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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1916년 이미 강화도에는 강화직물조합이 설치되고 공동작업장까지 건설됐다. 강화도에는 심도직물 외에도 큰 섬유회사가 많았는데, 197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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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이미 강화도에는 강화직물조합이 설치되고 공동작업장까지 건설됐다.  
 
1916년 이미 강화도에는 강화직물조합이 설치되고 공동작업장까지 건설됐다.  
강화도에는 심도직물 외에도 큰 섬유회사가 많았는데, 1975년 기준으로 회사는 15곳이었고, 전체 종업원수는 1천308명, 기계는 864대에 달했다고 '강화사'는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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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는 심도직물 외에도 큰 섬유회사가 많았는데, 1975년 기준으로 회사는 15곳이었고, 전체 종업원수는 1천308명, 기계는 864대에 달했다고 '강화사'는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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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 강화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ㅣ독교의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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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 부분의 서양문물이 기독교를 통하여 전래되었던 것ㅇ. 특히 강화에는 1890년대 초부터 성공회와 감리교를 통한 선교가 이루어졌으며 신도들에 의한 자립교회로 발전하여 오늘날까지 그 전통이 계속되고 있다. 영국 성공회의 강화 선교는 1893년에 시작되었다. 1890년 9월에 내한한 코프(C.J.Corfe) 주교는 제물 포에서 병원사업을 시작하여 서울 정동 등에서 교회와 병원사업을 준비하였다. 1893년 7워 성공외 워너(L.O. Warner) 신부는 갑곶진에 집을 마련하고 왕래하는 강화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선교를 했으나 외국인에 대한 조선인들의 경계때문에 ㅡㄴ 성공을 얻을 수 없었다. 워너는 고아들을 모아 영국식 기숙사제도를 도입하여 양육하면서 교리를 가르쳐 1896년 에 5명의 고아들에게 세례를 하였ㄴㄴ데 그의 헌신적인 양육화동에 감명받은 주민드도 성고오히에 관심을 갖기 시작. 김희준(金熙俊)은 1897년 11월 제물포에 세례를 받고 이후 성공회 선교활동에 참여하다가 1915년 12월 한국인 최초 성공회 사제로 서품을 받기도 하였다. 워너가 건강문제로 귀국하자 트롤로프(M.N.Trollope) 신부 등ㅇ이 그 뒤를 이어 강화 선교는 강화되었고, 1897년에는 성안으로 진출 할 숭 ㅣ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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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해방학당의 교사는 '성바우로회당'으로 축성되어 성공회 강화 선교의 전진 기지가 되었다. 이곳에서 선교와 교육, 진료가 이루어졌으며, 1899년에는 18명의 교인이 세례를 받았다. 아울러 트롤로프는 관청리의 언덕에 위치한 토지를 매입하여 성당을 건축하였다. 1900년 11월 '성바우로봐 성베드로 회당'으ㅗ 봉헌된 강화읍성당은 한국 토착화에 대한 성공회의 관심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이 성당은 배 모양으로 닦인 터 위에 건물 외형은 전통 한옥으로 꾸몄고, 내부는 전통 한옥 자재를 쓰되 배치는 중세 서양 성당 건축 양식인 바실리카 로마네스크 혼합 양식을 사용하였다. 1911년 제 3대 주교로 부임한 트롤로프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의 필요서을 절감하고, 1914년 1월 강화에 '성미가엘수도원'을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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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학원은 1921년 인천으로 이전할 때까지 성공회의 유일한 신학교육기관으로 초기 성직자와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1916년 트롤로프 주교는 전국 성공회 조직을 정비하면서 전국을 6개 전도구로 나누었는데 강화전도구에만 14개 교회가 소속되어 전ㄱ구 65개 교회 가운데 20%가 강화에 집중되어 던 것이ㅏ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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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는 1887년부터 인천에 선교를 시작하였는데 선교사와 한국인 교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1892년 존스(G.H.Jones) 목사가 인천에 정착하여 조력자들의 협조로 점차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고 인천은 감리교 서부선교기지로 자리 잡았다. 1893년 성공회와 마찬가지로 감리교의 강화 선교가 시작되었다. 인천 내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이승환이 존스 목사를 고향인 강화 서사면 시루미에 초비앟여 그 모친과 지역 양반 유지인 김상임에게 전도한 결과 교산교회가 태동활 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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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에는 각 면마다 교회가 설립되었고 전체 강화주민의 약 10%가 감리교 신자가 되는 급속한 성장을 보였다. 더욱이 강화의 기독교인들은 선교 초기부터 신앙교육과 계몽교육을 이한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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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를 전후로 서구 문물의 수용이 지역적으로 부분적이지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일제의 국권침탈과 관련하여 일본인들의 국내 이주가 증가하면서 생활에 관련된 문물의 수용이 증가되고 있었기 대문이다. 의료 도로 운송 우편 통신 전기 등의 근대 문물의 수용이 그것이다. 그러나 1900년대 이후 강화는 서해안의 중ㅇ요 군사 요충지로서의 그 중요성이 점차 떨어지게 되었고, 섬이라는 환경적 요인으로 인하여 그 위상을 회복시키지 못하였다. 따라서 근대화라는 측면에서는 오히ㅕ 타지역보다 서구 문물의 정착에는 뒤떨어져 잇었다..

