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감리교"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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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스(한국명 조원시, 초대 담임) 김우제, 권신일, 김경일, 주선일, 허진일, 최족일, 김봉일. 이살로메 등이 있다. 김우제 목사는 김상임의 둘째 아들로 하와이와 상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펼쳤고, 독립운동가 김동수 선생의 부친이다. 강화진위대장 출신으로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기독교 사회주의자 이동휘가 김우제 목사를 만나 기독교에 입문하게 되어 이 교회의 권사를 지냈다. 김동수, 김남수, 김영구 형제가 이동휘와 관련되어 순교하였다. 유경근도 이 교회와 함께 독립운동을 펼쳤다. 4대 담임이었던 홍승하는 후에 신민회를 조직한다. *케이블(E. M. Cable), 손승용(제5대 담임), 이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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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스(한국명 조원시, 초대 담임) 김우제, 권신일, 김경일, 주선일, 허진일, 최족일, 김봉일. 이살로메 등이 있다. 김우제 목사는 김상임의 둘째 아들로 하와이와 상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펼쳤고, 독립운동가 김동수 선생의 부친이다. 이준선생이 회장으로 취임한 국민 교육회를 발족했다. 강화진위대장 출신으로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기독교 사회주의자 이동휘가 김우제 목사를 만나 기독교에 입문하게 되어 이 교회의 권사를 지냈다. 1905년 하와이로 떠났다. 김동수, 김남수, 김영구 형제가 이동휘와 관련되어 순교하였다. 유경근도 이 교회와 함께 독립운동을 펼쳤다. 4대 담임이었던 홍승하는 후에 신민회를 조직한다. *케이블(E. M. Cable), 손승용(제5대 담임), 이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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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22일 (월) 11:2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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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강화도 지역의 기독교는 감리교에 의해 시작되었다. 179개 교회 중에 120개가 감리교회다. 강화지역 기독교인 중에 감리교 소속이 77.6%나 된다.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언더우드와 함께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한국 감리교회 선교를 개척한 미감리회 소속 선교사였다. 1893년 존스 선교사(G. H. Jones, 한국명 조원시 趙元時)가 인천 책임자로 와서 독립계삭회가 구성되면서 선교확장의 열망이 강화지역으로 이어졌다. 당시 강화지역에 대한 감리교의 선교는 제물포교회(현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시작됐다. 존스 목사와 인천의 노병일, 김기범, 이명숙, 백헬렌 등 한국인 전도자들이 강화선교에 열성을 쏟았다. 강화도는 우리나라 수도로 가는 관문이며, 북쪽으로는 황해도 해주 방면, 남으로는 덕적도를 경유해 충청도 당진까지 이어지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강화의 복음화는 황해도 전도를 위한 전진기지 확보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했다. 당시 한국 선교를 관리하고 있던 스크랜턴은 1892년 12월 21일에 본국으로 보낸 편지에서 존스가 이미 1892년 말에 강화전도여행을 시도한 것과 더불어 강화지역 선교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제물포와) 이웃해 있는 섬인 강화에는 7만 명 주민이 있는데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충동하고 있습니다. 강화를 얻게만 된다면 우리에겐 값진 보화가 될 것입니다. 사실 발판은 이미 얻어 놓았습니다.”

강화의 근대정신에 영향을 미친 것은 기독교의 수용이다. 1893년부터 본격적으로 성공회, 감리교 등 기독교의 선교가 이루어지는데, 이들이 설립한 교회와 학교는 근대문물을 익히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특히 성재 이동휘가 1907년 조선군대해산 당시 대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후일 교육운동으로 돌아서면서 합일학교, 보창학교를 비롯하여 수많은 교육기관을 설립하게된다. 이때 이동휘 등이 설립한 학교와 교회는 1919년 강화군 3.1만세운동의 근거지가 된다. [1]


