孫承鏞)이 허진일(許進一)을 급히 경성에 보내 급보하니 조원시(존스) 선교사가 나에게 달려와 강화에 내려가 불행을 막아달라고 청하였다. 부친께서는 위험천만이라고 하시면서 만류했으나 나는 곧 응락 하고 신임 일인 경무사 http://theme.archives.go.kr/next/government/viewGovernmentArchives.do?id=0001563928 丸山重俊(환산중준)과 함께 인천에서 소형 배를 타고 당일 저녁 갑곶에 도착했다. 그 시에도 강화 산곡 이곳저곳에서는 조선 병사가 저항하는 총탄이 난사되고 있었다. 丸山(환산)이 총격이 두려워 강화읍내 진입을 거부하여 그날 밤을 배 안에서 숙박했다. 당시 나는 丸山에게 “용감과 충의는 조선병사이나 일병사의 전투에는 따를 수 없다. 즉 일병은 조선병보다 전투능력이 우월하다”고 다둑인 후 “격전하던 병사가 도주타가 교회당에 들어간 것은 사실이나 그 안에 있는 신도들은 한 사람도 격전에 참가한 일이 없으니 회당을 접수한 순사들을 철수시켜 더 큰 불상사가 없도록 하자”고 설득했다. 이튿날 일 순사 수 십 인이 丸山과 나를 안내해 읍내로 들어갔다. 즉시 강화 미 감리회당에 들어가니 손승용과 다수의 신도가 급화를 막아 달라고 간청했다. 丸山이 일 순사에게 전날 밤 내가 전한대로 그들을 설득, 지휘하여 회당 내에 진주한 일병들을 철거했다. 당일 나는 丸山과 귀경했고 수일 후에 전해진 소식에 의하면 강화교회 권사 김동수(金東遂) 형제가 가로에서 일진회 4대 강령을 공격하여 연설한 혐의로 일 순사들에게 잡혀 총살을 당하였다고 하더라.

합일초등학교

강화중앙교회는 교육선교를 위해 1901년 4월 1일에 존스 목사와 박능일 전도사가 신교육 기관인 교회부설로 “잠두의숙(蠶頭義塾)”을 설립하였으며, 1902년에 또 여학교인 “합일여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민중교육을 시작하였다. 이후 두 학교는 하나의 학교로 통합되었는데, 오늘의 합일초등학교로 발전되었다. 이 학교는 일제치하에 저항하는 민족운동과 한국 개화의 산실이 되어 왔다. 이 학교의 이름은 강화양명학과 강화감리교를 동시에 떠오르게 한다. 양명학에서의 '지행합일'이 학교 이름으로 발전했다는 주장과 개신교의 '하나님'에서 합일이라는 이름이 기원한다는 주장이 모두 공존한다.

인물관계


디아스포라

http://digerati.aks.ac.kr/dhlab/2019/101/%EC%B5%9C%EC%9B%90%EC%9E%AC/%EA%B0%95%ED%99%94%EB%8F%84%EC%A4%91%EC%95%99%EA%B5%90%ED%9A%8C.html

역사

  • 1900년 9월 1일 주선일, 그의 부인 박씨, 이살로메가 주도하여 주선일씨댁(천교하 기도처; 신문리 144번지, 초가 6칸 반)에서 첫 예배를 드리며 잠두교회 설립.
  • 누에머리를 닮은 잠두 언덕배기에 위치해 설립 초기에는 잠두교회라고도 불렀다. [1]
  • 1901년 제물포지방 감리사인 조원시(존스)목사의 도움으로 현재의 신문리 위치에 기와집 25칸과 초가집 16칸을 사서 잠두교회 예배당을 봉헌
  • 1901년 교회부설로 교육기관인 잠두의숙(蠶頭義塾)을 설립. 첫 숙장(塾長)으로 과거 서당의 훈장을 했던 박능일 전도사를 임명
  • 1904년 월곶교회 개척을 시작으로 26개의 교회를 개척, 설립
  • 1907년 8월 진위대 병정해산과 관련된 소동을 잠두교회 교인이 선동했다는 일진회의 모함으로 김동수, 김남수권사, 김영구 3형제가 일제에 의해 순교
  • 1908년 12월 2일 교회부설 '사립제일합일학교' 설립
  • 1909년 4월 9일 교회부설 '제일합일여학교' 설립
  • 1914년 7월 강화최초 서양식 벽돌교회를 신축 봉헌, 교회명칭을 '강화읍 교회'로 변경 한국개신교회 최초의 교회역사책 '강화읍 잠두교회역사'를 기록
  • 1934년 4월 구(舊) 목사관을 준공
  • 1951년 10월 15일 복민의숙(강화실업고등기술학교) 개교
  • 1958년 4년 9일 교회가 분열되어 '성광교회'설립
  • 1964년 3월 3일 교회부설 '잠두유치원'개원
  • 1964년 교회후면 16평을 증축
  • 1976년 5월 '강화읍교회'에서 '강화중앙교회'로 변경
  • 1981년 12월 교회 전면 324평을 개축
  • 1984년 10월 제1교육관 1층(91평)을 준공
  • 1987년 6월 목사관 62평을 준공
  • 1991년 5월 27일 제1교육관 2.3층(232평)을 준공
  • 1994년 4월 17일 제28대 담임자 이민구목사 부임
  • 1998년 7월 6일 잠두유치원(3층) 150평 신축
  • 2000년 12월 31일 선교100주년 기념대성전 입당예배
  • 2001년 9월 2일 선교100주년 기념대성전 봉헌예배
  • 2002년 12월 15일 강화중앙교회 100년사 출판기념 예배

사회영향

  • 교육선교(1): 1901년 4월에 신교육 기관인 교회부설로 '잠두의숙(蠶頭義塾)'을 설립
  • 교육선교(2): 1902년 '합일여학교' 설립,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민중교육을 시작. 이후 두 학교 하나의 학교로 통합. 오늘의 합일초등학교. 일제치하 민족운동과 한국 개화의 산실.
  • 민족교육운동: 보창학교(이동휘 권사), 유경근 속장(독립운동가)의 교회지도자와 강화중앙교회가 함께 추진. 이후 민중계몽과 독립사상으로 이어졌다.
  • 교육선교(3): 기독교 농민교육기관인 복민의숙(福民儀宿, 후에 복음학원 강화실업고등기술학교로 발전됨) 설립 운영
  • 교육선교(4): 덕신고등학교(강화읍)를 감리교 소속학교로 지정하고 기독교신앙 담당교사를 파송하는 한편 학교운영비로 매년 4,000만원씩 지원
  • 의료선교: 기독병원 설립
  • 해외선교: 영국에 지교회 킹스턴중앙교회. 필리핀, 몽골, 중국 등의 한인교회와 해외선교사를 돕고 있다.
  • 지역선교: 결식자 점심급식사업, 경로위안잔치, 환경미화원 위로연, 연간 2,000만원 상당의 장학금 지급, 침술선교봉사활동, 웨슬리 사회봉사단 활동, 불우이웃돕기 행사

위치

관련 사이트

참고문헌

『강화중앙교회100년사』이은용

출처

  1. 출처: [온누리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