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대지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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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농민들은 대부분 가난한 소작농들이었다. 평균 1ha 미만의 영세한 토지는 가족노동으로 경작하고 있으며 전 인구의 8%를 차지하는 농민들은 동물적 생존조차 위협을 받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지주에게 50%가 넘는 고율의 소작료를 지불해야 했고 이ㅗ이에 종자대 비료대 농기구대 등의 농업경영비와 구채 쉬조합비 고오가금 등의 각종 세금을 내야 하고 이외에 생필품을 구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제하 농촌사회는 농민경제의 만성적인 빈궁화였으며 농가경게즤 파탄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이렇게 되자 소작농들은 자신의 권익을 옹호하 소작인 단체를 조직하여 소작쟁의로 대응하였으며 지주들은 일제의 권력과 결탁하여 소작운동을 탄압하였다.
 
일제하 농민들은 대부분 가난한 소작농들이었다. 평균 1ha 미만의 영세한 토지는 가족노동으로 경작하고 있으며 전 인구의 8%를 차지하는 농민들은 동물적 생존조차 위협을 받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지주에게 50%가 넘는 고율의 소작료를 지불해야 했고 이ㅗ이에 종자대 비료대 농기구대 등의 농업경영비와 구채 쉬조합비 고오가금 등의 각종 세금을 내야 하고 이외에 생필품을 구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제하 농촌사회는 농민경제의 만성적인 빈궁화였으며 농가경게즤 파탄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이렇게 되자 소작농들은 자신의 권익을 옹호하 소작인 단체를 조직하여 소작쟁의로 대응하였으며 지주들은 일제의 권력과 결탁하여 소작운동을 탄압하였다.
 
일제하 강화지역에는 대규모 소작쟁의가 거의 발생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다. 1920년대 전반기 전국ㅈ적으로 소작쟁의가 격렬하게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강화에서는 1925년 중반까지 소작인의 권익을 옹호할 만한 어떠한 단체도 없었다.
 