2019년 6월 17일 (월) 20:02 판

1916년 이미 강화도에는 강화직물조합이 설치되고 공동작업장까지 건설됐다. 강화도에는 심도직물 외에도 큰 섬유회사가 많았는데, 1975년 기준으로 회사는 15곳이었고, 전체 종업원수는 1천308명, 기계는 864대에 달했다고 '강화사'는 기록하고 있다


개항 이후 강화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ㅣ독교의 수용. 상당 부분의 서양문물이 기독교를 통하여 전래되었던 것ㅇ. 특히 강화에는 1890년대 초부터 성공회와 감리교를 통한 선교가 이루어졌으며 신도들에 의한 자립교회로 발전하여 오늘날까지 그 전통이 계속되고 있다. 영국 성공회의 강화 선교는 1893년에 시작되었다. 1890년 9월에 내한한 코프(C.J.Corfe) 주교는 제물 포에서 병원사업을 시작하여 서울 정동 등에서 교회와 병원사업을 준비하였다. 1893년 7워 성공외 워너(L.O. Warner) 신부는 갑곶진에 집을 마련하고 왕래하는 강화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선교를 했으나 외국인에 대한 조선인들의 경계때문에 ㅡㄴ 성공을 얻을 수 없었다. 워너는 고아들을 모아 영국식 기숙사제도를 도입하여 양육하면서 교리를 가르쳐 1896년 에 5명의 고아들에게 세례를 하였ㄴㄴ데 그의 헌신적인 양육화동에 감명받은 주민드도 성고오히에 관심을 갖기 시작. 김희준(金熙俊)은 1897년 11월 제물포에 세례를 받고 이후 성공회 선교활동에 참여하다가 1915년 12월 한국인 최초 성공회 사제로 서품을 받기도 하였다. 워너가 건강문제로 귀국하자 트롤로프(M.N.Trollope) 신부 등ㅇ이 그 뒤를 이어 강화 선교는 강화되었고, 1897년에는 성안으로 진출 할 숭 ㅣㅆ었다.

수사해방학당의 교사는 '성바우로회당'으로 축성되어 성공회 강화 선교의 전진 기지가 되었다. 이곳에서 선교와 교육, 진료가 이루어졌으며, 1899년에는 18명의 교인이 세례를 받았다. 아울러 트롤로프는 관청리의 언덕에 위치한 토지를 매입하여 성당을 건축하였다. 1900년 11월 '성바우로봐 성베드로 회당'으ㅗ 봉헌된 강화읍성당은 한국 토착화에 대한 성공회의 관심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이 성당은 배 모양으로 닦인 터 위에 건물 외형은 전통 한옥으로 꾸몄고, 내부는 전통 한옥 자재를 쓰되 배치는 중세 서양 성당 건축 양식인 바실리카 로마네스크 혼합 양식을 사용하였다. 1911년 제 3대 주교로 부임한 트롤로프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의 필요서을 절감하고, 1914년 1월 강화에 '성미가엘수도원'을 설립하였다.
이 신학원은 1921년 인천으로 이전할 때까지 성공회의 유일한 신학교육기관으로 초기 성직자와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1916년 트롤로프 주교는 전국 성공회 조직을 정비하면서 전국을 6개 전도구로 나누었는데 강화전도구에만 14개 교회가 소속되어 전ㄱ구 65개 교회 가운데 20%가 강화에 집중되어 던 것이ㅏㄷ.

감리교는 1887년부터 인천에 선교를 시작하였는데 선교사와 한국인 교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1892년 존스(G.H.Jones) 목사가 인천에 정착하여 조력자들의 협조로 점차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고 인천은 감리교 서부선교기지로 자리 잡았다. 1893년 성공회와 마찬가지로 감리교의 강화 선교가 시작되었다. 인천 내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이승환이 존스 목사를 고향인 강화 서사면 시루미에 초비앟여 그 모친과 지역 양반 유지인 김상임에게 전도한 결과 교산교회가 태동활 수있었다. 1900년대에는 각 면마다 교회가 설립되었고 전체 강화주민의 약 10%가 감리교 신자가 되는 급속한 성장을 보였다. 더욱이 강화의 기독교인들은 선교 초기부터 신앙교육과 계몽교육을 이한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1900년대를 전후로 서구 문물의 수용이 지역적으로 부분적이지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일제의 국권침탈과 관련하여 일본인들의 국내 이주가 증가하면서 생활에 관련된 문물의 수용이 증가되고 있었기 대문이다. 의료 도로 운송 우편 통신 전기 등의 근대 문물의 수용이 그것이다. 그러나 1900년대 이후 강화는 서해안의 중ㅇ요 군사 요충지로서의 그 중요성이 점차 떨어지게 되었고, 섬이라는 환경적 요인으로 인하여 그 위상을 회복시키지 못하였다. 따라서 근대화라는 측면에서는 오히ㅕ 타지역보다 서구 문물의 정착에는 뒤떨어져 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