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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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 Choi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4월 22일 (월) 08:3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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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와 종교

강화도는 예로부터 유난히 종교의식이 강한 곳이다. 단군신앙부터 불교, 유교, 천주교, 성공회, 개신교까지 수많은 종교들의 뿌리가 깊다. 현존하는 고인돌, 천 년된 정수사, 천주교 순교지 갑곶순교성지, 백년 된 교산교회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주요이동수단이 배였던 시절 강화도를 통해 많은 문물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지정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던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외세의 침략을 가장 먼저 당한 아픔의 땅이기도 하다. 당시 강화도는 수도(한양)와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인천 제물포항으로 들어온 선교사가 지정학적 특성을 살리기 위하여 강화지역 전도에 열을 올렸다. 그렇게 강화지역에 전해진 복음이 전국으로 뻗어나갔다. 신미박해, 신유박해, 병인박해 등 수많은 장애가 있었지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현재 강화도에는 교회가 179개나 있고, 인구의 25%이상이 기독교인이다.

강화중앙교회

인물

  • 김상임, 김경일, 주선일, 허진일, 최족일, 김봉일. 이살로메. 존스(조원시, 초대 담임), 박능일
  • 이동휘(강화진위대장 출신 민족주의자,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김우제 목사
  • 김동수, 김남수, 김영구
  • 홍승하(제4대 담임), 권신일, 김경일, 복근채, 하춘택, 박세창, 김기범, 데밍(C. S. Deming), 케이블(E. M. Cable), 손승용(제5대 담임), 이용주

인물관계


역사

  • 1900년 9월 1일 주선일, 그의 부인 박씨, 이살로메가 주도하여 주선일씨댁(천교하 기도처; 신문리 144번지, 초가 6칸 반)에서 첫 예배를 드리며 잠두교회 설립.
  • 누에머리를 닮은 잠두 언덕배기에 위치해 설립 초기에는 잠두교회라고도 불렀다. [1]
  • 1901년 제물포지방 감리사인 조원시(존스)목사의 도움으로 현재의 신문리 위치에 기와집 25칸과 초가집 16칸을 사서 잠두교회 예배당을 봉헌
  • 1901년 교회부설로 교육기관인 잠두의숙(蠶頭義塾)을 설립. 첫 숙장(塾長)으로 과거 서당의 훈장을 했던 박능일 전도사를 임명
  • 1904년 월곶교회 개척을 시작으로 26개의 교회를 개척, 설립
  • 1907년 8월 진위대 병정해산과 관련된 소동을 잠두교회 교인이 선동했다는 일진회의 모함으로 김동수, 김남수권사, 김영구 3형제가 일제에 의해 순교
  • 1908년 12월 2일 교회부설 '사립제일합일학교' 설립
  • 1909년 4월 9일 교회부설 '제일합일여학교' 설립
  • 1914년 7월 강화최초 서양식 벽돌교회를 신축 봉헌, 교회명칭을 '강화읍 교회'로 변경 한국개신교회 최초의 교회역사책 '강화읍 잠두교회역사'를 기록
  • 1934년 4월 구(舊) 목사관을 준공
  • 1951년 10월 15일 복민의숙(강화실업고등기술학교) 개교
  • 1958년 4년 9일 교회가 분열되어 '성광교회'설립
  • 1964년 3월 3일 교회부설 '잠두유치원'개원
  • 1964년 교회후면 16평을 증축
  • 1976년 5월 '강화읍교회'에서 '강화중앙교회'로 변경
  • 1981년 12월 교회 전면 324평을 개축
  • 1984년 10월 제1교육관 1층(91평)을 준공
  • 1987년 6월 목사관 62평을 준공
  • 1991년 5월 27일 제1교육관 2.3층(232평)을 준공
  • 1994년 4월 17일 제28대 담임자 이민구목사 부임
  • 1998년 7월 6일 잠두유치원(3층) 150평 신축
  • 2000년 12월 31일 선교100주년 기념대성전 입당예배
  • 2001년 9월 2일 선교100주년 기념대성전 봉헌예배
  • 2002년 12월 15일 강화중앙교회 100년사 출판기념 예배