일제하 강화지역에는 대규모 소작쟁의가 거의 발생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다. 1920년대 전반기 전국ㅈ적으로 소작쟁의가 격렬하게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강화에서는 1925년 중반까지 소작인의 권익을 옹호할 만한 어떠한 단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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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지역의 지주는 시세의 변화에 민감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개항 후 구래의 지주는 시세에 따르지 못하여 몰락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소규모 농산물을 매입하여 미곡무역을 통해 새로운 지주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반면에 소규모 농산물을 매입하여 미곡무역을 통해 새로운 지주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미곡상인으로서 농촌에서 많은 미곡을 수매하여 이를 무역상에 전매함으로써 부르 축적하고 이를 다시 토지에 투자함으로써 대지주가 되었다. 강화는 개항장인 인천과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미곡무역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어 있었다. 개항장에는 일반적으로 한국의 미곡과 일본의 면제품을 교환하는 무역체제인 미면교환체제가 형성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수출된 쌀은 주로 면제품 및 잡화품의 주요생산지인 오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공업지대의 하층노동자, 도시잡업층의 주식용으로 수요되었다. 특히 이제는 대량의 미곡반출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1896년 인천미두취인소를 설립하여 외지에서의 투기적 유통을 확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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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세에 조응하여 강화지역에도 쌀의 대일수출을 전제로 지주경영이 활발히 전개되고, 미곡무역을 적절히 이용하여 새로이 지주층으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사례연구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강화 김씨가도 개항 이후부터 경영규모가 성장하고 있었다. 1910년대에 들어가면서 강화지주들은 토지면적을 확장할 뿐만 아니라 단위면적당 생산을 증대하기 위해 농업개량에도 힘썼다. 강화 홍씨가처럼 대개 벼농사를 중심으로 품종개량과 수리시설의 개선 등을 통해 소출을 증대시키고자 하였다. 1920년대 779두락이나 증하여 8807두락이되었고, 반면에 밭은 1910년대 1125두ㅏㄱ에서 71두ㅏㄱ이 감소한 1054두락이 되었다. 이것은 밭을 파아 논으로 대체한 것으로 홍씨가의 지주경영이 전적으로 쌀수출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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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1930년대의 저미가정책과 농업공황은 미곡수출을 전제로 하는 한국인 지주경영의 성장에 장애가 되었다. 농업공황으로 쌀값이 급격히 하락하면서 농촌은 일대 위기를 맞이하였다. 이에 따라 각종 공과금과 농가부채를 갚지 못하는 농민들이 입도가차압 지불명령 가산차압 등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농업공황에 따른 쌀값 하락은 농민들의 생화을 암담하게 하였으며 한국농촌은 급격히 몰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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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공황에 직면한 농가경제의 파탄은 극점에 이르렀고, 그 중에서 끼니조차 잇지 못하는 농민들이 속출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일제는 농촌구제이 방안으로 산미증식계획과 병행하여 이른바 '세농구제'라는 미명하에 전작장려계획을 실시하였다. 즉 일제는 밭농사의 장려를 통해 식량문제와 농가의 현금수입을 증대시킨다는 명목으로 1931년부터 이른바 '전작개량증식계획'을 추진하였다. 이 계획은 1931년부터 12년을 기하여 밭의 면적 85%을 차지하고 있는 밭작물인 맥류, 두류, 속 등에 대해 그 증산을 꾀하여 주로 식량으로 공급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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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말 공황의 여파가 조금씩 사라지면서 한국농업이 부닥친 문젠ㄴ 일본내의 '조선쌀 반대운동'이었다. 그동안 일제는 식민지 한국에서 일본내 미곡시장을 겨냥하여 '산미제일주의'를 채택하여왔다. 그런데 공황기에도 '조선쌀'이 계속해서 들어오자 일본내에서 '조선쌀 이입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렇게 되자 총독부에서도 기존의 농업정책을 변경하여 지금까지의 조선미 대량생산주의를 재고해야만 했다. 또한 일제는 한국 쌀의 질을 향상시켜 일본시장에서 고가로 거래될 수 있게 한다는 명목 하에 조선미 이출을 가능한 저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조선곡물검사령''조선곡물검사령시행규칙'을 발포하면서 1932년 10월 1일부터 곡물의 국영검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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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강화 지역 대부분의 지주들은 구래의 봉건적인 생산관계를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였으나 일본자본주의 기구에 흡수되고 그 경영이 자ㅗㄴ가적 경영으로 점차 전환하고 있었다. 강화 홍씨가처럼 1936년 3워 강화읍 부내면 신문리에 연건 평 700여 평의 3층 건물을 세우고 기계 50여 대와 자본금 12만 5000원으로 조양방직을 세우고 주로 인조견을 생산하였다. 이것은 토지자본의 일부와 고리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한 것이다. 그러나 1942년 일본 삼정 산하에서일하던 이세현(李世賢에게 조양방직을 20만원에 인도함으로써 자본전환에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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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한국인 지주들의 농업경영은 농업공황과 자본전환의 실패로 인해 몰락한 대지주도 있었고 새로 대지주로 성장한 사람들도 있었다. 해방 이후 농지개혁 때 피분배 지주 명단 중 강화지역의 20ha 이상 소유한 지주 22명의 명단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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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표에서 보이는 지주는 대부분 일제하의 대지주들이었으나, 새로 부상한 지주도 있었다. 그 가운데 일부는 자본전환에 실패했지만, 강화 홍씨가의 홍재묵 홍재룡 형제와 홍재승 홍종문 등은 해방 이후에도 대지주였고 김우중 등도 여전히 대지주로 남아있었다. 따라서 일제하 강화지역의 지주들은 1930년대 이후 약간의 변동이 있었지만 지주경영에 별다른 지장을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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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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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의 경우 자작겸 소작농과 순수 소작농의 비유이 전체농가의 81%에 달하였다. 1921년 강황에서 50ha 이상의 대지주는 11호였으며 5반보 미만의 자작농은 약 7000호였다. 즉 극단적 양극화 현상이 전국 농촌의 일반적 현상이었으며 강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른바 농촌진흥운동이 실시되었던 1930년대에도 지속되었다. 특히 <소작조정령>과 <농지령>이 실시된 이후 양극적 쟁의 송사가 빈번하였으며 1933년 상반기 4개월간 소작쟁의 법원심의사건이 76건에 달하였다. 이처럼 당시 군 인구의 대부분이 참담한 소작생활을 하였으며 소작농의 확대재생산은 농촌사회의 경제여건 특히 세민의 생활을 더욱 악화시키는 촉매제 역사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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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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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주민 가운데 대다수 소작농의 경제상태는 오히려 부채의 증가로 인한 궁핍화 현상을 보이고 있었으며 지주계급 및 관제 금융기관에 의해 이중삼중의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화주민 중에 목면 직물을 부업으로 삼고 있는 농가가 있어 경제생활에 약간의 향상을 초래할 수 있었다. 하지만당시 일제는 농가의 부채 증가 원인을 농민들의 전통적인 관혼상제의 과다 지출에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일제의 식민농정에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일제도 우려하고 있었다. 농촌사화에서 자작농이 소작농으로 전환하는 것은 농업의 발달을 저해하고 상품 구매력의 감소를 가져와 전반적으로 경제상태를 위축시킬 수 잇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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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김도형 <갑오 이후 인천에서의 미곡유통구조> </ref>
  
