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의 직물산업

DH 교육용 위키
이수민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5월 15일 (수) 00:09 판

이동: 둘러보기, 검색

강화 직물산업

직물산업

직물공업은 실을 원료로 하여 직물을 제조하는 산업으로 우리나라의 직물공업은 1960년 중반부터 방직공업과 더불어 급속히 발전하였다. 강화도는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직물생산지였다. 한때 30여 개의 직물공장이 몰려있었고, 그 규모는 당시 섬유산업의 메카였던 대구와 어깨를 견줄 정도였다. 수천 명의 공장 노동자가 거주하며 강화 지역경제를 책임지고 있었으나, 대구를 중심으로 현대식 섬유공장이 들어서고 나일론 등 인조직물이 등장하면서 강화 직물 산업은 사양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현재는 소창 공장 10여 곳만이 대부분 가내 수공업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1]


일제강점기

해방전 강화도의 직물공업은 주로 가내수공업으로 거의 모든 가국에서 수족기를 갖추고 주로 면직물을 생산하여 일주일에 한번씩 서는 장날에 판매하였다. 일제시대 말 근대적 직물공장이 세워지면서 인견직 생산이 주를 이루었다. 당시 주요 공장으로 오늘날 조양방직으로 잘 알려진 조양견직주식회사가 있었으며, 십자당직물, 강화산업조합 등이 있었다. 이들 공장은 100명 이하의 종업원과 80여대의 직조기를 갖추었고, 대부분이 일본에서 수입해 온 것들이었다. 많은 생산량을 기대하기느 어려웠으나 기존의 직물공장에 심도직물등이 합세하여 생산량이 늘어나기는 하였으나 당시의 제품수요에 비해 생산량 부족하였다.

[2]

해방이후

부흥기: 50~60년대

주요 공장: 남화직물, 심도직물, 상호직물, 평화직물, 동광직물, 무림직물, 삼화직물, 상호직물

50년대 강화도 직물공업은 6.25전쟁을 기점으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다가 60년대 이루어 절정을 이루었다. 전후 필품에 대한 수요 급증으로 직물공장들이 호황을 누린 까닭이었다. 전국적으로 강화의 인조견에 대한 명성이 높아지고 수요량이 공급량을 항상 초과하는 부흥기를 이끌었다. 직물 공업의 활성화에 힘입어 50년대 들어서 직물 공장수가 급격히 늘어가 특히 인격직을생산하는 공장수가 급격히 늘어나 30여개에 달하였다. 때분에 40년대부터 있었던 기존의 직물공장들은 수요의 대처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만 당시 교통조건이 열악해 강화도와 육지를 잇는 수단은 하루에 한번 오가는 나룻배뿐이었다. 동란 이후 급성장을 보이기 시작한 근대적 직기를 갖춘 군소 공장들의 수가 50년에 비해 배에 달했다. 60년대 중반에는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업체간 과잉경쟁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 후 수출정책에 따라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북일대 등 타지방으로 직물공업의 주도권이 넘어게 되었다. 강화도에서는 면직(천연섬유), 인견직(인조 섬유)을 생산하는 반면 대구 등 타지방에서는 합성 섬유의 대량 생산 체제에 돌입한 것도 타격의 원인이었다. 60년대 강화에서 생산된 면직, 인견직은 주로 옷감, 이불감등으로 사용되었다. 멋쟁이들의 필수품이었던 웽블리 넥타이가 쏟아져 나오고, 무명천이 '강화소창'이란 이름을 달고 퍼져나갔다. [3]

정체기: 70년대

주요공장: 동광직물, 경도직물, 풍농직물 이 시기 강화대교가 개통되면서 생산품 수송이 용이해지게 되었으나 강화의 직물공업은 73년 석유파동을 겪으며 사양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특히 임금상승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60년대부터 있었던 기존의 공장들이 좁은 내수 시장에서 과다 경쟁을 벌인데다가 석유 파동 후 그 어려움이 가중되어 73년과 74년에 걸쳐 많은 공장들이 폐업을 하게된다. 폐업을 하지 않은은 공장들은 나름대로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60년대 인견직 생산에만 의존하던 생산체제를 폴리에스테르 등 화학 섬유 생산체제로 바꾸기 시작했다. 이때 생산되었던 제품들을 살펴보면 커텐지, 카바지, 양장지 등이다.

쇠퇴기: 80년대 이후

50,60년대 '강화 인견'하면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던 강화도의 직물 공업이 현재는 쇠퇴 일로를 걷고 있다. 앞에서 역사적으로 살펴본 결과 석유 파동 후 임금 상승 압박과 국내 시장내 업체간 과잉 경쟁, 또한 화학 섬유처럼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추지 못했던 점이 그 원인으로 파악되고 있다. 70년대 초 많은 공장들이 폐업을 하게 되고 또 설비가 기계화됨에 따라 종업원수가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강화도 전체 인구수의 변화를 보더라도 직물 공업의 성장 쇠퇴와 그 궤를 같이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직물 공업이 번창하던 시기에는 인구도 증가 일로에 있었으며 70년대를 거쳐 80년대 들어서는 직물 공업의 쇠퇴와 더불어 인구도감소 일로에 있음을 볼 수 있다. 지금은 서너 개 공장이 가내수공업을 하며 가까스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73년의 석유 파동 후 화학 섬유 생산 체제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과거 수십여개에 달하던 직물 공장들이 미도직물, 동진직물, 남화직물, (주)두울 등 4개의 법인 기업체와 소규모의 개인 기업이 있을 따름이다. 현재 이들 업체들은 국내 대기업의 하청을 받거나 수출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4] [5]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존재하지만, <references/> 태그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