교산교회

강화 최초의 개신교 교회. 감리교. 1893년 세워진 교항교회(현 강화교산교회)다. 1892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이며 인천 내리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존스 목사는 몇 차례 강화도에 들어오려고 시도했으나 강화 유수의 거부로 들어올 수 없었다. 강화읍 남문에서 발길을 돌렸다. 이 때 강화도 시루미(지금의 양사면) 출신으로서 인천에 있던 이승환(양사면 시루미 마을 출신으로 제물포에서 주막을 운영)이 예수를 영접하고 인천 내리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인천의 교회계(계) '계꾼 교인'의 한 명이었다. 한 명의 계꾼이 50명의 돈을 갖고 도망갔으나 이승훈은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존스 목사는 세례를 주겠다고 했으나 그는 거부했다. 술파는 사람이라서. 그리고 천국같이 좋은 곳을 가는 일을 고향에 계신 어머니보다 먼저 할 수는 없다고 해서. 그리고 같은 해 여름, 존스 목사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는 이승환의 요청으로 강화도 북쪽 해안까지 왔다. 그러나 지역 유지인 유학자 김상임의 반대로 육지에 발을 붙일 수 없었다. 그러자 이승환은 한 밤중에 어머니를 업고 해안 갯벌을 지나 존스 목사가 있는 배로 갔다. 그리하여 존스 목사는 이승환의 어머니에게 선상에서 세례를 베풀 수 있었다. 인천에서 활동하던 전도인 이명숙과 전도부인 백헬렌가 시루미로 파송되어 이승환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4~5명으로 시작한 예배는 불과 1년 만에 80명으로 부흥했다. 천민출신이 많은 시루미 마을에서 좀 떨어진 다리목에 살던 양반 김상임이 존스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으면서 마을 전체가 개종했다. 김상임이 1894년 자기 집 앞마당에 예배당을 마련하자 시루미 마을교인들이 옮겨왔고 다리목(교항, 橋項)과 시루미(증산, 甑山)의 한자를 따서 교산교회라 이름 지었다.

교산 교회는 강화의 다른 지역 섬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전초기지가 되었으며 그 흐름은 크게 세 줄기로, 첫 줄기는 홍의(홍의교회)를 거쳐 강화읍으로 해서 남쪽으로, 둘째 줄기는 고부(고부교회)를 거쳐 중서부로, 셋째 줄기는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섬인 교동으로 연결되어졌다. 이러한 복음 전파의 흐름을 통해 강화는 선교 개시 10년 안에 강화전역에 교회가 설립되는 결과를 얻었으며 현재는 150 여개의 감리교회가 있는 섬이 되었다.

박기현 목사(교산교회)는 "강화도 기독교의 특징은 복음을 있는 그대로 삶속에서 실천을 한다는 것이다"며, "그것이 강화 주민들에게 퍼져나가면서 기독교는 자유와 해방을 주는 실천적인 종교라는 인식이 확대 됐고, 강화도가 복음화 되는데 기여했다"고 말했다. [2]

인물

존스(한국명 조원시), 이승훈, 김상임, 종순일

김상임은 강화의 양반 중 선상세례의 과정에 감명을 받은 이가 있었다. 경주 김씨 가문으로 벼슬을 하지 않고 초시 신분으로 교항(현 교산)에 서당을 차려 후학을 양성하며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던 김상임이 바로 그다. 김초시는 이승환 모자에 대한 존스 선교사의 사려 깊은 행동을 본 이후 한문성경을 전해받고 읽은 가운데, 자신이 찾던 ‘정감록’의 ‘십승지지’란 주요 비결이 바로 성경의 ‘십자가지도’ 임을 깨닫고 개종을 결심한다. 이후 김상임이 마을의 가신과 산당을 불사르고, 말씀 공부에 집중한 결과 교산교회 신앙공동체의 교인 수가 급증하게 된다. 서민층 일색이던 신앙공동체에 양반층이 합세하며 강화교산교회는 복음을 전 지역으로 확산시키게 된다. 김상임은 존스 선교사의 배려로 인천의 신학회와 평양의 신학회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02년 4월 김기범, 김창식 목사에 이어 감리회의 한국인 3대 목사후보가 됐으나, 목사안수를 몇 달 앞두고 전염병이 창궐한 마을의 심방을 갖다가 감염돼 55세를 일기로 소천한다. 이후 교산교회 성도들은 김상임을 강화의 바울로 부르며 그의 신앙의 길을 따르며, 연이어 홍의교회(1896)를 거쳐 고부교회(1897) 상도교회(1899) 등 강화 전 지역의 교회개척을 위해 헌신하며 강화 어머니교회의 역할을 감당하게 됐다. 김상임의 개종은 개신교를 부녀자와 천민들이나 믿는 종교로 여기고 천시하던 주민들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교산교회는 기존 서민층과 가세한 양반층이 어우러진 균형적인 발전이 이루어졌고, 강화지역 지도급 인사들이 연이어 개종해 강화 전역으로 복음을 확장시키는 초석이 되었다.