  

2019년 6월 17일 (월) 19:04 판

강화지역의 농업조건

강화도는 부속도서 면적을 제외하고 우리나라에서 다섯번째로 큰 섬이며, 토지면적은 총 41만 732제곱킬로미터이다. 그 중 논이 12만ㄴ 8582제곱 킬러미터,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지주경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강화는 조선시대부터 수로를 통하여 지바으이 물자를 서울로 대량 수송하는 수로 유통경제의 중심지였다. 또한 인천이 개항하면서 경기지역 주요 쌀 생산지인 강화는 미곡상인들이 미곡을 수매하여 개항장 미곡무역상에게 전매하기에 가장 용이한 지역으로 부상되었다. 따라서 개항 후 강화지역의 지주들은 미곡 무역을 적절히 이용하였으며 미곡상인들도 농촌에서 미곡을 수매하여 이를 무역상에 전매함으로써 부를 모으고 이를 다시 토지에 투자함으로써 대지주가 되기도 하였다.

강화지역의 농업생산이나 지주경영은 국내외의 유통경제의 발달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에 따라 한말 일제하 지주제 변동문제와 관련하여 강화 김씨가, 강화 홍씨가의 지주경영에 대해서 일찍부터 주목되어왔다. 이들이들 지주들의 농업경영은 기본적으로 전통적 지주제 형태를 취하였으며 일제의 침략과 더부어 농민에 대한 수탈도 강화되었다. 1920년대 들어 일제가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면서 지주들은 일본 자본주의 체제하의 지주로 재편성되었으며 식민지 농업정책의 비호하ㅎ에 확대 발전되었다 반면 일제하 절대 다수의 농민층은 농업생산비는 물론이고 생활비마저 잠식당하는 고율의 지대에 허덕였고 결국 농가경제의 파탄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따라서 이들 농민들은 생계보충을 위한 외지벌이에 나서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을 경우 결국 고리대에 의존하는 채무농으로 전락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농민들은 고율의 소작료를 지불해야만 했던 가난한 소작농이었다. 일제하 강화지역의 농촌사회의 실정도 만성적인 빈궁화가 진행되었다. [1]

제 2절 강화지역 지주와 농업경영 강화는 비록 도서지역이지만 토지가 광활하여 경지면적으로 자작한다면 그 소출만으로도 이 지역 농민들이 3년을 호구하는 것이 가능하여다. 그러나 경작지의 대부분은 소작농에 의해 경작되었고 지주들은 고율 소작료를 수탈하고 있었다. 강화지역 지주들은 자경지를 경작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농지를 고율소작료에 의지하는 소작제로 경영하고 있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1926년 당시 강화의 총경지 면적은 논이 1만 1699ha이고, 밭이 4357ha, 합계 1만 6056ha였다. 그 가운데 자작지의 비율은 41.2%였고 소작지의 비율은 58.7%이다. 이로 보아 강화지역은 남부지역보다는 자작지의 비율이 높은 편에 속하였다. 그렇지만 약 60%의 경지는 소작농에 의해 경작되었고 이들 경작지를 소유한 지주들이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특히 강화는 논의 비율이 높은 편이었고, 강화 김씨가나 강화 홍씨가의 사례연구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벼농사 중심이었다. 김씨가의 경우 농지경영의 규모는 밭농사에 대한 벼농사의 비율이 20:80, 10:90이었고 홍씨가의 경우에는 비율이 97:3, 95.5로 그 격차가 더욱 컸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하 강화에는 벼농사를 지주제로 경영하는 지주층이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 우선 일제하 강화지역의 지주 명단이 자세히 소개된 명부를 통해 살펴보자. 다음 표는 1937년 6월 말 현재 30ha 이상 소유한 한국인 및 일본인 대지주 명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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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이후 일본의 부족한 식량을 충당하고자 경기도 일원에서 생산된 쌀의 상당량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이때 개통된 수인선은 경기도의 쌀을 항구인 인천항으로 옮기기 위한 것이었다.