사회영향

  • 교육선교(1): 1901년 4월에 신교육 기관인 교회부설로 '잠두의숙(蠶頭義塾)'을 설립
  • 교육선교(2): 1902년 '합일여학교' 설립,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민중교육을 시작. 이후 두 학교 하나의 학교로 통합. 오늘의 합일초등학교. 일제치하 민족운동과 한국 개화의 산실.\
  • 민족교육운동: 보창학교(이동휘 권사), 유경근 속장(독립운동가)의 교회지도자와 강화중앙교회가 함께 추진. 이후 민중계몽과 독립사상으로 이어졌다.
  • 교육선교(3): 기독교 농민교육기관인 복민의숙(福民儀宿, 후에 복음학원 강화실업고등기술학교로 발전됨) 설립 운영
  • 교육선교(4): 덕신고등학교(강화읍)를 감리교 소속학교로 지정하고 기독교신앙 담당교사를 파송하는 한편 학교운영비로 매년 4,000만원씩 지원
  • 의료선교: 기독병원 설립
  • 해외선교: 영국에 지교회 킹스턴중앙교회. 필리핀, 몽골, 중국 등의 한인교회와 해외선교사를 돕고 있다.
  • 지역선교: 결식자 점심급식사업, 경로위안잔치, 환경미화원 위로연, 연간 2,000만원 상당의 장학금 지급, 침술선교봉사활동, 웨슬리 사회봉사단 활동, 불우이웃돕기 행사


위치


감리교

강화도 지역의 기독교는 감리교에 의해 시작되었다. 179개 교회 중에 120개가 감리교회다. 강화지역 기독교인 중에 감리교 소속이 77.6%나 된다.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언더우드와 함께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한국 감리교회 선교를 개척한 미감리회 소속 선교사였다. 1893년 존스 선교사가 인천 책임자로 와서 독립계삭회가 구성되면서 선교확장의 열망이 강화지역으로 이어졌다. 당시 강화지역에 대한 감리교의 선교는 제물포교회(현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시작됐다. 존스 목사와 인천의 노병일, 김기범, 이명숙, 백헬렌 등 한국인 전도자들이 강화선교에 열성을 쏟았다. 강화도는 우리나라 수도로 가는 관문이며, 북쪽으로는 황해도 해주 방면, 남으로는 덕적도를 경유해 충청도 당진까지 이어지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강화의 복음화는 황해도 전도를 위한 전진기지 확보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했다.

당시 한국 선교를 관리하고 있던 스크랜턴은 1892년 12월 21일에 본국으로 보낸 편지에서 존스가 이미 1892년 말에 강화전도여행을 시도한 것과 더불어 강화지역 선교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제물포와) 이웃해 있는 섬인 강화에는 7만 명 주민이 있는데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충동하고 있습니다. 강화를 얻게만 된다면 우리에겐 값진 보화가 될 것입니다. 사실 발판은 이미 얻어 놓았습니다.”

강화의 최초의 교회는 1893년 세워진 교항교회(현 강화교산교회)다. 양사면 시루미 마을 출신으로 제물포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이승환이 존스 목사를 만나면서 복음이 들어오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존스는 이승환의 모친에게 선상에서 세례를 주고 인천에서 활동하던 전도인 이명숙과 전도부인 백헬렌을 시루미로 파송해 이승환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강화지역의 첫 신앙공동체가 탄생했다. 4~5명으로 시작한 예배는 불과 1년 만에 80명으로 부흥했다. 천민출신이 많은 시루미 마을에서 좀 떨어진 다리목에 살던 양반 김상임이 존스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으면서 마을 전체가 개종했다. 김상임이 1894년 자기 집 앞마당에 예배당을 마련하자 시루미 마을교인들이 옮겨왔고 다리목(교항, 橋項)과 시루미(증산, 甑山)의 한자를 따서 교산교회라 이름 지었다.

홍의교회는 교산교회 설립 3년 후인 1896년에 설립되었다. 이 마을 서당훈장이던 박능일이 교산교회의 김상임을 만나고 돌아와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되었다. 서당학생 20여 명, 종순일, 권신일과 함께 자기 집에서 홍의교회를 설립했다. 강화의 두 번째 교회가 탄생했다. 1900년에는 홍의교회에 출석하던 주선일, 박성일, 허진일, 김봉일 등 몇몇 교인이 강화읍 천교하(현 강화읍 신문리)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오늘날 강화중앙교회의 모체(잠두교회)가 되었다. 강화지역 복음 전파 8년 만인 1900년에 수도 강화읍에 드디어 교회가 세워졌다. 1892년 존스 목사가 입성하려다 실패했던 강화읍에 토착교인에 의하여 십자가가 세워졌고, 강화도 전 지역 복음화의 터전을 굳건히 다졌다. 강화복음화의 중심역할을 했으며 한국교회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관련 사이트

참고문헌

『강화중앙교회100년사』이은용

출처

  1. 출처: [온누리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