홍의교회

강화 두번째 개신교 교회. 감리교. 교산교회 설립 3년 후인 1896년에 설립되었다. 이 마을 서당훈장이던 박능일이 교산교회의 김상임을 만나고 돌아와 자기 집(상도리 958번지)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되었다. 서당학생 20여 명, 종순일, 권신일과 함께 자기 집에서 홍의교회를 설립했다. 홍우, 홍해, 삼해라고도 불렸다. 구한말 제물포에 남, 여 매일학교가 하나씩 밖에 없었는데 강화 홍의교회에도 하나가 있었다. 1898년 교회 출석인 고씨부인이 별세했을 때 곡하지 않고 찬송가를 부르며 비석대신 십자패를 세웠다. 선원, 길상, 석모도, 주문도, 성검도, 영정도, 인천 등지에 전도하던 교회다.

인물

김상임의 개종 소식을 듣고 따지러 갔다가 박능일도 개신교에 감화되어 개종하게 되었다. 그는 서당을 운영하던 훈장이었다. 개종 이후 그의 서당은 근대 학교로 변모하였고 토담집은 예배당으로 바뀌어 자립적인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1년도 채 안 되어 예배 출석 인원이 80명에 육박했다. 일자 개명을 처음 한 인물로 인천 제물포 영화학당 교사이기도 했다. 1900년 12월 평양신학회에서 전도사 과정 이수후 잠두교회에서 1901년 4월 1903년 2월까지 담임으로 시무했다. 존스 목사와 함께 잠두의숙을 설립했다. 1903년 3월 1일 별세. 당시 <신학월보>는 '기둥같은 선생을 잃었다'고 논평함.

홍의교회 신자 중 종순일은 마18:23-35의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읽고 나서 자신의 구원을 1만 달란트빚을 탕감받은 자로 여겼다. 그는 당시 마을에서 부자였다. 많은 사람이 그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사람들을 한 마당에 모았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빚문서를 불태웠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제 여러분들은 제게 빚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선포 한다. 그리고 가산을 다 팔아서 강화도 근처의 섬들을 돌며 전도활동을 한다. 그는 예수를 믿고 삶을 뒤집어 버렸다. 부자가 가난한 자가 되어 복음 하나만 들고 섬들을 찾은 것이다. 이는 대한그리스도인 회보. 1900.06.06자에 소개되었다. [3]

일자돌림

'믿음 안에서 하나', '첫 믿음'이라는 의미로 일자가 들어가는 이름으로 개명을 한다. 주 안에서 '하나'라는 의식이 우리 민족의 색채에 맞게 변모된 양상으로 볼 수 있다. 홍의교회에는 최초로 믿게 된 7명의 교인이 있었다. 이들은 중대한 결단을 한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니 한 형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돌림자를 같이 쓰기로 했다. 항렬을 맞추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것이 한 일(一)자이다. 성은 바꿀 수가 없으니 그대로 두고 이름의 끝자를 한 일자로 맞추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에서 중요한 단어라고 생각한 7가지 글자를 선택했다. 그래서 나온 것인 능(能), 신(信), 경(敬), 봉(奉), 순(純), 천(天), 광(光) 등이다. 이 첫 교인 7명은 이 글자를 하나 씩 뽑았다. 그리고 자기 성을 유지하고 가운데 글자를 이것으로 하고 끝은 한 일자로 항렬을 맞춘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인 바로 박능일(朴能一)과 같은 이름이다. 조선시대 말기, 유교가 사회전반을 지배하고 있던 그 시기에 이 사람들은 다른 삶의 방식을 택한 것이다. 특히 박능일은 그 마을에서 훈장으로 유교의 선생이며 제사장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유교의 근간인 사농공상의 반상을 없애고, 아저씨와 조카, 위아래의 서열을 파괴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한 형제라고 했으니 이것은 보통의 충격이 아니다. 그 당시의 생각을 뒤집어 버리고, 구조를 뒤바꾸어 버리며,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온 것이다. [4]

검정 옷

당시 홍의교회 출석 교인들은 옷을 검정색으로 통일해서 입고 다녔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의식을 보여줌과 동시에 흰 옷이 실용적이지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이를 보고 '검정개'라고 놀렸다.