강화의 논농사도 기본적으로 대일 수출을 위한 것이었다. 이때 강화의 대지주들은 밭을 논으로 개량하는 등 꾸준히 논의 면적을 확대하는 한편 품질 개량을 통해 단위면적당 생산량도 늘려갔다.

하지만 1920-1930년대 일제의 저미가정책, 농업공황으로 인하여 한국인 지주경영의 성장이 막히기 시작한다. 농업공황으로 인한 쌀값 하락은 소작인의 몰락, 농가경제의 파탄으로 이어졌다. 또한 일본의 밭농사 장려, 조선 쌀 반대운동 등으로 일본 식민지 당국은 조선 쌀의 대일 수출을 저지함으로써 국내의 쌀값은 급격히 하락하였다.

이와 같은 생산력의 정체에 부딪힌 강화의 대지주들은 산업자본으로 전환을 꾀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조양방직인 것이다.

그런데 당시 강화의 농업사회는 특이한 점이 있었는데 전국적으로 소작 쟁의가 활발히 일어나지만 강화에서는 그런 사례들이 없었고, 지주들 역시 고율의 소작료를 매긴다든지 하는 폭압적 수탈 사례도 보고된 바 없다.

특히 홍씨 집안은 재해가 날 시에 의연금, 동정금 등을 출연하여 시설을 고치거나, 구휼 사업에 뛰어들었으며, 사회지도층 역할도 일정하게 수행하였다. 홍재용이 제2대 강화군수를 역임하거나 홍재승이 6.25 전쟁 시 강화치안대장을 맡은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해방 이후 대지주 중에는 송정헌(치안대활동)이 눈에 띄고, 기존의 대지주인 김우중(길상면 온수리), 홍재용, 홍재묵 형제, 홍재승. 홍종문 등은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대지주였다.

하지만 군수를 지내던 홍재용은 9월 28일 강화에 재침입한 북한군에 의해 잡혀 납북되고, 10월 2일 조양방직에서 일민주의청년 동지회가 치안대를 구성한다. 일민주의 청년동지회는 다음날 다른 우익 치안 조직과 함께 강화치안대를 구성하는데 홍재승이 치안대장을 맡게 된다.

​조양방직은 일제 강점기에도 기업운영에 있어서 지금의 산재보험과 같은 보험에 가입하여 노동자의 산재에 대비한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폐업이후 1960년대 접어들면서 강화를 대표하는 직물업체는 김재소가 설립한 심도직물로 넘어가게 된다.

그 이후 조양방직 터는 다른 형태로 활용되다가 2000년대에 오면서 잡동사니가 쌓인 버려진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2018년에 이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낡았으나 새롭고 옛스러우면서도 감각적인 공간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강화의 농업구조의 변화와 조양방직의 설립, 그리고 강화의 농촌사회의 특징과 6.25 전쟁기를 둘러싼 좌우대립의 문제, 지주-소작관계와 산업화 과정, 강화양명학의 관계 등 연구할 만한 소재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조양방직의 역사는 강화 근현대사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향후 강화의 농업구조 변화 과정, 6.25전쟁을 둘러싼 좌우대립, 그리고 강화양명학과의 관계 등 연구할 만한 소재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출처 : 인터넷 강화뉴스(http://www.ganghw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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