강화중앙교회

강화 세번째 개신교 교회. 감리교. 홍의교회에 출석하던 주선일, 박성일, 허진일, 김봉일 등 몇몇 교인이 강화읍 천교하(현 강화읍 신문리. 신문리 144번지, 초가 6칸 반)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오늘날 강화중앙교회의 모체(잠두교회)가 되었다.1900년 9월 1일의 일이었다. 강화지역 복음 전파 8년 만인 1900년에 수도 강화읍에 드디어 교회가 세워졌다. 다음해 4월 존스 선교사의 협조로 기와집 25칸, 초가집 16칸을 구입하여 교회를 현 위치로 옮겼다. 이때 소요된 상당한 금액은 존스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오하이오주 매리에타(Marietta)에 살고 있던 교인, 찰스 오토(Charless Otto)가 보내 준 기금으로 충당되었다. 이로서 8년 전 존스가 강화성에 입성하려던 꿈을 강화토착인들에 의해 이루게 되었다. 이 교회는 설립 8개월 만에 강화에서 가장 넓고 큰 예배당을 마련하게 되었으며, 강화 선교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교회명은 1914년‘잠두교회’에서‘강화읍교회’로 변경. 1975년 11월 ‘강화읍교회’에서 ‘강화중앙교회’로 변경되었다. 1904년 '월곶교회' 개척을 시작으로 26개 교회를 직접 개척하거나 설립에 도움을 주었다.

인물

존스(한국명 조원시, 초대 담임) 김우제, 권신일, 김경일, 주선일, 허진일, 최족일, 김봉일. 이살로메 등이 있다. 김우제 목사는 김상임의 둘째 아들로 하와이와 상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펼쳤고, 독립운동가 김동수 선생의 부친이다. 이준선생이 회장으로 취임한 국민 교육회를 발족했다. 강화진위대장 출신으로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기독교 사회주의자 이동휘가 김우제 목사를 만나 기독교에 입문하게 되어 이 교회의 권사를 지냈다. 1905년 하와이로 떠났다. 김동수, 김남수, 김영구 형제가 이동휘와 관련되어 순교하였다. 유경근도 이 교회와 함께 독립운동을 펼쳤다. 4대 담임이었던 홍승하는 후에 신민회를 조직한다. *케이블(E. M. Cable), 손승용(제5대 담임), 이용주

미더리 순국지

갑곶 순교지에서 남쪽으로 1.5Km 정도 위치한 미더리 순국지에서 4명의 기독교인이 학살을 당했다. 1907년 대한 제국의 군대가 해산되던 날 강화도의 군인들과 주민들은 의병이 되었다. 일본군과의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었고 읍내까지 들어와 30여명의 주민을 무차별 학살했으며 많은 이들이 체포되었다. 그중에 김동수, 김영구, 김남수, 김근식은 강화 중앙 교회에 다니는 독실한 신자였고 강화지역 반일 사상을 이끈 민족의 지도자였다. 일본군은 이들을 칼로 머리를 쳐 죽였고 강화도 감리교회에 큰 박해가 시작이 되었다. 1년 후 데밍 선교사는“이곳(강화)은 피의 세례를 통과 했습니다.”라는 말을 남겼고 이들의 순교의 피는 강화도에 오늘의 감리교회를 이룬 큰 부흥의 씨앗이 되었다. [5]

합일초등학교

강화중앙교회는 교육선교를 위해 1901년 4월 1일에 존스 목사와 박능일 전도사가 신교육 기관인 교회부설로 “잠두의숙(蠶頭義塾)”을 설립하였으며, 1902년에 또 여학교인 “합일여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민중교육을 시작하였다. 이후 두 학교는 하나의 학교로 통합되었는데, 오늘의 합일초등학교로 발전되었다. 이 학교는 일제치하에 저항하는 민족운동과 한국 개화의 산실이 되어 왔다. 강화중앙교회는 복음, 민족, 교회가 함께 어우러지며 발전하는 민족과 지역을 구원한 구심점이다. 강화진위대장 출신 이동휘(李東輝)권사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의 보창학교, 유경근 속장(독립운동가)의 교회지도자와 강화중앙교회가 함께 추진한 민족교육운동은 민중계몽과 독립사상으로 이어졌다.

합일(합일)이라는 단어에서 강화감리교와 강화양명학의 접합을 떠올릴 수 있다.

하와이 이민

존스 김우제 홍승하 해외 농업이민 해외 독립 자금

독립운동가

성재 이동휘 조봉암 홍승하 김우제

관련 사이트

참고문헌

『강화중앙교회100년사』이은용

출처

  1. 출처: [강화군 지역정치의 어제와 오늘(1). 인터넷 강화뉴스. 2017.11.16 http://www.gangh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113]
  2. 출처: [강화도 선교 120년 역사를 한눈에. 노컷뉴스.2013.04.25 https://www.nocutnews.co.kr/news/4320367]
  3. 출처: [홍의교회 이야기. 아이굿뉴스_기독교연합신문.2012.11.29]
  4. 출처: [홍의교회 이야기. 아이굿뉴스_기독교연합신문.2012.11.29]
  5. 출처: [생명의 샘가. 2015.06.06 http://icbf.co.kr/zbxe/board2_3/86899]